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같은 문제와 똑같은 일을 두고 정말 여러 가지의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야기 하는 사람이 100이면 100 모두가 다 다른 해석을 합니다.
때문에 어떤 것이 실체요, 진실인지가 헷갈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이야기 하든지 간에 자세히 보면 그 중심에는
반드시 해석하는 자기 자신의 의도가 숨어있음을 봅니다.
정확하게 해석을 하고 제대로 판단한다고 말을 하지만
자기의 의도와 생각대로만 해석을 하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특히 그 정확한 의도를 제대도 모르는 경우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집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성경의 해석입니다.
성경은 우리 생활의 전 영역을 커버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때문에 자칫 잘못 해석을 하면 성경의 모든 내용이
우리를 위한 도깨비 방망이가 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 그렇게 이해를 하고 해석을 한다고 해서 크게 물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무의식 속에
신앙생활도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지극히 원초적인 생각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예상 외로 그런 의도의 설교들이 많은 성도들에게 먹혀(?)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요즘 설교계의 현상입니다.
오늘 서론이 좀 길죠?
바로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엉터리 같은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함정과도 같은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지금도 그런 해석을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는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순식간에 삼천 명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때문에 성령 충만해야만 합니다.
성령 충만해야만 설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한 번 설교를 해도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의 품 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일견 다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해서 설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틀린 말입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성령 충만했던 설교를 했기 때문에 삼찬 명이 돌아왔다면
오늘 대다수의 목사님들을 절대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겁니다.
주일예배에 거의 대다수의 성도들이 졸고만 있습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성령 충만해야만 합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설교에 대해서 반응은 각각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 두 달에 한 번 꼴로 화장실의 변을 펐습니다.
그런데 재래식 변기통 안에 쌓인 똥을 보면 그 색깔이 정말 다 다릅니다.
똑같은 1식 3찬의 군대밥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먹는 사병들의 건강상태에 따라서 변색깔이 다 다른 겁니다.
때문에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건전한, 긍정적인 자세를 요구합니다.
제대로 마음을 먹고 설교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또 설교를 듣기 전에도 꽤 많은 양의 기도를 하라고 요구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성공여부는
전적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잘 들어야만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어디를 다 살펴봐도-본문의 앞뒤를 다-
듣는 사람들이 합당한 태도를 취했다는 그 어떤 흔적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또 성경적으로 살펴보더라도 듣는 사람의 태도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달되고 못 되고가 결정된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물론 한 가지는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듣고 반응하면 구원입니다.
반대로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전혀 엉뚱한 반응이 나오면 멸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부차적인 것일 뿐 일차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전하는 자, 듣는 자 모두가 다 유념해야만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설교자는 듣는 자를 비판합니다.
듣는 자는 설교자를 탓하고 있습니다.
서로 상대방 때문에 은혜를 못받는 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가 사라졌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사라진 말씀의 권위는 찾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자꾸만 인간적인 권위로만 포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설교자의 복장은 설교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그 어떤 문제도 되질 않습니다.
가운을 입고 안 입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가 설교하면서 박사가운을 입는 것으로 권위가 더 선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교회들을 보세요.
갈수록 강대상이 화려해지고 있습니다.
목사의 가운이 근엄하다 못해서 웃기게 되고 있습니다.
마이크는 또 얼마나 성능이 좋아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목사의 목소리를 완전히 설교자의 톤으로 재생산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강대상과 가운과 시설이 화려해지는 것에 반해서
정말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은 뭡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권위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세우신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 말씀의 자리에 보내주셔서
나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설교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듣는 회중들의 태도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세우셨고,
또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심이 외면되면
남는 것은 결국 죄악에 가득 찬 인간의 모임만 남을 뿐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 우리 주변을 보세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저만큼 던져 버린 지 이미 오래됐습니다.
그냥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몰려다니면서 자기들끼리 즐기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걔 중에는 ‘이게 아닌데,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고 있는 일행들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는 회의와 의심을 낳고 있습니다.
때문에 자기 신앙정체성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고 불안해합니다.
끊임없이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잘 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수록 하나님은 눈에 들어오질 않고
오히려 사람들의 관심이나 시선이나 이야기만 들어옵니다.
그리고 자기편을 들어주는 자기 사람들이 제일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끼리 몰려다니면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반드시 공동의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한 번 해 보실래요?
다른 사람과 빨리 친해지려면 공동의 적을 만들어서 같이 욕해주고 씹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금방 친해집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파괴하고 망치게 되는 겁니다.
겉모습은 살아있는지 모르나 내면을 다 죽어버린 존재가 됩니다.
목사가 왜 성도들의 자기 설교를 듣고 난 후의 반응을 궁금해 합니까?
심지어는 어떤 설교를 듣기를 원하느냐고 설문조사까지 한답니까?
그것이 다 자기 설교에 대한 신앙적인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서 말씀하신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설교를 듣고 난 성도들의 반응이 궁금한 겁니다.
혹시라도 반대하거나 거부하거나 싫어하지 않을까 싶어서 전전긍긍합니다.
부목사들에게 조사해오라고 시키는 목사도 있답니다.
그런 인간들은 그냥 목회 때려 치고 서비스업이나 해야 합니다.
손님들의 반응을 살피는 일을 하면 됩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되는 것이지 누구 눈치를 봅니까?
계 3:1-3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가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살아있는 듯하나 죽은 자들에게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저 역시 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제게 말씀하심을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전하면서도 자기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니까
말씀을 듣고 난 후의 성도들의 반응이 궁금한 겁니다.
‘혹시라도 시험 들지 않았을까? 이 말씀을 듣고 헌금이 더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는 겁니다.
심지어는 특정한 개인을 두고도 설교하고 그의 반응을 관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전하는 목사도 포함해서-
당연히 자기 자신을 먼저 살펴야만 합니다.
말씀대로 얼마나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지 깨닫고 서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부터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항상 예외가 되고 열외가 되니까 말씀을 전하고 들어도 전혀 감동이 없는 겁니다.
벧전 5:1-3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목회를 해도,
말씀을 전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하라는 겁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가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한 사도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시작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자들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변화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를 통해서 저를 비롯해서 나무목교회와 성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아무 문제없고 걱정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심을 인정하고 살면 됩니다.
교회의 성장과 성숙도 다 때가 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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