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개벽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이 화악 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기존의 가치관과 잘서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고넬료가 성령 부어주심을 받은 일이 바로 그런 일입니다.
그동안의 유대교를 통해서 보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교의 기준으로 볼 때 고넬료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세워질 수 있는 가능성은 무지 낮습니다.
물론 그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도 하고 구제도 하고 하나님을 경외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유대인의 무리에 들어갈 수 없는
치명적인 민족적인 약점을 갖고 있는 것이 가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방인입니다.
그것도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군대의 고위관리입니다.
유대사회에서는 그런 그를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와 어울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차별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차별과 구분을 낳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도 이런 차별과 구분이 분명하게 존재를 합니다.
목사들 사이에서도 많습니다.
신학교를 따지고, 출신 고향을 따집니다.
제가 천국을 사모해서 가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천국은 전혀 구분이 없고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많은 구분이 있고, 가림이 있는데 천국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이 세상에서는 중요하게 여기는 있고 없고의 문제가 전혀 해당이 없습니다.
언젠가 성령의 능력을 행하신다는 유명하신 권사님이 살아서 천국을 다녀왔다고 했었습니다.
살아서 천국을 다녀왔다는 것도 큰 이슈였는데
그 분이 하신 천국을 다녀오신 소감은 더 큰 이슈였습니다.
당신이 천국에 가보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교회를 섬기시는 목사님의 천국 집은
개집 정도밖에 안되더라는 겁니다.
다른 목사님들은 그래도 아파트 정도 되는데..
저도 처음엔 그런 말을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그것처럼 엉터리가 없습니다.
왜죠?
천국의 가장 큰 특징이 뭔 줄 아세요?
한마디로 우리들 사이에 요즘 우리들 식으로 차별과 구분이 없다는 겁니다.
전혀 구분과 차별이 없습니다.
강남과 강북이 차이가 없습니다.
서울과 제주도가 차별이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어떤 학교를 나오고,
어떤 교회를 섬기고,
어떤 직분을 가지고,
어떤 목회를 하고,
어떤 형편에서 살다왔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로 사람을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천국에 그런 차별과 구분이 있다면 저는 천국 안 가렵니다.
그런 구분과 차별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볼 때 누누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약 2: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외모,
즉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았던 흔적이나 허울을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간판이나 출신, 민족, 살아온 길, 학력
이런 것들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십니다.
문제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야만 하는 우리들이
여전히 왜곡된 이런 인간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세상을 살 때는 세속적인 그런 구분이나 차별이 내게 혜택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는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겁니다.
오늘 베드로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베드로는 사실 고넬료에게 가라고 환상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듭된 말씀 앞에 그냥 다 순종을 했습니다.
자기의 의견을 하나님께 이야기는 했지만 거절되니까 온전히 순종을 한 것입니다.
때문에 고넬료에게 성령 부어주심이 가능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베드로는 순종을 했기 때문에
성령 부어주심의 도구로, 수단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부어지는 성령 세례의 산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하는 말을 보세요.
행 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하나님 앞에 구별되고 구분된 유대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서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변화하게 된 것입니다.
고넬료의 성령 부어주심으로 단순히 이방인들에게 성령 부어주심이
허락되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껏 유대인이라는 특별하게 선택된 민족으로 살아온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그 민족적인 허울을 벗고 하나님 말씀 앞에 진실 되게 순종하게 한 것입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차별과 구분 없는 사역을
이제는 완전하게 이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한 메시아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온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진정한 구세주로 오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온 세상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차별과 구분과 제한의 삶을 위한 메시아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 받아들이고, 용서하시고 품어주시고, 안아주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제한되게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자기 맘에 드는 사람들만 받아들이고 있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기랑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내 울타리 안에 들어오는 사람만 편들어줍니다.
말은 어느 누구나 다 오라고 하면서 어느 누구나 다 이해를 하지 않습니다.
아무나 다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이해해줘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끼리끼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한마디로 골치 아픈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대로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의 삶은 언제나 행복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고민과 갈등과 아픔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감수하고 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신앙생활이 편해지고 있습니다.
골치 아픈 건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아무것도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워낙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겁니다.
쉽게 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쉽게 하려고 하고 편하게 하려고 하니까 골치 아픈 건 못하는 겁니다.
어려운 건 안 하는 겁니다.
그러나 쉽지 않고 어려우니까 기도를 하는 겁니다.
베드로의 경우에도 보세요.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또 그 기도의 응답을 따라서 순종을 한 겁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막14: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적당히 하는 사역이 없는 것입니다.
쉽게 쉽게 하는 신앙생활이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드는 달콤한 유혹일 뿐입니다.
죽도록 해야만 합니다.
죽을 각오를 가지고 해야만 하는 겁니다.
편하게 살자고 하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몸에 물을 안 묻히고 수영하는 법이 없습니다.
빙판에 넘어지지 않고 스케이트를 하는 법도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고통의 과정들이 반드시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연습을 해야만 하고 시간을 들여야만 합니다.
각오만 하고 마는 게 아니라 실제로 해야만 합니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은 늘 각오만 하고 맙니다.
그러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각오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묵묵히 감당하는 겁니다.
늘 하는 생활일 뿐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늘 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한결같은 자세로 감당하는 겁니다.
고넬료도 그러다가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살면서도 한결같은 자세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하고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다가
하나님의 눈에 띈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큰 원칙은 한결같음입니다.
요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가 중요한 겁니다.
우리를 세우신 것은 과실을 맺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것도 항상 맺게 하려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성령 안에 살 수 있습니다.
늘 그 자리를 지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변함없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대책 없이 부어주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오늘의 환경과 처지를 이기면서
묵묵히 천국 백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보여주는 신실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실력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쉽지 않았는데 우리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때문에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로서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 나무목교회도 할 수 있습니다.
성령 부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충분히 과실을 맺도록 힘을 주실 것입니다.
다만 기도하는 자리의 몫은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건 누가 대신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해야만 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은 해야만 합니다.
기도는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기도하면 성령 부어주심을 통해서 우리 사역에 힘을 주실 것입니다.
삶이 힘든 건 누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함을 통해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삶이 있고,
어려움에 허덕이면서 늘 뒤따라 다니는 삶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이겨내는 겁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이깁니다.
오늘 고넬료의 성령체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영적인 의미는 기도하는 자는 이긴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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