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로봇 태권V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누구에게나 그 어디에서나 천하무적이 되어서
모든 일에 승리만 하고 만사가 다 형통한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그런 은혜만 주시는 분으로 알고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참으로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이 내게는 아무런 은혜도 주시지 않는 분으로만 알고
도무지 그 앞에서 사는 기쁨을 모른다고 하면
역시 매우 빈곤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주일학교 아동부 아이의 엄마가 아주 어려운 불치의 병에 걸렸습니다.
아이의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네가 엄마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엄마를 반드시 고쳐 주실꺼야.”
아이는 선생님의 말씀을 믿고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마침내 아이의 엄마는 아이의 기도대로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기쁜 아이가 주일에 선생님께 그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네 엄마가 다 나으셨다는 말이 정말이냐?” 라고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아이한테는 믿음의 말을 했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대한 많은 수식어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표현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의 문자 안에 갇히신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닌
인격적으로,
현실적으로,
영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죽어 모든 것이 끝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물론 입술로는 다들 믿고 산다고 이야기는 합니다.
그러나 삶을 볼 때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헤롯 왕의 박해로 옥에 갇혀서 죽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의 사자를 보내서 건져주시는 모습입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이고 나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신이 나서
베드로까지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헤롯의 지위가 무엇입니까?
한 나라를 대표하여 통치하는 왕입니다.
사실 왕은 나라의 그 어떤 것이라도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을 위한 것으로 사용하고 이용해야만 합니다.
물론 헤롯의 명분은 그럴 듯합니다.
백성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베드로를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당시의 헤롯은 정치적으로 로마에 속해 있는 왕입니다.
로마가 그를 임명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로마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로마는 또 누구의 눈치를 보느냐면
점령지인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의 눈치를 보는 겁니다.
그래야만 식민지인 이스라엘이 대항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헤롯이 바로 로마가 눈치를 보는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를 반대하지 않아야만 로마로부터 자신의 신임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이런 태도는 전형적인 불신자의 모습이고 요즘 세상의 모습니다.
솔직히 헤롯과 같은 존재가 살아 있음을 볼 때
하나님께서 죽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남의 고통이 내 행복이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내 행복을 위해서 남을 불행하게 하는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 세상은 우리들더러 끊임없이 헤롯의 모습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기 즐거움과 만족을 위한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도 같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고 증거 되어야만 하는 교회가
자기만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한 자기만의 울타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열려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기 성장과 부흥과 만족과 자랑만을 위한 죽어있는 공동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자기 정치적인 수단이 되었고
자기 돈벌이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를 팔아서라도 만족하겠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막11:15-18 “저희가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아무나 가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멸할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기이히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한 번 씩 생각해보세요.
오즉 살기가 어려우면 성전에서 돈 바꿔주고 비둘기 팔고 그럴까요?
이런 걸 부자들이 직접 하겠습니까?
다 가난한 사람들이 하고 부자들은 자기 이권이나 챙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상을 엎으신 이유가 뭡니까?
신앙생활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강한 경고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자신들을 돌아봐야만 합니다.
과연 나는 어떤 자세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서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로지 내 자신의 부귀와 영광만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이냐를 항상 질문해봐야만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단순히 ‘베드로를 구출해주시기 원합니다.’ 라는 것만으로 기도를 하고 있다면 얼마나 초라합니까?
저들 교회가 모여서 열심히 빌고 빈 것이
단순히 자신들의 지도자 베드로를 구해달라고 하는 것이라면
저들 역시 헤롯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대놓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헤롯보다도 훨씬 더 못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까지 들먹이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추악한 속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욕을 하는 겁니다.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사는 존재들인 성도들의 모습이
자기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벧전 2:11-12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만 합니다.
교회는 세상 사업이 아닙니다.
교회가 갈수록 세상의 사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기업화가 교회의 목적이 아닙니다.
교회는 선하게 가야만 합니다.
교회가 선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믿고 따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겁니다.
때문에 교회는 언제나 기도만 할 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빌고 가야만 합니다.
조금 어렵다고 해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갈 수 없습니다.
경쟁교회가 온다고 어려워지는 일이라면
그건 교회의 일이 아니고 이미 사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가 할 일이 아니니까 일찌감치 때려치워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시선이 베드로가 풀려난 기적에 가 있으면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풀려난 일로 우리의 관심이 간다면
그건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내 원하는 것만 주장을 하는 겁니다.
베드로는 반드시 풀려나야만 했습니다.
왜냐?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하셔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풀려나든지 풀려나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옥에 갇힌 모습이나
풀려난 방법이나
또 풀린 다음의 교회 모습에
우리 마음이 갈 것이 아닙니다.
정말 우리가 가져야만 할 관심은 여기 17절 말씀 이곳입니다.
17절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여기 이곳을 밑줄 치고 당구장 표시하고
수없이 반복해서 읽어보고 생각해보고 기도해봐야만 합니다.
지금 기도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자기 풀려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랑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딱 이 곳에서 한 번만 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다른 사도들에게도 보고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할 뿐입니다.
그 후 베드로는 홀훌 털고 다른 곳으로 떠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생각해보세요.
그가 풀려난 방법은 놀라운 것입니다.
두고두고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를 해도 되는 놀라운 일입니다.
요즘의 간증하고 다니는 분들의 이야기는
감히 비교할 상대도 안 되는 엄청난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지나간 일일 뿐입니다.
왜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반드시 기적만으로 증명되고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적을 체험했어도
오히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다운 간증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 편으로 보면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명을 가진 자들을 지키시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당연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덤벼오는 오늘의 환난이나 아픔이나 고통 앞에서
좌절하거나 조급하거나 심각함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연하게 대처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게 사명을 주신 이상
설마 굶기시고 힘들게 하시고 어렵게 하시겠느냐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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