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절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집을 떠나면 고생입니다.
아무리 작은 집이고, 살기에 불편한 집이라고 하더라도 내 집이 주는 평안함이 제일입니다.
특히 남의 나라에 가서 사는 것은 정말 더 어려운 일입니다.
솔직히 살 수 는 있습니다.
조금 시간만 가면 말도 배우고 음식도 배워서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말이 통하고, 음식이 먹을 만해지더라도
남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남의 나라에서 사는 사람을 가리켜 이방인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도 이방인이라고 하는 단어가 참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방인이라고 하는 이 단어가 성경에서는 가장 낯설게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국어사전에는
이방인이라고 하는 단어의 뜻을 “다른 나라 사람. 이국인. 외국인.”이라고
정의하는가 하면,
또 동시에 “유대 사람이 선민(選民) 의식에서 그들 이외의 여러 민족을 얕잡아 이르는 말.”
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표현을 하면 성경에서 이방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유대인들로부터 짝퉁 이스라엘로 취급을 받는다는 겁니다.
아무리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아도
원래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과 비교하자면 솔직히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유교의 영향권 아래 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근히 남에게 기가 죽거나 자존심을 상해하는 경향이 상당합니다.
왜 그런지는 말씀 드렸습니다.
원래 우리를 오랑캐 취급을 한 중국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오랑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다 보니까 묘한 자존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볼 때도 쉽게 남에게 기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나타나는 그런 모습이 바로 자동차 운전입니다.
왜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운전을 하면 너무 위험하다는 소리들을 많이 할까요?
한국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남이 내 차 앞으로 끼어드는 것을 절대 못 봅니다.
옆 차가 좀 속력을 내면 은근히 지고 싶지 않습니다.
자기 혼자 천천히 가다가도 옆에서 누가 속력을 내면 덩달아 같이 냅니다.
얘들을 태우고 가면 얘들이 다 뭐라고 합니까?
누가 안 가르쳐줬는데도 옆 차보다 더 빨리 달리라고 난리가 아닙니다.
제가 교육전도사 때 교회 선교원 승합버스를 몇 달 몰았는데
그 꼬마 애들도 옆차보다 늦게 가면 난리가 납니다.
우리 민족은 아주 선천적으로 남에게 지고 못 사는 민족입니다.
아니 지고 못산다기보다는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이 맞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열등감입니다.
내가 남보다 못하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에
내 속에서부터 나를 보호하고자 갖는 마음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하게 선택받은 자녀라고 하는 생각이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가 좀 죽고, 자존심이 좀 상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삶을 무척 동경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교육이나 경제를 말할 때 유대인들을 이야기하는 학자들이 은근히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느냐면 이미 받은 구원이 너무 쉽게 흔들립니다.
내 감정과 내 형편에 따라서 자주 왔다갔다 해버립니다.
세상을 살면서 갖게 되는 갖가지의 상황 속으로 우리가 허락받은 구원을 자꾸만 집어 던집니다.
그래서 좋은 일이 있으면 구원받은 것 같고,
반대로 나쁜 일이 있으면 구원이 좀 희미해지는 경향이 참 많습니다.
우리의 원래 처지가 이방인이라고 하는 생각을 무의식 가운데 자꾸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방인이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쪽으로 달려가질 않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우리가 처한 이방인이라고 하는 형편을 스스로 해결해보겠다고 하는 겁니다.
때문에 보통 이상은 되는 더한 열심을 가집니다.
우리의 열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눈에 들어 보이겠다고 하는 겁니다.
이런 표현이 조금 그렇기는 하지만
마치 엄청난 재력과 실력을 가진 부잣집에 시집온 며느리처럼
무엇인가라도 더 열심히 해서 시댁의 눈에 들고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문에 세계 기독교 역사에서 우리나라처럼 은사운동이 강하게 일어난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거의 폭발적이라고 할 만큼 엄청난 힘으로 역사했습니다.
물론 일정부분 하나님의 은혜도 충분히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매번 그렇게 같은 역사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그런 내용이 통하는 시대 이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수준도 좀 더 높아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교회 생활이 그냥 어떤 운동이나 캠페인처럼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생활은 절대로 운동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새마을운동처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그냥 호흡입니다.
숨 쉬는 겁니다.
숨 쉬는 것을 운동으로 하는 사람은 이미 병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운동으로 하는 겁니다.
그것도 엄청난 양의 운동을 해버립니다.
하루 대 여섯 시간씩 운동을 해서 금방 식스 팩을 만들고, 복근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그냥 삶입니다.
생활입니다.
일상입니다.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고,
강조하지 않는
조용히 그 자리를 항상 흐르고 있는 강물 같은 일상이
곧 우리의 신앙생활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세월이 가며,
연륜이 쌓이고,
수많은 일상들이 섞여서
역사가 되고,
문화가 되고,
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그렇게 사는 겁니다.
때문에 사는 동안에 그 어떤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되는 겁니다.
골 1:21-23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완전한 자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가 이방인이었다고 하는 것은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는 그 어떤 차별이나 구분도 없습니다.
그러니 너무 그렇게 긴장을 안 하셔도 됩니다.
내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내게 불벼락이라도 내리실 것 같은 긴장감이나 두려움은
다 예수 십자가 아래 내려놓으면 됩니다.
굳이 먼지를 피면서 교회 안에서, 예배당 안에서
소리 나는 신앙적인 열심을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일상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에 충실 하면 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나타나는 현상인데 아예 자포자기하고 사는 겁니다.
일종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다 기웃거립니다.
공부가 어떻게 해야만 공부가 됩니까?
시험 전에 밤새워서 바짝 하면 공부가 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시험을 치르기 위한 대책은 될지 몰라도 공부는 아닙니다.
공부는 그냥 늘 책을 가까이 하는 겁니다.
목사들도 보면 그저 여기저기 세미나만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화해보면 늘 세미나에 와 있답니다.
특별히 공부 안 하는 목사들이 그렇습니다.
책장에 있는 책은 신학교 다닐 때 사놓은 거 겨우 몇 권하고, 월간지나 설교 집으로 가득합니다.
스스로 다양하게 공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지식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스스로 공부할 생각은 없고,
그냥 눈동냥, 귀동냥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주워들은 몇 마디 말 가지고 성도들을 먹인다고 하면
과연 그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씀이 됩니까?
설교하려고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분명한 자기 방향이 있고,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누가 뭐라 하더라도 당당하게 가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의 것을 내 것을 삼는 공부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때문에 기도하고, 말씀보고, 공부하는 겁니다.
내 부족한 것을 늘 깨닫고 느끼고 살아야만 합니다.
어떨 때는 부르짖기도 해야만 합니다.
또 부지런히 말씀도 봐야 합니다.
죽어라고 책도 읽고 공부도 해야만 합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믿음이 쑥쑥 자라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따라서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딛 2:11-15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또 선한 일을 열심히 하도록,
즉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셨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해서 넉넉하게 감당해가는 믿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누구에게라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진실한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방인이라고 해서 어디서 주어온 뜬금없는 자녀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세움을 받은 겁니다.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이루어져 가는 겁니다.
비록 좀 더디더라도 그렇게 갈 것입니다.
6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앞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남의 나라 가서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남의 나라도 여행을 가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 여행을 온 것입니다.
여행은 함께 가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와 함께 가는 분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좌우 앞뒤를 한 번 보세요.
우리에게 허락된 복음이 얼마나 크게 역사할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게 역사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오늘도 우리 삶의 자리를 은혜와 사랑으로 든든하게 지켜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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