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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 힘대로 (행11:27-30)

성도의 성도다움이 증명되는 가장 큰 조건이 무엇일까요?

우리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부분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오해를 사고 있는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성도로서의 마땅한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라면 당연히 나타내야만 하는 삶의 모습이고 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런 태도나 모습이 삶에서 별로 나타나질 못하고 있는 성도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목사들의 잘못입니다.

예수 믿고 사는 모습이 진정으로 어떤 것인지를 삶을 통해서

바르게 나타내 보이지 못하고 있는 목사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 역시도 포함된다고 할 것입니다.

 

왜 목사들이 삶의 바른 태도를 보이지 못하고 있을까요?

예수 믿는 것이 자기실현의 수단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실현이라는 것은 세상의 용어입니다.

예수를 믿고 사는 것이 자기만족과 자기 즐거움과 자기 욕구의 충족 수단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살고 죽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게 될 것이라는

자기중심적인 욕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때문에 어려움을 견디고 이겨낸 영광을 말하는 것이 오로지 이 세상의 것들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되고 잘 된 것들로 자기 신앙생활의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쉽게도 모든 사역자들의 본이 되는 사도 바울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주의 일을 하면서 이 세상의 것을 온통 다 빼앗겨 버린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다 잃어버리고도 전혀 거기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 이상한 삶이었습니다.


고후11:1-1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사도 바울의 이런 태도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자기를 더 낮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례를 전혀 받지 않고서라도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다른 사도들처럼 복음을 위한 수고에 대해서

교회로부터 분명하게 사례를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복음을 위한 수고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왜죠?

돈 받아먹으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어떻습니까?

교회가 커지고 성도가 많아지면 당연하게 목사의 사례도 늘어납니다.

물론 목사라고 해서 삶이 빈곤해서 어렵게 살 건 없습니다.

먹고 살만큼은 살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먹고 살만큼 만이라야 합니다.

그 이상은 아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들 보세요.

먹고 살만큼이 아니라 이건 완전히 호사를 누리는 겁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하는 거 잘 기억해두세요.

나중에 나무목교회가 성장해서 담임목사에게 충분히 호사를 누릴 만큼 해 줄 수 있을 때

과연 제가 호사를 누리는지 똑똑히 봐두세요.

 

아닙니다.

그건 아닙니다.

아닌 건 아닙니다.

 

아무리 세상의 골백번을 더 바뀌고 변해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그렇죠?

그 정도가 되면 이제 나눠야만 합니다.

충분히 나누고 살아야만 합니다.

 

오늘 성도의 성도됨이 나누는 것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천하에 흉년이 들어서 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자기들의 것을 나누어서 보내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나바와 사울에게 들려 보내서 장로들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제자들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나눌 줄 알아야만 성도인 것입니다.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이 성도가 아니라 기꺼이 자기의 것을 나눌 줄 아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나누어야만 합니까?

여러 가지 것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크게는 두 가지를 나누어야만 합니다.


먼저 복음의 빚진 것을 나누어야만 합니다.


롬 1:13-16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우리는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복음의 빚을 갚고 살아야만 합니다.

복음의 빚을 갚는 것은 전도나 선교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 평생을 다해서 감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미루고 대신하라고 할 수 없는 우리 각 자의 빚입니다.

누구나 다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문제는 이런 사명의 삶을 우리는 마치 소수 몇 사람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아예 꿈도 안 꾸는 사람도 많습니다.

전도나 선교는 시간 있고, 돈 있고, 다른 할 일이 없는 사람들만 감당하는 것으로 여기고 맙니다.

때문에 거의 모든 성도들이 여기에 신경 쓰질 않습니다.


딤후 4:1-5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전파해야만 합니다.

오히려 듣지 않는 세상이 된 것을 알고서 더 전해야만 합니다.

복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말씀을 전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전도요, 선교입니다.

 


또 하나는 물질의 빚진 것을 나눠야만 합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을 다 나눌 줄 알아야만 진정으로 성도인 것입니다.

나눌 줄 모르는 성도는 진정으로 사는 맛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끊임없이 나누는 것입니다.

 

나눈 것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구제입니다.

어려운 이웃의 삶을 위해서 내 것을 나눌 줄 아는 삶입니다.

내 것을 나눈다는 말에 유념을 하셔야만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어서 내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가졌기 때문에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내 것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내 것은 이미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맡겨두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기꺼이 나눠야만 합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움켜쥐고 놓지 못합니다.

 

보세요.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내 것을 움켜쥐고 사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내 것을 벌자고 악착같은 것입니다.

 

 

그럼 왜들 그렇게 복음과 물질을 나누지 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빚진 자로서,

또 하나님의 것을 맡은 자로서

기꺼이 나누고 살지 못함은 무슨 이유입니까?

 

단 한 가지 이유입니다.

이 땅의 삶에만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삶에 목숨을 걸고 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생각이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자면 종말론적인 삶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종말론적이라고 하면 뒤로 넘어가시는 분들 많은데 이건 정말 간단한 겁니다.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 땅의 삶이 끝난 다음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사는 것이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그 심판은 우리가 이 세상살 때 어떤 삶의 모습으로 살았느냐를 평가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진 시간으로 무엇을 했는지,

주신 물질을 갖고 무엇을 하고 왔는지,

내 주변에서 살게 한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증거하고 전했는지를 다 평가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했던 모든 것들을 평가받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때를 대비해서 살고 있는지를 돌아봐야만 합니다.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대비를 해야만 합니다.

 

그 대비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각각 그 힘대로” 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했든지 관계없고 상관없습니다.

오늘 내게 주신 마음에서부터 물질, 시간까지

과연 내가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사용하고 있는지를 대비해야만 합니다.


엡 3:7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골 1:25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내게 주신 것만큼만 하시면 됩니다.

남들과 비교한 평균치가 아닙니다.

내 것만 하시면 됩니다.

 

왜 교회 안에서 물질 때문에 시험이 듭니까?

남의 것과 비교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게 주신 것  만큼만 하면 됩니다.

내게 주신 것만큼은 못하면서도

나보다 많이 드리는 남이 받을 것을 생각하니

배가 아파서 시험이 드는 것입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린 것만큼만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드린 것에 대해서 더 많은 것으로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다만 우리 사람들은 그런 생각과 능력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드린 시간과 액수와 내용에 관심이 더 많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에 솔깃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평균으로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주신 마음과 믿음만큼 하시면 됩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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