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 일행은 부지런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밀레도에서 고스로 다시 로도로,
그리고 바다라에서 베니게로 가는 배를 타고 두로에 내리게 됩니다.
당시의 교통 사정이 어떠했는지를 짐작 할 수 있는 여정입니다.
아무리 부지런히 서두르고 애를 써도 복잡하고 어렵고 힘들기만 한 여정을 가는 겁니다.
사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 그 모든 것이
형통한 시온의 대로를 걸어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막힘이 없고,
반대도 없고,
어려움도 없는 그저 순탄하기만한 여정을 가야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결정하고 노력하는 것이 몽땅 다 하나님의 일이니까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셔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때문에 나타나는 부정적인 현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일체의 다른 의견이나 생각을 밸 수 없다는 겁니다.
그냥 거기에 다 휩쓸려 가버립니다.
도무지 다른 의견이나 생각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정당한 일이라고 하면 무조건 따르고 순종해야만 하는 것으로만 결정이 나 버립니다.
일체의 다른 의견은 도무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마음을 합하고 뜻을 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호도해 버립니다.
때문에 정당한 일을 한다고 할 때 반대를 하면 원수가 되고 맙니다.
교회들마다 장로를 안 세우려고 하고,
또 장로를 세우고도 무시해버리는 것이 바로 다 그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일이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반대를 하고 시위를 해도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언제든지 이런 저런 생각과 의견을 다 받아들이면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뭡니까?
내 의견과 내 주장이 전부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설령 성령의 감동이 주신 결과라고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4절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두로에 잠간 머무를 생각이었겠지만 무려 칠 일을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도 제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제자들의 이야기가 뭡니까?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인간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보세요.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은 모두 다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전혀 상반된 성령의 감동이 나올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럴 때에 어떤 결정을 해야만 합니까?
우리 각 자의 마음이 사실 다 다른 겁니다.
삶의 형편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릅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주시는 감동도 다 다릅니다.
그럴 때에 어떻게 교회를 운영해야만 옳을까요?
누구 말대로 날마다 회의하고 토론하고 투표해서 결정을 해야 합니까?
아니면 담임목사 혼자서 내 맘대로 결정을 해야만 합니까?
그런데 본문을 한 번 가만히 읽어보세요.
댁에 가셔서 본문을 통해서 어떤 마음을 주실지 묵상 한 번 해보세요.
5-6절 “이 여러 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쌔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이 말씀이 모든 의문의 결론입니다.
결국은 뭡니까?
사도 바울은 바울대로 자기의 길을 그냥 계속 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말린 제자들은 자기들의 삶의 자리에서 살던 그대로 계속 살아가는 겁니다.
자기들에게 허락하신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
사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말라고 권면은 했지만 그것으로 끝낸 것입니다.
더 이상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을 끝까지 고집하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이해를 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자기들은 자기들 살던 대로 사는 겁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하나 됨입니다.
이런 영적 조화의 맛을 깨닫고 살아가야만 신앙생활의 깊은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요 8:3-1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왜 우리에게 다툼과 시기와 분쟁이 납니까?
다들 자기 맘에 드는 대로 상대방을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는 것을 남에게 같이 하기를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당한 것이면 더 그렇습니다.
전도하자고, 기도하자고, 헌금하자고 하는 것들이 다 그렇습니다.
내가 하기 때문에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오히려 못하는 사람을 이해해주고 받아들여주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잘 보세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하는 제자들의 권면에 대해서 야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그런 걱정이나 하고 있느냐고 뭐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걱정은 걱정대로 다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에게 허락하신 길은 길대로 계속해서 가는 겁니다.
자기가 행하는 신앙생활의 모든 기준이 사도 바울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 누구도 절대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때문에 각 자 다양한 것을 다 인정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누구의 강요나 고집이나 가르침에 의해서 움직이는 신앙생활은 그냥 종교생활일 뿐입니다.
자기에게 허락하신 대로 믿고 사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울러 남을 판단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모두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한 신앙생활은 남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두로에서 쓸데없이 칠 일을 머무른 것이 아닙니다.
'추천 설교 > 나무목교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현실과 믿음 / 행21:17-26 (신224쪽) (0) | 2015.08.12 |
---|---|
[스크랩] 주의 뜻대로 / 행21:7-16 (신224쪽) (0) | 2015.08.12 |
[스크랩] 고별 설교 / 행20:17-38 (신222쪽) (0) | 2015.08.12 |
[스크랩] 될 수 있는대로 / 행20:13-16 (신222쪽) (0) | 2015.08.12 |
[스크랩] 살아난 유두고 / 행20:7-126 (신222쪽) (0) | 2015.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