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회남자(淮南子)》의 인간훈(人間訓)에 나오는 이야기로,
새옹이란 새상(塞上:북쪽 국경)에 사는 늙은이란 뜻입니다.
북방 국경 근방에 점을 잘 치는 늙은이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기르는 말이
아무런 까닭도 없이 도망쳐 오랑캐들이 사는 국경 너머로 가버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위로하고 동정하자 늙은이는 "이것이 또 무슨 복이 될는지 알겠소?" 하고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몇 달 후 뜻밖에도 도망갔던 말이 오랑캐의 좋은 말을 한 필 끌고 돌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축하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늙은이는 "그것이 또 무슨 화가 될는지 알겠소?" 하고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집에 좋은 말이 생기자 전부터 말타기를 좋아하던 늙은이의 아들이
그 말을 타고 달리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아들이 장애인이 된 데 대하여 위로하자
늙은이는 "그것이 혹시 복이 될는지 누가 알겠소?" 하고 태연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런 지 1년이 지난 후 오랑캐들이 대거하여 쳐들어왔습니다.
모든 장정들이 활을 들고 싸움터에 나가 모두 전사하였는데
늙은이의 아들만은 다리가 장애라서 부자가 모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새옹지마는 인생은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있고,
나쁜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있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비록 그 출처가 중국의 고사성어이긴 하지만 그래도 신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오늘의 환경에 대해서 너무 일희일비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일이 많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하루의 삶에 대해서 너무 깊은 생각에 빠져서 힘들어하거나
반대로 즐거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우리 삶의 굴곡이 어떤 그래프를 그릴지는...
오늘 아직 사도 바울로 불리지는 못하는 어정쩡한 사울의 모습이 나옵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는 지금 옛적 잘나가던 때의 바리새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도 바울도 아직은 아닌데 신세 참 처량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다가 이제는 도리어 자기가 쫓기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솔직히 그가 잡으러 가려던 처음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차라리 지금의 사울보다는 훨씬 더 낫습니다.
사울은 지금 완전히 배신자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는 이제 다시는 바리새인의 자리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사울이 지금 원래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나쁜 놈이 된 것입니다.
때문에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마음이 변한지 불과 며칠이 못 되어서
사울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이 등장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형편은 그가 죽을 때까지 조금도 달라지질 않았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이 걸어가는 복음 전하는 사역은 정말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길이었습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의 이런 고백은 사도 바울이 대단했다기보다는 그의 처지가 이젠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사면초가의 신세였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그렇게 사면초가의 삶을 살았어도
그것이 사도 바울의 대단한 믿음이라고 말씀할 수 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사울을 유대인들에게 배신자로 만드시면서 까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배신자가 될지언정 하나님 앞에는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고집입니다.
이 고집을 이해하셔야만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원하고 원치 않고의 감정을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우리 같은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에 기어코 참석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고집입니다.
그 고집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딴 길로 갈 수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에서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밥 먹고 사는 길은 이 길이 아니더라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길은 이 길 아니면 전혀 없기 때문에 이렇게 가라고 하시는 겁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린 우리의 삶입니다.
이제 세상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세상의 배신자가 아니라고 말 하더라도
세상은 이제 우리를 믿지 않습니다.
이제 살 길은 한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오늘 사울이 택한 길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으로 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외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물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것은 이 땅에서는 죽음을 각오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복된 길, 즐거운 길, 행복한 길, 잘 되는 길을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잘 되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 믿고 잘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잘 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겁니다.
그건 잘된 것이 아니고 세상이 감싸주고 덮어준 것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지 않고 살기 때문에 세상이 그를 보호해 준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살면 세상은 우리를 감싸주질 않습니다.
덮어주지도 않습니다.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만약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데도 세상에서 잘 되고 있다면 그건 정상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그건 아주 잠깐입니다.
잠깐 동안 뿐입니다.
만원버스를 탔는데 내 서 있는 앞에 앉은 사람이 일어난 것뿐입니다.
잠깐 앉아갈 뿐입니다.
시내버스를 타서 자리에 앉았다고 복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걸 잘된 거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가 영원히 내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죽을 것 같은 형편과 처지 속에서 산다고 하더라도
그 환경이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잠깐일 뿐입니다.
때문에 형편과 처지에 기죽지 말아야만 합니다.
오히려 더 담대하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살 길은 없습니다.
살 길이 없다는 말은 예수의 이름 없이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주 예수의 이름이 없어도 사는 것처럼 사니까 문제인 것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 없이 사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그건 마치 책가방도 없이 학교를 가는 학생과도 같습니다.
총과 탄약이 없이 전쟁터를 나가는 군인과 같습니다.
아무렴 우리가 예수 믿는데 예수의 이름도 없이 살 수가 있습니까?
글쎄요.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롬14:7-9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사는 것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형편과 처지와 환경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전혀 아닌듯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예수 믿는 믿음 하나로 그래도 그것이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임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의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좋아보여도
그래도 지금이 더 행복한 것임을 고백하고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인생이 완전하게 뒤바뀔 것을 믿고 견디는 것입니다.
이 땅의 것으로 결코 채울 수 없는 신령한 것으로 채워지는
영광을 기대하면서 오늘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울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사울은 무슨 일에든지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많은 것을 배우고 아는 놀라운 지식인이 이토록 아주 간단하게 뒤집혀서
인생이 역전 되어 버린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물론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는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사울의 신세가 이전에 스데반의 신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실 다메섹으로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는 일을 예정대로 했다면
그는 고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에서 조금의 변화도 없이 당당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것 때문에 이제 철저하게 타인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사도들이 그를 믿지 못합니다.
때문에 바나바가 사울을 믿지 못하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사울을 소개해 줍니다.
바나바의 도움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바나바까지 동원해서 사울을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좀 전 같았으면 사울이 바나바의 도움을 받겠습니까?
오히려 바나바를 잡아 가두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만사 새옹지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모두 이렇습니다.
누구는 영원히 옳고 누구는 영원히 그르지 않습니다.
오로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우선입니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됩니다.
오늘은 아닌 것 같아도 결국은 됩니다.
오늘은 힘이 들고 어려워도 나중엔 다 됩니다.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살후 1: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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