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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더불어 (행 1:12-14 / 08년 6월18일 수요기도회)

 

중국의 대지진에 관한 뒷이야기가 참 많습니다.

두장옌이라는 곳의 한 중학교에서 어문학 수업을 하고 있던 판 메이중 선생은

지난 5월12일 지진 당시 학생들보다 먼저 달아났다는 이유로 교사 자격을 취소당했습니다.

판 성생은 지난 12일 건물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대지진임을 직감했습니다.

건물 밖으로 나가서 운동장으로 대피했는데 자기가 가장 먼저 운동장에 도착한 것을 알았습니다.

뒤늦게 뛰어 나온 학생들이 ‘어떻게 혼자 도망칠 수 있느냐?’ 면서 원망을 하자

그는 ‘내 목숨은 아깝지 않느냐?’ 면서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순간에

혹시 내 딸이라면 희생을 고려할까 모친이라도 쉽지 않았을 것’ 이라고 했답니다.

교사 자격이 취소된 후에도 그는 교사라고 해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학생들을 구해야한다는

규정은 어디에도 없다면서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부부는 남편이 자기혼자만 살겠다고 건물 밖으로 뛰어나가는 것을 본 아내가 실망을 해서 이혼소송을 내기도 했습니다.

 

긴급한 상황에서 우리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이야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믿음은 사실 부스러기조차도 되지 않는 믿음입니다.

쓰나미나 대지진 같은 걸 한 번 겪어봐야만 그 진정한 믿음의 실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요즘 경제가 전 세계적으로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려울 때 우리 정부가 가지고 있는 경제에 대한 진정한 실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렵기 때문이라고 핑계만 대는 건 전문가가 할 일이 아닙니다.

어려울 때 드러나는 실력이 진짜 실력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목격한 제자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를 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모인 숫자가 120명이나 됩니다.

우리 나무목교회의 수요기도회도 이 정도는 모였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12명이 모이고 그 다음에 70명이 모이고, 그 담엔 120명이 모이고, 300명이 모이고,

300명이 넘으면 또 새로운 교회를 세워서 개척하고...

제가 생각하는 교회의 가장 적당한 지경은 300명입니다.

아브라함의 군사가 318명이었습니다.

기드온의 군사도 3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세요.

지금 모인 120명은 사실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입니다.

그들의 리더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더 이상 함께 하시질 않습니다.

솔직히 그들의 심정은 지금 그 누구보다도 더 착잡하고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하셨을 때의 예수님이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더 뛰어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거수 일투족은 모든 사람들의 동경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예수님만 대단한 게 아니라 덩달아서 제자들까지도 대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행하신 일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통해서 하신 일도 못지않게 많았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가질 수 있었던 우월감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니 제자들 스스로는 그런 우월감을 안 갖겠다고 하더라도

주변의 사람들이 가만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 대통령의 친형에게 물러나라는 소리가 간간히 들립니다.

그 양반도 국민들이 뽑은 국회의원인데 왜 물러나라는 주장들을 할까요?

주변에서 그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야 정작하고 청렴하게 자기에게 부여된 정치만 하겠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온갖 사람들이 다 그에게 줄을 대고 청탁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주변에서 더 난리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대통령보다 더한 권세를 갖고 계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더 말할 거 있습니까?

그런 예수님을 주변에서 모셨던 제자들이 오늘 갖게 된 상실감은 어느 정도일까요?

아마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발목이라도 잡고 함께 올라가고픈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속된 말로 지금은 거의 죽을 맛일 것입니다.

 

그러나 보세요.

그들은 지금 그 누구도 오늘의 상황에 대한 비판이나 비난을, 또는 계획을 말하지 않습니다.

하다 못해서 함께 모여서 기도하게 되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 같았으면 어떠했을까요?

아마 밤낮 사흘은 싸웠을 것입니다.

첫날은 예수님을 대신하는 대표를 세우느라고 싸우고,

다음날은 장소를 정하느라고 싸우고,

그 다음날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세요.

그 누구도 기도 장소에 대한 이견이 없습니다.

누가 정했는지 조차도 언급하질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런 것으로 싸웠을 텐데 말입니다.

기도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가 전혀 없습니다.


애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합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기도하자고 모아 놔도 그 안에서조차 티격 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찬양 부를 때 곡이 늦으면 늦다고 뭐라 하고, 빠르면 빠르다고 난리입니다.

박수치면 박수친다고 뭐라 하고, 안치면 또 심심하다고 난리입니다.

모르는 찬송하면 모른다고 난리이고, 아는 찬송하면 맨날 똑같은 것만 부른다고 또 야단입니다.

 

왜 이런 줄 아십니까?

우리가 워낙 죄인이라서 심령 속에 평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명령 하셨습니까?

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기다리면 되는 겁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과 잘 하는 아이들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은 그때그때 하라는 것만 합니다.

그런데 못하는 아이들은 꼭 딴 짓을 합니다.

영어 시간에 수학숙제 합니다.

수학 시간에는 국어공부 합니다.

때문에 선생님의 가르침이 귀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그 때 그 시간에 하라는 것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기다리라고 하셨으니까 무조건 기다리면 됩니다.

사실 자기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이미 그들 중에 계십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그 동안 온갖 잘난 척은 다 했던 제자들 120명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승천하신 예수님도 이미 그들 중에 계시는 겁니다.

때문에 이견이 없는 겁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우리들 중에도 계십니다.

이 기도회의 자리에 계십니다.


 

오늘 제자들의 모인 구성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우선 12제자들이 있습니다.

많은 여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있습니다.

여러 출신들이 함께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불어가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그 전의 회개를 통한 개인중심의 신앙생활이 이젠 더불어 하는 공동체 중심의 신앙생활이 된 것입니다.

나 혼자만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이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도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서로 부딪히면서 지지고 볶고 싸우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기독교가 이상해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교인은 참 많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함께 하는 성도는 없습니다.

 

물론 모이기는 많이들 모입니다.

그러나 갈수록 이상한 쪽으로 모입니다.

세상에서 해도 될 일들을 갖고 교회 안에서 모인다고 난립니다.

취미별로 모이고, 특기별로 모입니다. 또 관심사별로 모입니다.

끼리끼리 즐겨하는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배짱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그러면서 또 한 쪽으로 홀로 다니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납니다.

남들과 함께 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람들과 부딪히기 싫답니다.

때문에 예배당은 가는 데 그림자처럼 행동합니다.

아니 요즘은 인터넷 방송이나 설교 듣고 혼자 조용히 믿는다는 분들도 여럿 됩니다.

제가 본 사람만 해도 10명은 넘습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한마음이 될 리가 없습니다.

외형적으로 모이는 것은 많은 것 같은데 실제로는 일군 하나 찾기도 힘이 듭니다.

 

세상 속에서 성도들을 찾기란 더욱 힘이 듭니다.

세상 속에서는 전부 다 숨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는 온갖 생폼을 다 잡고 다닙니다.

 

우리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한다는 게 개인의 심정이나 마음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의 말씀을 따라서 하는 겁니다.

누구는 뭐 할 말 없겠습니까?

누구는 바보라서 대책 없이 사는 거 아닙니다.

 

우리가 잘 하자는 것이 사람 앞에 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딤후 3:12-15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의 말씀대로 살자는 겁니다.

성경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만 합니다.

교회에서 왜 사람들의 소리가 밖으로 들립니까?

왜 교회가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을 했습니까?

성경의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만 좀 모이면 성경은 내팽개쳐 버리고 사람의 소리로만 목회를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영적인 파워가 사라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그 어떤 소리도 안 들린 것입니다.

신령한 은혜가 그 안에 흘렀습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는 사람의 소리만 가득합니다.

신령함이 사라졌습니다.

시설은 잘 해놓고 건물을 그럴듯한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냉랭해졌습니다.


말씀이 중심으로 서야만 합니다.

말씀도 사람의 말씀이 아닌 성경의 말씀으로 서야만 합니다.

제자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한 것은 자기들의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의 마음이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이 기준이었습니다.

 

우리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나무목교회도 성경 말씀이 기준이어야만 합니다.

담임목사의 의견이 우선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으로 기준을 세워야만 합니다.

그래야 희망과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간적인 관계만으로는 얼마 가지 않습니다.

마음도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붙들어야만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안 한다면 모를까 한다고 하면 오로지 성경말씀만 붙들어야만 합니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은 모두 사탄의 유혹입니다.


오늘의 형편이 어떠십니까?

급할수록 말씀을 붙들어야만 합니다.

어려울수록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힘이 들수록 말씀대로 행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됩니다.


빌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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