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혹시 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살기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애쓰면서 살지 말고 전국민이 매일 10원씩을 내고 모아서
그 돈으로 하루에 한사람씩이라도 잘 살게 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때는 제 생각이 제 스스로 생각을 해도 꽤 괜찮은 생각 같았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전혀 실효성이 없는 허황된 생각입니다.
그러기에는 전 국민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돈을 받아가는 순서를 정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그 어떤 사회적인 정책이나 제도도 완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한자어로 오늘 본문을 이렇게들 표현합니다.
유무상통이라고...
물질적인 것이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이 서로 똑같이 나누고 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완벽하고 가장 이상적인 제도요, 삶의 방법입니다.
더더군다나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가장 완벽한 성경적인 제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삶의 내용은 과연 우리들의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을까요?
대답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죽은 다음에 천국이나 가서 실현이 되면 모를까
지금은 전혀 실현가능하지 않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불과합니다.
성경의 이 내용 자체가 불완전해서가 아닙니다.
이런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내용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우리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아니 준비될 수 가 없습니다.
왜죠?
아까 말씀드린 근본적인 문제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면 우리가 준비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모두는 다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우리 스스로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바로 우리는 죄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이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달콤한 결과만 기대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제도와 정책이 다 물거품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을 근거로 해서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만들었지만
공산주의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죄인 됨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초대교회의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일까요?
어떤 생각에서 교회가 이런 모습으로 출발하도록 하셨을까요?
이것은 초대교회가 기존의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성격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기존의 유대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기는 했지만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을 짓누르고 숨통 막히게 하는
다분히 서슬 퍼런 점령군의 모습으로만 지배해왔던 것입니다.
때문에 유대교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지배계급 구조의 모습으로
사회를 다스려가는 일종의 계급사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계급은 한 번 획득하면 자자손손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만 작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막힌 구조의 계급 사회가 아닙니다.
그 누구도 자기 영혼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내거나
낮게 비하할 수 없는 수평적인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붙들고 하나님 한 분 앞에만 서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전혀 반목이 없고 지위고하가 없는 겁니다.
목사라서 더 높고, 세례 안 받아서 더 낮고 하는 것이 없는 겁니다.
때문에 오늘날 현대의 교회들이 지향해서 가고 있는 방향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삶의 수준과 가치관이 같은 사람들끼리만
같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내용인 것입니다.
사회적인 조건이나 누리고 있는 환경적인 요인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전제조건이 된다면 그건 신앙생활이 아닌 것입니다.
이미 거기에 대한 야고보 사도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약 2:1-9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닌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어떻습니까?
오늘날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범죄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없거나 있거나 똑같은 한 영혼의 가치인데 오늘 왜 우리 주변에서는
교회에서조차 있고 없고를 따지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일까요?
모두가 다 죄인들일 뿐인데 그 죄조차도 잠시 머물 이 세상의 가치로 인해서
가려지고 증폭되는 것은 아닐까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것은 아닌 것인데
왜 교회 안에서조차 대접받고 있는 일부 계층이 있고,
소외되는 일부 계층이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교회가 이 세상의 빛 되고 소금 되지 못한 증거입니다.
교회가 이 세상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어서 세상 위에 우뚝 서고
밝은 빛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어야만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세상의 가치가 아닙니다.
돈, 명예, 가문, 학벌, 권세, 능력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오로지 딱 한 가지만 있으면 됩니다.
마18: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 들 중에 있느니라”
우리들 중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 있으면 됩니다.
죄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필요한 겁니다.
다른 건 아무 소용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왜 모였습니까?
우리들 각 자가 다 죄인이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필요하기 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누가누가 더 잘하나?
누가누가 더 잘 사나?는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지극히 단순하고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필요를 제대로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른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자기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필요 없음을 알고
기꺼이 교회 공동체 안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다는 그 어떤 것도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뒷전이고 오로지 내 의와 자랑만이 판을 치고 있으니까
있는 자, 없는 자가 가려지고 구별되고 차별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자꾸만 세상을 닮아갑니다.
교회가 대기업이 되어 버렸습니다.
계급화가 되어 갑니다.
아주 다양한 욕구들의 충족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없다고 해서 다 겸손한 거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큰소리를 못 치니까
교회 안에서 경력과 직분으로 큰소리를 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입으로는 섬기네 하면서 교회 안에서의 실세들만 좇는 기러기 떼들도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실세라는 말이 없어야만 정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감히 실세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서 실세라는 말들이 이미 오래 전에 나왔습니다.
상당회장이네,
넘버 원이네, 투네 라는 말이 이미 돌고 있습니다.
고인 물은 썩는 겁니다.
더욱이 우리들은 몽땅 다 죄인들입니다.
우리들의 경력과 자랑은 정말 너무 쉽게 부패하는 겁니다.
그걸 자기 자신은 잘 모른다는 겁니다.
‘내 맘 갖지 않다.’ 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저런 순수한 의도를 갖고 한 일인데
남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지 않아서 섭섭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 말 중에도 정말 핵심은 쏙 빠졌습니다.
자기는 남들과는 다르다고 하는 무언의 구분, 구별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다 똑같은 죄인들일 뿐입니다.
설교를 하는 저마저도 다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제 안에 있는 죄의 씨앗을 두려워하는 겁니다.
남들과 전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설교를 저도 하는 겁니다.
나중에 딴 짓, 딴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지금부터 다짐을 하고 공개적인 약속을 하는 겁니다.
저는 잘 났기 때문에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가 아니라
오히려 지금부터 내 단속을 하는 겁니다.
벧전 5:8-11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자랑할 것이 없는 부끄러운 존재들입니다.
우리를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믿는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에 그 어떤 구분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외에는 전혀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서로 돕고 살아야죠.
나누고 살아야 합니다.
애 써주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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