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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그리스도인 (행 11:19-26)

살면서 그 이름만 생각해도 마음이 아픈 사람이 있습니다.

헤어진 첫 사랑이나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

뭔가 더 잘해주질 못해서 마음이 애틋해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자녀들 중에도 꼭 눈에 밟히는 자녀가 있고 형제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눈에 꼭 밟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일 것입니다.

특별히 수요기도회에 참석한 오늘 우리들이 그럴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는 전혀 다른 가치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사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가치관과 시대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성경에서 말씀하고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들을 한마디로 정의해주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의미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 “그리스도의 종” 이라는 겁니다.

점잖은 표현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쟁이”라는 뜻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렇게 많이들 불렀습니다.

“예수쟁이”라고...

원래 쟁이라고 하는 것은 직업을 말하는 겁니다.

자기의 일, 즉 직업이라는 겁니다.

직업이 뭡니까?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자신의 일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와 같은 수준, 같은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냐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서 먹고 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수 그리스도를 앞장세워서 먹고 산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것으로 인해서 먹고 사는 모든 문제를 해결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당시의 시대상황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제국의 수리아 지방의 수도입니다.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서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로마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의미는 당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모습이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세속의 문화가 발달한 도시인 것입니다.

그런 수리아 안디옥의 환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당시 안디옥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무리들이 등장을 하게 된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하는 눈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것을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살아가는 것을

제 일의 모토로 삼고 사는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시대,

어떤 곳에서든지 그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고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 흐름을 무시한다는 것은 곧 바로 남들에게 뒤처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모든 것을 다 걸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어떤 복이 그들에게 임했기에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면서까지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있는,

속해있는 것을 최우선으로 알고 살았을까요?

 

오늘 본문을 아무리 뒤지고 뒤져봐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먹고 살게 된 비결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먹고 산다는 소리를 듣게 했을까요?

 

우리는 그럼 과연 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인이라는 소리를 들을만한 모습인가 하는 겁니다.


본문에서 그 정확한 힌트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먼저는 21절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한다는 의미는 구약 성경의 여러 곳에서 등장을 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직접 책임을 지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인 것입니다.


시139: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주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오른손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그 능력의 손이 나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이 나를 붙들고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혹시 나는

실패할 수 있고,

힘들 수 있고,

좌절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손이 붙들고 있는 한 그런 일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다 해결하십니다.


보세요.

불과 몇 사람이 나서서 주 예수를 전파한 것뿐인데

수다한 사람, 즉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주 앞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능력의 결과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을 우리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보이기만 할 뿐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시는 일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다 내가 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오해해서 교만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서 최초의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게 세우시는 교회에 사람은 그저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인격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사람을 동역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서 사람들을 세우셔서 함께 일을 하시는 것으로 해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극히 교만하거나 반대로 좌절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일들로 인해서

스스로 나설 필요도 뒤로 물러 설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다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그 때를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바나바의 등장입니다.


23-24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이 세상의 사람들 중에 그리스도인을 생각하면 마음이 찡하듯이

성경의 사도들을 생각하면서 바나바를 생각하면 마음이 찡합니다.

신앙 안에서도 이처럼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주변의 사람들을 더 존귀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서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좋은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자기의 자리를 내어주면서까지 남을 귀하게 만들어 주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사는 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철저하게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자신의 삶을 드려서 이웃을 빛나게 하고 자신은 작아지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자신의 것을 침소봉대하는 세상입니다.

작은 것 하나 한 것을 가지고 엄청나게 큰일을 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자기 PR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의 자랑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바나바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그 누구라도 기꺼이 자기의 자리를 내어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교회의 모교회입니다.

충분히 간섭할 수 있고 관여할 수 있습니다.

관여하고 간섭한다는 것은 이렇게 저렇게 따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위치와 자리에서 안디옥 교회를 찾아 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섬기라고 주신 자리 하나 맡으면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 하는 것이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는 것 같은 자세로

온갖 꼴불견을 다 보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규정 따지고

원가 따지고

원칙 따지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권한을 권한으로만 여기고 일하면 함께 하는 사람들이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전혀 그런 모습이 없습니다.

법을 잘 지켰는지,

돈을 잘 썼는지,

과정이 좋았는지 조사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에게 더 기분 좋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격려만 해줍니다.

그들의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자기의 일처럼 기뻐해줍니다.

더 열심히 해가자고 격려하고 권면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고후 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는 나누고 섬기고 누리는 것입니다.

자기 잘난 척의 증명서가 아닙니다.

교회의 모든 일은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자기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하신다고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하는 것이라고 믿으니까 함께 하는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우리들이 가져야만 할 마땅한 신앙적인 태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비록 오늘을 더뎌 보이고 안돼 보이고 힘들어 보여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능히 이루실 줄을 믿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서로가 다 중요합니다.

쳐다보면서 기뻐해주고 행복해 해주고 감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기보다 함께 하고 있음에 더 큰 기쁨을 누리는 것이 좋습니다.

좀 더 오버해서 칭찬해주고 감사해주고 예뻐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우리 눈에 안차는 일들이 분명히 있고 그런 모습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격려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말씀에 대한 권위입니다.

말씀의 가르침에 대한 순종입니다.


26절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입니다.

말씀을 가르친 것입니다.

또 말씀에 순종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어 살면서도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잃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교제가 아무리 든든하다고 할지라도

말씀에 대한 든든한 지지기반이 없으면 오래 가질 못합니다.

인간적인 관계는 언제든지 허점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지지기반은 언제든지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때문에 말씀 앞에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의 시간, 기도의 시간, 성경 말씀을 보는 시간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인도하고

말씀이 지시하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으면 그리스도인입니다.

 

정과 마음이 앞서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앞서는 삶이어야만 합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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