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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환상 중에 (행 10:1-23 / 2009년 2월25일 수요기도회)

 사도행전에는 기독교의 역사에 있어서 획을 그은 세 가지 큰 일이 나타나 있습니다.

 

한 가지는 2장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또 하나는 9장의 사도 바울의 회심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부터 시작되는 백부장 고넬료가 입은 성령 세례의 일입니다.

 

특별히 우리들에게는 고넬료의 성령 세례가 가장 직접적인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 고넬료가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인해서

역시 이방인인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복음이 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정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영적인 줄다리기를 하는 위태로운 부류의 사람일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이방인이라는 개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지옥의 불쏘시개 정도에 불과한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자칫 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할 수 있는 그런 형편과 처지가 곧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성령세례가 임했다는 것은

곧 확고부동한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고넬료를 시작으로 해서 이제 복음의 사각 지대에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 중에 오늘 우리들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왜 과정 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느냐면 아직도 이방인의 구원은 끝이 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민족적으로 이야길 해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도 아직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지금도 이 세상에는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런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가 일정 부분 감당해야만 할 일들이 있습니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사도 바울의 이 다짐과 각오가 우리에게 있어야만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고넬료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미 그는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2절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라는 표현을 보면 그렇습니다.


 고넬료에게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이미 구원이 이루어졌고

또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하심이 주변에 증거 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지금의 이탈리라 군대의 백부장으로서 사는 사람인 것을 생각하면

영육 간에 이미 상당한 실력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성령의 세례가 임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리 놀랍지도 않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충분한 영적인 자격을 얻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오해가 우리에게 생기느냐면 뭔가 자격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것 같은 생각들이 있게 됩니다.

때문에 오늘의 나는 아무 공로도 없고 애씀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멀게 있다는 오해를 하게 됩니다.

 

반대로 뭔가 은혜를 누리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건 내가 누릴 수 있는 마땅한 자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격이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라서 겸손하려고 해도 겸손할 수 없습니다.

남들과의 관계에서 꼭 티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불편한 관계의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정말 많습니다.

뭔가 잘된 사람에게는 은근히 기가 죽습니다.

남보다 안 된 사람 앞에서는 왠지 기가 사는 느낌이 있습니다.

때문에 서로가 불편합니다.

 

내가 잘 나서 잘된 것이고, 내가 못나서 안 된 것이기 때문에

눈에 드러나지 않는 서열이 결정이 됩니다.

 

인간의 가장 악함이 어디서 드러나느냐면 인간의 인간됨을 서열로 정하는 것에 있습니다.

서열화가 되어 버리니까 인간의 기본적인 인격은 어디론지 내팽개쳐져 버렸습니다.

남들과 다른 나를 차별화하고 차별화에 따르는 갖가지 불합리를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나는 그만큼 가질 만한 자격과 조건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받을만한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롬 11:5-6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 하느니라”


은혜는 행위로 된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지름길이나 수단이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성이나 실력이나 노력을 예쁘게 보시는 분이시면

우리가 은혜를 누리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몇 %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의 서열을 매긴다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을까요?

 

그러나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한심하고 부질없는 것임을 알아야만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은혜 되게 하시는 겁니다.

다른 말로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 맘대로 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결정하시는 겁니다.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오늘 고넬료에게 환상 중에 임하시고,

또 베드로에게 환상 중에 임하시는 일들이 다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겁니다.

다만 고넬료와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움직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할 뿐입니다.

 

자신들의 “환상 중에” 임하신 하나님의 지시를 그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특히 베드로의 거절에 대해서 세 번 씩이나 말씀하셔서

결국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고집을 볼 수 있습니다.


15절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셨다는 게 중요 포인트입니다.

고넬료의 구제하고 기도하고 경외하고 살았던 행한 일보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이 더 셉니다.

 

하나님의 작정하심이 우리의 행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이 작정하심을 인정하고 살면 우리 안에 다툼이나 시기나 미움이 없습니다.

내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나는 되는데 상대방이나 이웃은 안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때문에 기적의 은혜가 내게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믿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기준으로는 하기 싫었지만 하나님의 권고 앞에 순종한 것입니다.

 

고넬료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비록 이방인이긴 하지만 그는 군대라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베드로 같은 사람은 상대하지도 않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하나님의 사자가 환상 중에 그에게 가라고 한 곳은 피장 시몬의 집입니다.

피장은 가죽을 가지고 옷도 만들고 신발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시 피장은 거의 천민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에 직업에 대한 계급은 없었지만 가장 아래 계층의 사람이 피장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이방인이긴 하지만 당시의 사회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피장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를 청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앞에 전혀 거침이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이유도 많고 탈도 많고 핑계도 많습니까?

하나님은 분명하게 역사하시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순종을 하질 않습니다.

따져 묻기나 하지 순종할 핑계나 이유를 찾으려고 하질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가만 보세요.

사실 성령의 세례를 고넬료의 집에 내려주시려면 하나님 혼자서는 못하시겠습니까?

충분히 혼자서 하실 수 있으십니다.

굳이 번거롭게 고넬료를 깨우고 베드로를 설득하고 이렇게 저렇게 왕래하시면서

환상 중에 말씀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혼자 고넬료의 집에 가셔서, 아니 가시지 않더라도

충분히 고넬료에게 성령 세례를 주실 수 있습니다.

사실 또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굳이 고넬료가 아니더라도 됩니다.

 

그런데 왜 그리 번거롭게 “환상 중에” 임하시고

고넬료와 베드로를 번갈아 찾아가시면서 말씀하고 설득하고 그러실까요?


구원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굳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안 오셔도 되는 겁니다.

안 오셨다고 누가 뭐라 할 수 도 없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맘대로 하시는 것인데 누가 감히 뭐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감히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굳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믿지도 않는 세상을 향해서

 “나를 믿으라!” 고 하신 이유가 뭡니까?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야만

우리의 신앙이 성숙한 단계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베드로와 고넬료를 번갈아 찾아가시면서 말씀하시고 설득하시는 건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모든 과정에 우리와 함께 하고 싶어 하시는 겁니다.

우리를 수단으로 삼으신 게 아니고 함께 하는 협력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의 전 존재를 인정하시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역자로서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절대 강제로 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끝없이

설득하시고 타이르시고 들을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세뇌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구원도 그냥 하나님 혼자서 다 이룰 수 있지만

우리 인간들과 함께 하시고 싶으셔서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혼자 하시면 아무 재미가 없으신 겁니다.

 

그렇게 우리를 인정해주고 싶으셔서 오늘도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비록 지금은 환상 중에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이미 주신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 본문의 베드로와 고넬료에게 환상 중에 말씀하신 것처럼

여전히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겁니다.

그 은혜를 당당하게 누리실 수 있어야 합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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