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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베드로의 첫 설교 (행 2:14-36 / 08년 7월30일(수요기도회)

예수님의 12 제자 중에 그 수장격인 베드로가 공식적인 첫 설교를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실 베드로를 떠올리면 그가 한국 사람들의 성격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급하고,

우직하고,

겁도 많은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입니다.

또 그의 학문성은 사도 바울에 비해서는 상당히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오늘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그가 이제 사도로서 첫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가 그 내용에 있어서 보통 설교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양적인 면에서는 그의 이 설교를 듣고 무려 3천명의 제자가 더해진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설교 내용상의 질적인 면입니다.

베드로는 완벽하게 한 편의 설교를 하는 겁니다.

물론 그의 설교 능력은 온전히 성령의 충만한 결과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 충만한 것만 가지고는 모든 것을 가늠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가 바로 베드로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는 보통으로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핵심내용을 충분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는 그가 겪고 갖고 배운 모든 영적 실력들이

함축되어 있는 위대한 영성의 결과물입니다.

그는 이 설교에서 결코 급하지 않습니다.

무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하면서도 결코 무 경우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오늘 이 설교는 정확하게 성경의 내용을 근거로 해서 말씀해주고 있는 복음 그 자체입니다.


그가 오늘 전하는 설교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행 2:3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도대체 왜 너희들 기독교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떠드느냐? 는 반박을 부르고 있는 내용입니다.

세상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더러 적당한 선에서의 타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니 네는 다 좋은 데 그것만 조금 바꾸면 더 좋겠다.’ 는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건데 우리는 전혀 우리만 옳다고 하지 않는데

왜 너희만 굳이 너희만 옳다고 주장하느냐?’ 는 겁니다.

 

그것만 좀 양보하면 우리 얼마든지 서로 손에 손잡고

함께 공존하면서 살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정말 귀가 솔깃해지는 내용입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좀 찔리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뭘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렇게까지 고집하고 살 필요가 있겠느냐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심지어는 목사님들까지도- 이 주장에 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 굳이 예수만 그리스도라고 주장할 것 뭐 있어? 산 정상에 가는 길이 어디 한 곳뿐이야?’ 라면서

불교도 좋고, 천주교도 좋고 기독교도 좋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느 종교든지 다 나 잘되라고 하지 나 잘못되라고 하는 것 있겠어?’ 라고 말하면서

뭐든지 다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잘못돼도 정말 한참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 잘되라고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입니다.

 

물론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는 모두 다 나 잘 되라고 합니다.

때문에 종교생활의 근거가 언제든지 나한테만 있습니다.

나만 좋으면 다 좋은 겁니다.

때려 죽어도 자기가 싫으면 싫은 겁니다.

자기만 좋으면 다 좋은 겁니다.

일정한 기준과 한계를 언제든지 자기 입장 속에 다 정리해놨습니다.

 

심지어는 기독교인들 중에도 이런 분이 있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 안 할 일을 미리 다 정해놓고 교회를 다닙니다.

예배는 주일 오전 예배만 드린다,

십일조는 하지 않는다,

부흥회는 안 다닌다,

주일 봉사는 안 한다,

남녀선교회 모임에 가질 않는다 는 등의 제한적인 요소를 많이 두고 있습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자기 마음에 안 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는 프리선언을 하셨는데

우리는 내가 기분이 좋아야만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똥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사도 베드로는 지금 제발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미리 약속하셨다가 이제 주신 것은

바로 예수께서 유일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우리의 감정 여부에 달려있는 흔들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바꿔 설명할 수 있다거나

그냥 슬그머니 집어넣을 수 있는 우리들의 영역이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안 믿는 누가 말한다고 해서

본질이 달라질 수 있는 가변의 영역이 아닌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말씀하신 진리의 영역입니다.

내 감정으로,

내 경험으로,

내 생각으로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내 감정과 관계없이 아닌 건 아닌 겁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님 외에는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더 이상이 없는 것은 없는 겁니다.

적당하게 희석시킬 수 있는 이름이 결코 아닙니다.

부처도 좋고 마호메트도 좋고 문선명까지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건 모두 세상 사람들이 자기 편의와 목적을 따라서 말했을 뿐인 겁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는 영원한 구원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사도 베드로가 강조해서 말씀하는 것은 바로 부활입니다.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는 가장 절대적인 진리는 바로 부활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은

그 어떤 종교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절대적인 진리의 가치입니다.

부활 때문에 십자가의 예수님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보장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가장 큰 위안이요, 소망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지금의 가치가 너무 좋아서

다음 세상에서 누린다는 부활이 필요 없다고도 하지만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오늘 우리들의 성도 된 삶의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오늘 참고 견디면서 살아갈 이유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고전15:16-19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사도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오늘 우리들의 신앙적인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씀 드리면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오늘 이 땅에 사는 삶의 문제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한 번 보세요.

도대체 왜 삶이 여유가 없습니까?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정도면 충분히 누릴 만큼 누리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왜 누리지 못합니까?

너무 여유가 없습니다.

넉넉하게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오늘 내 가진 것의 있고 없고는 결코 문제 되질 않습니다.

조금씩 베풀고 살아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다들 너무 악착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이 오히려 더 그런 것 같습니다.

한 푼이라도 더 모아서 이 땅에서 남들보다 더 잘 살려고 하는

굳은 각오들을 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 부활해서는 어떻게 하려는지 궁금합니다.

그 때 가서 하면 됩니까?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언제 행한 것의 행한 대로 입니까?

지금 이 땅에서의 행한 대로입니다.

우리에게 부활은 미래의 일이지만

그 평가는 오늘 지금의 삶 속에서 이미 다 받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의 삶이 우리의 미래에 있어서 중요한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보장받고 있다면 오늘을 너무 빡빡하게 살지 말아야만 합니다.

좀 손해보고, 양보하고, 포기하고, 져 주고 살아도 됩니다.

풀 것 풀고, 누릴 것 누리고, 나눌 것 나누고, 베풀 것 베풀고 살아도 됩니다.

오늘의 현실을 살지만 미래의 영원을 누릴 자들에게는

오늘의 현실적인 문제는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의 오늘 이 첫 설교는 이 두 가지 핵심을 주된 내용으로 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합니다.


결국 이 두 가지 진리의 결론은 오늘의 삶을 세상의 가치 속에 타협하지 말고

굳세게 지켜 나가야만 할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세상이 원하는 방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하고 선포하는 방향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부활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이 성령 충만한 외침이 오늘의 우리에게 다시금 전달되어야만 할

충분한 이유가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슬그머니 동화되어가는 우리의 영적인 수준을 다시금 고쳐 세울 귀한 은혜가

베드로의 이 첫 설교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 은혜를 받고 신앙 안에서 회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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