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서 설교를 하는 장면입니다.
비교적 짧은 내용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엄청납니다.
본문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면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대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예수 믿고 살면
우리 삶은 과연 행복할까? 불행할까? 하는 겁니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어떤 해답이 나와 있습니까?
빌 1:29-30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사도 바울의 이 말을 통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곧 예수도 믿고 고난도 받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사도 바울의 삶이 그 사실을 확실하게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고난을 좋아하시는 분이 있을까요?
고난을 친구삼아서 곁에 두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 믿고 사는 삶이라는 것은 곧 고난도 받는 삶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삶이 고난도 같이 받는 것이라면 우리 삶은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정말 불행하십니까?
아니 혹시 불행하십니까?
만약에 불행하다고 대답하셨다면
혹시 그 불행의 기준이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월세 살고 있어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남편이 돈을 못 벌어 와서 그렇습니까?
것도 아니면 자식이 속을 썩여서 그렇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몸에 질병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월급이 제대로 안 나오고 하는 일이 잘 안 되어서 그렇습니까?
그런데 지금 예로 드는 것이 모두 이 세상의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채셨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너무 원시적이고 육체적이고 세상적이고 정욕적 입니다.
그냥 우리 먹고 사는 모든 일에만 그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그 기준부터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받는 고난은 결코 불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쁨과 감격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들어서 예수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바로 그 축복이 오늘 사도 바울과 바나바로 하여금
놀라우신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증거하고 있게 합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행복하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적인 모습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정말 행복하게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불쌍하고 초라하고 보잘것없게 나타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곳에서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변함없이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다 예수를 믿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또 어떻습니까?
2절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의 말씀에 대해서
전혀 순종하지 않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실 하나님 앞에서 죽으려고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죽어도 혼자 죽지 않는 것이 이들입니다.
죽어도 같이 죽는 겁니다.
최소한 같이 죽는 겁니다.
자기들만 예수를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안 믿고 죽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런 사람들의 말이 사람들에게 아니 성도들에게 꼭 먹힙니다.
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그새 마음을 돌려 버립니다.
이런 일이 바로 앞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있었습니다.
행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문제는 유대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말에 솔깃해서 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도 분명히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듣고 나서 사는 길로 나오질 않고 죽는 길로 달려간 것입니다.
그것도 다 같이 죽는 길을 택한 겁니다.
이들은 오히려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내쫓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앞장을 서도 대충 선 게 아닙니다.
5절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능욕하고 돌로 친다는 것은 아예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를 사람같이 여기지도 않고,
무조건 돌로 쳐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이들이 지금 사람으로서 못된 일을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사람답습니다.
그런데 왜 마치 짐승을 때려잡는 것처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러는 겁니까?
복음을 전하는 귀한 일을 하는 이들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해주셔야만 하는 것 아닙니까?
이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지는 못 할망정
오히려 죽이려고 덤벼드는 것은 너무 한 것 아닙니까?
이럴 때 나서는 것 정도는 해주셔야만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신세인
이들이야말로 정말 불행한 사람들 아닙니까?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시지는 못한다면
그래도 최소한의 보호막 정도는 돼주셔야만 하는데
도대체 전능하시다는 하나님은 이럴 때 뭘 하고 계실까요?
하다 못해서 바울과 바나바한테 덤비는 사람 몇 명은
손을 직접 봐주시면 안 되느냐는 겁니다.
한 두 사람을 그렇게 해놓으면
누가 감히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덤비겠습니까?
까불면 죽는다는 소문나면 아무도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일부 더 못된 것들은 죽어도 좋다고 덤빌 겁니다.
그런데 정말 복음을 방해하다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도 까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바울과 바나바는 예수 믿으라고 전하고서는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가버립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오늘 하고 있는 이 땅에서의 모든 갈등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나는 내 할 만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나 좀 도와주세요.’라고들
주장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내용이 정당하고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전혀 고민도 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설쳐 대고 있습니다.
시장 바닥에서 목소리 터져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내가 너희를 도와주러 왔다. 그러니 좀 시끄럽더라도 참고 들어라!’ 는 겁니다.
내용이 정당하니까 까불지 말고 다 들으라는 겁니다.
너를 위해서 전해주는 복음이니까 아무 말 말고 들으라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복음이 전해지질 않습니다.
사실은 복음의 내용이 모든 사람에게 정당하니까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야만 합니다.
내 자신은 맞아 죽을 각오를 가지고 전해야만 합니다.
복음은 십자가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이고 상대는 높여서 전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에게 그런 면이 조금도 없는 것이 요즘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너무 높아져 버렸습니다.
복음이 조금 높아지더라도 문제가 될 텐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복음의 타락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타락입니다.
그러나 오늘 두 사도를 보세요.
6-7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이들은 여전히 복음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놓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핍박받을 것을 다 알았습니다.
그리고 맞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도망을 쳤습니다.
죽기 싫어서 도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기 때문에 도망을 한 것입니다.
아직도 자기들에게는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에 도망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고니온을 떠나서도
루스드라와 더베에 가서 즉시 복음을 또 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바울이 복음에 반대하는 자들을 대항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물론 바울이 이겼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을 훨씬 더 잘 전하게 되는 효과가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누가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하다가
바울한테 걸려서 죽었다는 소리가 나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도 안 덤빌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더 잘 전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하실 거라면 바울부터 진작에 죽었어야 했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에 한 몫을 한 사람입니다.
죽어도 벌써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방해했다고 죽이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천만에 말씀입니다.
복음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을 죽이는 대신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를 더 어렵게 하시고 힘들게 하십니다.
그것이 복음 전파의 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오늘 내가 복음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것이 어렵고 힘들면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 어렵고 힘든 일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겁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조금도 행복할 이유나 조건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오히려 기쁘고 감사하고 즐겁고 행복한 겁니다.
내 돈 쓰면서 즐거운 겁니다.
내 시간을 다 내면서 행복한 겁니다.
아무런 소득도 없고 결과가 없더라도 무조건 감사한 겁니다.
그러니 우리들에게 누가 이렇게 묻는 것은 정말 영광입니다.
“힘드실 텐데 어떻게 사세요?”
우리가 무엇으로 삽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삽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은혜를 주셔서 기특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위태위태하면서도 겨우겨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척하면 이렇게 어렵게 될 것이라는 거 이미 알고도 시작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고후 1:3-10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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