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앞에 행한 사도 바울의 설교는 역시 명 설교였습니다.
사도 바울로 하여금 이런 설교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율법에 대한 정확하고 해박한 지식과 예수를 그리스도를 영접한 확실한 체험이었습니다.
그런 영적인 지식과 능력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신약성경을 무려 13권이나 기록할 수 있게 할 만한 충분한 은사였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다음 안식일에도 복음을 전해달라고 하는 사람들의 요청을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집회가 끝난 후에, 개인적으로도 바울과 바나바를 찾아와
계속해서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도 있게 됩니다.
때문에 그 다음 안식일에는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몰려듭니다.
정말 폭발적인 반응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완전히 복음으로 부흥의 대박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면에 전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유대인들도 나타납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은 복음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는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우리가
이렇듯 예수를 믿고 살아가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계기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만약에 오늘 본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쩌면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면서,
지옥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안타까운 형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복음이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전해지게 되는
놀라운 전환의 순간이 오늘 본문에 드러나 있습니다.
46-47절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는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바로 이 말씀이 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복음에 대하여
전혀 관계가 없는 이방인 중에서도 진짜 이방인인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은총을 누리고,
이렇게 수요일에도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내용입니까?
안 그랬으면 우리는 여전히 우상들 앞에서 머리 조아리고
정성을 바치기에 허리가 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 바울의 신학적인 실력과 영적인 경험, 또 복음에 대한 확신들을 고려해볼 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왜 이렇게 쉽게 포기해버렸을까?’ 하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스스로도 말을 해놓고서,
왜 그렇게 쉽게 유대인을 내버려두고 이방인들에게로 방향을 틀었을까 하는 겁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이방인을 향한 사도로 정하셨다는 전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쉽게 유대인들을 버리는 듯한 오늘 본문의 표현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그렇죠?
이왕에 마음을 먹었으면 끝까지 한 번 해봐야하는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한 구원의 열심히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성경이 있습니다.
롬 9:1-5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자기 동족 이스라엘 곧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는 일이라면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죽더라도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이스라엘의 구원과 기꺼이 바꾸겠다는
정말 죽을 각오를 한 다짐의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전혀 그런 느낌이 없습니다.
그냥 유대인들이 변박하고 시기하니까 단 번에 잘라버리고 끝내버립니다.
유대인들을 위해서는 죽음도 각오한다더니
너무 쉽게 유대인들에 대한 사역을 포기하는 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뭡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제1차 전도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싶을 정도로 무성의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복음의 절대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도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설득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마치 물건을 파는 장사치처럼 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뭔가 그럴 듯하게 포장을 잘 해서
유대인들을 설득하고, 납득시키고, 이해시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메시야로 믿으라고 하려면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다해야만 할 터인데
전혀 그런 노력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내용을 이야기하고 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원래 그렇습니다.
전혀 설명하거나 이해하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이해했는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심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의 첫 구절이 어떻게 시작을 합니까?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냥 이렇게 시작하고 끝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으로 그 모든 설명을 다 끝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증거나 이런 것이 있다고 이야기 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해서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를 바라고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납득하면 복음을 좀 더 잘 받아들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복음이 뭡니까?
하나님의 하신 일입니다.
그것도 우리를 위해서 해주신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좀 더 이해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좀 더 일찍 누렸을까요?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뒤늦게 전도를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된 분이
그 전도해준 사람한테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그럽니다.
‘아니 이 좋은 것을 왜 이제야 말해줬데?’
그러나 그 전에 말해줬으면 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안 들었습니다.
안들을 뿐만 아니라 앞장서서 핍박을 했을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우리가 전하고 설명해서 믿게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일 뿐입니다.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때문에 오늘 사도 바울과 바나바처럼 담대해야만 하는 겁니다.
포기할 때는 포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의 도구로서 서야만 합니다.
어차피 우리 능력과 실력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를 뛰어넘어서 뭘 한다고 하는 것은 다 어불성설입니다.
요즘의 안타까움이 뭡니까?
복음이 세상과 타협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걸 원하니까 이런 걸 해주면 내가 교회 나갈게.’라고 하고 있습니다.
‘내 비위를 맞춰주고 내 원하는걸 해줘. 그러면 교회 갈게.’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요,
사랑이요 라고 하는 측면이 오해를 받은 까닭입니다.
적당하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차라리 다 포기하고 놓쳐서 죽게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는 다짐을 놓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결코 타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들이 모두 사교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를 세울 때부터 동네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서 세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많이 모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과가 뭡니까?
세상 가운데서 욕심이 사나운 교인들이 너무 많은 겁니다.
신앙생활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니까,
도대체 예수 십자가까지 내세우고 자기 맘대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 앞에 자기를 드리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냥 끝까지 하나님과 타협을 시도하는 교인들뿐입니다.
'제가 드리는 이 정성과 물질과 시간을 받으시고, 하늘 문을 열어 마음껏 축복해주시오?’
라고 은근히 협박하는 교인들이 넘쳐 납니다.
물론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액션도 저들에게 취하시지 않으니까,
그게 잘 믿는 것처럼 생각이 들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함께 하니까,
그것 자체가 진리인 것처럼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하는 믿음이 아니면 그건 모두 가라지일 뿐입니다.
영적으로는 허깨비들뿐입니다.
유대인들의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섬겨온 역사가
다 쓰잘데기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처럼
마지막 때에 가면 다 필요 없는 인간적인 허풍과 자랑일 뿐입니다.
잠29:26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
가장 중요한 문제는 뭡니까?
‘오늘 나는 과연 영적으로 안전한가?’ 입니다.
유대인들을 걱정 할 때가 아닙니다.
한국교회를 걱정하고 염려할 때가 아닙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께 작정된 자로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작정되지 못한 자라면
이 땅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다 물거품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48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작정된 자의 증거가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 사는 겁니다.
딴소리 딴 마음을 안 먹고, 말씀의 바탕 위에서 사는 겁니다.
그 말씀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하더라도,
더 많은 어려움 앞에 세우더라도,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아프고 어렵더라도 담대하게 달려가는 겁니다.
,
51-52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지금 쫓겨나는 겁니다.
그래도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겁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살림살이 어려워지고 힘들더라도
여전히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삶이면 됩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갈 것이 아니고, 장터에 똥지게 지고 갈 게 아닙니다.
어려운 길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며 사는 것이
진정으로 작정된 자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삽시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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