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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말씀 (행12:20-25)

 신약성경의 역사에는 총 4명의 헤롯이 등장을 합니다.

첫 번째는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수님의 나심을 경배하러 왔을 때의 헤롯(마2:1-8, 18)이 있습니다.

헤롯 왕가의 첫 째 왕으로 헤롯 대왕이라고도 합니다.

두 번째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마14:3-12),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조롱한(눅23:8-12) 헤롯 안디바입니다.

세 번째는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행12:1-2), 사도 베드로를 투옥한 왕이고, 벌레가 먹어 요절한 왕입니다.

네 번째는 사도 바울이 잡혀서 심문을 당할 때의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원래 헤롯 왕가는 유대인의 가문이 아닙니다.

이들은 에서의 후손입니다.

에서는 이삭의 큰 아들이고 에돔 사람들의 조상이 된 사람입니다.

에돔 족속인 이들이 어떻게 유대인의 왕이 되었을까요?

이 점 하나만을 생각하더라도 세상에서의 출세는 결코

하나님의 축복이나 영광만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라면 세상적인 권세와 출세에 있어서 최고입니다.

더 이상 오르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오른 것이 아니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부하는 자가 올랐습니다.

 

물론 헤롯 가문이 유대의 왕으로 오르는 데는 역사적으로는 로마 정부의 사정도 있었습니다.

당시의 로마는 세 명(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줄리어스 시저)의 유명한 장군들이

연합해서 정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 세 명이 서로 견제가 심했기 때문에 유대의 총독으로 로마 사람을 보내지 않고

에돔 족속을 헤롯으로 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헤롯이 자기 아들을 갈릴리 지방의 장관을 삼았는데 이 헤롯이 정치를 너무 잘해버립니다.

로마의 비위도 거스르지 않고 유대인들에게도 칭찬을 들으니까

로마 정부에서 그를 초대 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유대에서의 종교적, 정치적 지지기반이 전혀 없는 헤롯 왕가는

로마와 유대인들의 눈치를 심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헤롯 대왕이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가는 것을 싫어하고

결국 두 살 아래의 남자 아이들을 다 죽여 버리는 범죄를 저지른 것도

자신의 입지에 대해서 불안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의 헤롯 왕들이 모두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세례 요한을 죽이거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도 모두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스스로 도취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어리석은 범죄를 저지르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

이 때 그의 나이가 34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굳이 헤롯 아그립바의 범죄는 용서하지 않으시고 죽게 하셨을까요?

사실 굳이 죽이시려면 예수님의 탄생 때 범죄 했던 헤롯 대왕부터 죽이셨더라면

헤롯 왕가의 범죄가 계속 이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나 세례 요한, 사도 야고보의 죽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동안은 놔두셨다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헤롯 아그립바 1세만 죽이게 되는 겁니까?

오늘 헤롯이 죽었다고 해서 헤롯 왕가가 아예 몰락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의 아들이 다시 왕 위에 오릅니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왕의 권세도 세상의 권세입니다.

그러나 그 권세를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적인 권세를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혹시 그가 악할지라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역대 정권들 중에서 군사독재정권이 있었던 것도

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사람의 권세가 우리에게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기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좋으냐? 나쁘냐? 로 모든 것의 좋고 나쁨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 근거와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타나고 있는 우리가 불공평하게 판단하고 생각하는

일들의 대부분이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려고 하신 것입니다.

아니 반대로 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예고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2세 미만의 남자 아이를 다 죽이라고 명령을 한 헤롯 대왕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아니 물론 그가 나쁘긴 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그 순교에 대한 예고가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그 아이들을 죽인다는 말입니까? 라고

따지신다면 그건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말씀으로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그 수준과 가치관이 다른

하나님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일 뿐입니다.

우리가 감히 이렇다 저렇다 를 판단할 아무런 권한이나 책임을 갖고 있지 못하는 겁니다.

 

단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무리 악한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또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의 애굽의 바로가 그랬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빌라도도 그랬습니다.

헤롯 왕들도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헤롯은 그럼 어떤 경우일까요?

그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요?

사실 그는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정치적으로 유대인들의 신앙심을 이용해서 자신의 왕위를 지킬 뿐이었지

원래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도 헤롯 아그립바의 죽음은 예고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굳이 그를 죽이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롯이 가이사랴에 내려 간 것은 로마 황제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이사랴 라는 도시의 이름의 뜻이 “가이사의 성”입니다.

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나타내는 시저의 영어식 발음입니다.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에게 바쳐진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는 그들에게는 신이었습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황제의 권력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헤롯이 그곳에서 자기도 신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22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백성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겁니다.

사람들의 그 소리에 취해 버렸습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해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소리에 파묻혀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해버리는 겁니다.

 

요즘의 세상을 보세요.

온통 사람들의 소리를 끄는 것에만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면 그것이 곧 성공인 것입니다.

내용이 좋고 나쁘고 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저 사람들의 생각을 일깨우고 자극하고 움직이게 하면 되는 겁니다.

 

요즘 TV를 한 번 보세요.

온통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의 내용이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또 우리에게는 영적으로 옳든지 그르든지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오로지 사람들이 많이 보면 되고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소리와 관심에

진실이 가려지고

양심이 타락하고

사람들의 삶은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사회 현상은 이미 성경에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딤후 3:1-5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지금 헤롯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들입니다.

스데반에게 돌을 던져서 죽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스데반을 죽인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헤롯의 경우에 헤롯의 소리를 신의 소리라고 말하는 것은 뭡니까?

그리고 그런 그들의 소리에 취해서 자신의 자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헤롯의 어리석음은 뭡니까?


다들 한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의 유혹과 쾌락이 있고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자기들의 잔꾀가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항상 적당하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세에 자기들의 사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적당하게 빌붙으려는 것입니다.

헤롯이건 유대인들이건

자신들이 누리고 싶어 하는 세상의 것으로 인해서

결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저들의 불신의 꼭대기에 헤롯이 있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헤롯을 치신 것입니다.


 세상의 삶에 적당하게 안주해서 육신의 안위만을 꾀하려고 하는

오늘 성도들의 가치관에 철퇴를 가하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을 가지고 세상적인 것을 누리려고 하는

이중적인 태도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의 특징이 뭡니까?

거룩입니다.

거룩을 유교의 관점에서만 이해를 하는 어리석음이

우리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당연하게 해야 할 말을 가려서 하고,

나쁜 점은 절대 드러내지 않고,

높은 거 좋아하고,

많이 가진 거 자랑하고,

속 안에 들어있는 것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더 신경을 쓰고,

작은 거 하나 행한 것을 더 크게 드러내는 경향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모두가 다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행동들입니다.

그러나 거룩은 인간적인 그런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나타내고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적인 기준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기준들과는 정반대의 모습이 훨씬 더 많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거룩의 모습이고 영적인 모습입니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나는 이 세상에서 실패하더라도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더 흥왕하는 것입니다.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더 높아지고 강화되고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더 널리 퍼지는 것입니다.

 

헤롯이 왕이라는 당시의 절대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다면 얼마나 멋있었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나중에 잘 되면 하나님께 더 잘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나중은 나중입니다.

나중에 잘 돼서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어려울 때 잘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거룩은 훈련이 되어야 하고 연습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뜬금없이 되질 않습니다.

적당하게 유대인의 비위를 맞추고, 또 왕의 비위를 맞추려던 유대인들을 보세요.

 

그러나 반대로 25절에 나오는 바나바와 사울을 보세요.

그들은 지금 예루살렘 교회를 돕고자 헌금을 했던

많은 이방 교회들의 정성을 전달하고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들을 얼마나 환대했을까요?

좀 더 높아질 수도 있을 텐데 그들은 조용히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좀 더 흥왕할 수 있을까요?

제발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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