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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현실과 믿음 / 행21:17-26 (신224쪽)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바로 앞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었던 각오와 다짐은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린 모습입니다.

딱 한 가지의 이유 때문입니다.

 

20-21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 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하지 말고 또 규모를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저희가 들었도다”

 

유대인 중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이미 수만 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도 열심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율법을 어기라고 하는 것처럼 가르친 사도 바울의 그간의 활동이 맘에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지금 예루살렘에 왔다고 하면 저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사도들의 말대로 따르겠다는 나실인 네 사람을 데리고 결례를 행하고 머리를 깎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그동안 가르친 것은 율법을 어기고 모세를 거스르라고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니까 기독교 안에 유대교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살면 율법의 삶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깨닫고 아울러 인간의 무력함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요 율법의 완성인 예수 앞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제는

율법의 완성을 이루는 삶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다만 예루살렘 안에 사는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한 것입니다.

때문에 그 오해를 풀어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이제 것과의 태도와는 다르게 순순히 그 말을 듣습니다.

 

26절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저희와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의 만기된 것을 고하니라”

 

결례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여러 가지 율법을 따라서 행하는 특별한 일 정도입니다.

이 결례를 행함으로써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이 믿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떤 오해가 생깁니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에 분명히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이 겨우 유대인들로부터 환난을 면하기 위해서

결례를 행하는 것이냐고 하는 오해입니다.

 

오늘 그 오해를 해명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앞서서 다 살펴봤지만 사도 바울은 그간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반대하던 것을 다 이기고 예루살렘에 올라 왔습니다.

그런데 맨 처음 하는 일이 슬그머니 자기 자신의 낭패를 피해버리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것은 ‘죽으면 죽는 거지 뭐가 무서워서 결례를 행하느냐?’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왜 이런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일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 부분을 이해하기에 앞서서 생각해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 대부분 명분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유교의 전통적인 문화에 깊숙이 뿌리박힌 우리들은

명분에 무척 강하고 반대로 또 약합니다.

때문에 뭔가 거창한 일 앞에서는 작은 소리들이 들리질 않습니다.

국가경제발전이라는 명분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흘린 눈물과 땀과 피가 가려져 버립니다.

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수리하려고

1억 원짜리 내시경 장비를 동원해서 검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 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군사들이 죽어야만 했을까요?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주의 일을 한다는 것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전도한다고 해서 남의 집에 함부로 대문 두드리고 무례해도 되는 것 아닙니다.

새벽기도 차량운행을 해보면 얼마나 많은 교회의 차량들이 제 맘대로 다니는지 모릅니다.

 

목사가 설교를 하는 것과 회의의 사회를 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설교를 할 때는 성도들이 아무 말도 못하지만 회의를 할 때는 이러저런 의견을 다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당한 일을 한다고 할 때

반대하고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 안 된다고

아예 차단을 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작은 것을 놓치면서 큰 일을 한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소소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잘해야만 정말 잘하는 겁니다.

죽음도 불사하지만 그 죽음을 불사하는 것만큼 작은 것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결례를 행하는 겁니다.

 

고전 9:19-23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마음을 바꿨다고 비난을 받을 수 도 있지만

남을 배려하기 때문에 기꺼이 그 비난을 감수하는 겁니다.

 

명분으로만 따지면 사도 바울이 결례를 행하면 안 되는 겁니다.

죽음까지도 각오한 사람이 겨우 유대인들의 비난이 두려워서 결례를 행한다면 말도 안 되는 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에게 시험 들게 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때문에 결례를 행하면서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그의 사명은 자기의 모든 것, 특히 자존심까지 내던지면서

모든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리에까지 가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국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하셔서

내 자존심까지 짓밟아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남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가장 큰 방해거리가

내 자존심이고, 내 자신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나를 버리고 묵묵히 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기는 힘이요, 순종이요, 인내요, 겸손이고, 자기 부인입니다.

때문에 신앙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고전10:31-3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남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힘들게 하고 피곤하게 하고 어렵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하는 신앙생활이 남들에게 피곤하게 되고 어렵게 되고 힘들게 되지 않아야만 합니다.

 

때문에 사소한 것이 중요합니다.

거창하고 당연한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헌금생활을 얼마나 잘하느냐?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느냐가 중요하질 않습니다.

사소한 것부터 세상과 다른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티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우리 교회도 주일헌금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만 할 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아주 작은 것부터

나누고 섬기는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죽기를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의 오해와 비난 앞에서 자기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박해를 받아서 죽는 것보다 더 힘든 진정한 믿음입니다.

현실의 한계 앞에서,

또는 제한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오로지 복음의 은혜만을 나누려고 하는 진정한 믿음의 멋입니다.

그 멋이 가득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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