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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령으로 (행 1:1-5)

본문말씀 : 행 1:1-5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우리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가장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거리감이 느껴지는 신앙의 용어가 바로 성령입니다.

우리 한국식의 정서로 표현하자면 성령님이죠. 님자를 꼭 붙여야 합니다.

 

이 용어와 존재만큼 우리 신앙생활에서

오해의 편차가 심한 것은 없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령에 대한 생각에 좌파와 우파가 존재합니다.

좌우 어느 쪽이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좀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우파 쪽에서 성령을 볼 때 성령은 도깨비 방망이 입니다.

성령은 받으면 우리 인생에서 안되는게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반면에 좌파 쪽에서 보면 성령은 우리의 극한 감정일 뿐입니다.

정신 나간 겁니다. 제대로 생각도 안하고 덮어 놓고 믿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우파는 격렬합니다.

그러나 좌파는 냉랭합니다.

 

우파는 시끄럽습니다. 좌파는 조용하다 못해 아예 소리가 없습니다.

우파는 야단법석입니다. 좌파는 살벌할 정도로 침착합니다.

우파는 재래시장입니다. 좌파는 절간입니다.

 

왜 똑같은 성령을 모시고 살면서 이토록 다를수가 있을까요?

전 어떻게 옳고 어떤건 그르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성령에 대한 성경적인 옳바른 이해를 가져야 하고

폭넓은 영적 시야로 이해를 가져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사람들은 자기가 먼저 갖게 된 경험을 통해 

갖게 된 생각을 우선시 하는 경향이 다분합니다.

 

자기가 먼저 경험한 후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 어떤 생각, 방법, 의견을 들어도

자기 경험만을 최고로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성경의 말씀까지도 자기 경험 밑으로 내려 버립니다.

특히 성령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그런 경향이 더 심합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들에게는 성령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어지고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져서 교회의 신령한 색깔 자체가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박수를 안 치고 통성 기도 안하면 뭔가 심심하다는 교회가 있습니다.

주여 삼창하고 박수 치면서 찬양하는 걸 광신이라고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어떤 이해를 해야만 합니까?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이론이 아닙니다.

그저 성경이 말씀하는 곳으로 되돌아 가보자는 겁니다.

 

사도행전은 그런 면에서 참고가 되는 성경입니다.

사도행전은 교회가 시작되는 형편과 상황을

누가복음의 기록자인 누가가 자세하게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일어난 사실을 중심으로 기록한 성경이 역사서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사도행전이 유일한 역사서입니다.

 

사도행전은 우리 성도들로 하여금

성령이 우리 인간 속에 어떻게 역사하시고 움직이셨는지를

잘 보여주는 성령 사역 성경입니다.

 

앞으로 매 주 수요일마다 우리 나무목교회에서는

사도행전을 공부해 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성령의 등장에 관한 이해를 먼저 하려고 합니다.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를만큼 성령의 사역이 사도행전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의 생각이 이전에 가졌던 성령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다 내려놓고 성령의 바른 이해를 이번에 가졌으면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사도행전 2장에 있었던 성령강림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해

오늘날 예수 믿는 그 누구라도 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각 자의 느낌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사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 이유가 성령께 있지 않고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마17:1-5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까지이냐 하면 바로 "저의 말을 들으라"는 곳까지 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데까지 가야만 하는 겁니다.

말씀을 듣는다는 게 단순히 귀로만 듣는게 아닙니다.

듣고 순종하여 그 말씀을 시행하는 것까지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17장의 베드로처럼 하고 있는 겁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물론 베드로는 이 말 뒤에 더 다른 말을 했습니다.   

바로 이 말입니다.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 말을 슬그머니 빼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입장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가 됐습니다.

우리가 주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크게 잘못된  것이 바로 우리가, 내가 주어일 때입니다.

 

왜 성령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이해가 없느냐면

그건 내 맘대로 하는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입니다. 신앙생활이 취미생활이 됐습니다.

 

제가 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가장 회의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도들의 비위를 맞추는 목회가 되어 버린것 같은.....

 

모두가 다 자기 비위와 자기 입장만을 이해하고 맞춰달라고 하는 겁니다.

 

어제 한 후배 전도사가 찾아 왔습니다.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후배에게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랬습니다.

 

 

"출근할 때 간은 집에 떼어놓고 가서 사역해라!"

 

교회 안에 얼마나 시어머니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냥 자기 원하고 바라는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입니다.

교회 안에 영적인 며느리는 없습니다.

 

자기 좋은 것만 하고 자기 원하는 것만 주장합니다.

주의 뜻은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은 어떠하셨는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 분이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셨습니다.

 

왜 우리에게 성령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까?

왜 성령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까?

 

자기 원하는 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분 시원하고, 자기 혼자 만족하고,

자기 원하는 스타일 대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게 아니라

오로지 자기 만족 만을 위한 삶을 살면서

그걸 신앙생활이라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겁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이유가 많습니다.

이유도 꼭 안되는 이유만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자기 맘에 안드니까 하기 싫으니까요...

 

더 웃기는 것은 자기 하기 싫으면 자기만 안 하면 됩니다.

그런데 꼭 물귀신 작전을 사용합니다.

다같이 못하도록 해 버립니다.

조금이라도 자기보다 나은 것 같으면 영락없이 주저 앉힙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다면

그건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내게 엄청난 손해가 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곧 성경의 말씀이고 주를 위한 길이라면 감당하는 겁니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그런데 한 번 보세요.

자기가 조금 손해라도 날것 같으면 온갖 비난과 트집을 다 잡아서

이웃을 밟아 버리고 죽여 버립니다.

고난은 절대 자기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삶에서 고난을 떼어 내 버리면 그건 속이 없는 찐빵입니다.

거룩하신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삶이 드러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생각만 나타나는 것은 주와 함께 받는 고난을 기피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 경험과 감정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격 전체를 말합니다.

내 전인격이 성령의 온전한 인도하심 앞에 순종을 해서

그 길이 죽는 길이라고 해도 기꺼이 감당하고 달려 가는 것입니다.

 

한 번 해보십니다.

사람 두려워 할 것 없습니다.

사람 의식할 것도 없습니다.

 

주를 위한 선한 목적 앞에 내 부족한 삶을 내어놓기만 하면

이제 성령께서 우리의 전인격을 다 사용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서

사역을 하셨다는 기록이 바로 사도행전입니다.

 

우리 모두도 그렇게 사용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사도행전의 깊은 은혜 안에 빠져 들기를 바라봅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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