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사기 13:17-18(개역개정)
17 마노아가 또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하니 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예수님 믿으면 인생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놀라우신 주님이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며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정치가인 글래드스턴은 “내 일생을 통하여 95명의 위대한 사람을 보고 있다. 이 중 87명은 성경을 읽고 성경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위대한 인생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블레셋 사람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 있었던 사건입니다. 단 지파에 마노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임신을 못하여 자식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부인에게 나타나서 그녀가 아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아기가 유명한 사사 삼손입니다. 그녀는 마노아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마노아는 그 말을 듣고 하나님께 하나님의 사자를 다시 보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노아의 기도를 들으시고 마노아의 아내가 밭에서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마노아의 아내는 급히 가서 남편을 불러왔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와 대화를 하다가 그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의 이름은 ‘기묘자’라고 답을 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 나오는 기묘자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의 사자가 누구일까요? 아시겠습니까? 기묘자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의 사자는 성자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사자로 마노아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묘자라는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 9:6을 봅시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 9:6은 예수님께서 초림하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주셨는데 그분은 왕권을 가졌고 이름은 기묘자이며, 모사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며, 평강의 왕이십니다. 기묘자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의 사자는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예수님의 이름 중에 기묘자에 대해서 나누려고 합니다. 기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펠레’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경이로운 일, 기이한 일, 기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한문으로는 기이할 기(奇) 자와 묘할 묘(妙) 자를 썼는데 문자적으로 풀면 기이하고 묘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니 ‘Wonderful(놀라운)’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놀라운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오늘 설교는 기묘자이신 예수님, 기이하고 묘한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은 어떤 면에서 놀라운 분이신지를 나누려고 합니다.
1. 출생이 놀랍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미 약 300번 정도 예언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예언대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출생이 놀라운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잠을 자서 만들어집니다. 남자와 여자가 잠을 자지 않고 잉태되어 세상에 출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출생이 놀라운 것입니다. 성경 창 3:15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면서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은 남자의 씨가 없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 7:14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예언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처녀는 히브리어로 ‘알마’라는 말인데 남자와 성관계를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여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사 7:14이 말이 안 되잖아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잉태합니까?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말이 됩니다. 마 1:18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라고 말씀합니다. 마리아가 요셉과 잠을 자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남자 없이 여자의 몸에 잉태 되셔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출생이 놀라운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이 예언 되었는데 실제 다윗의 혈통으로 출생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실 것이 에언 되어 있는데 그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출생되셨습니다. 그분의 출생은 놀라운 것입니다.
2. 우리를 도우심이 놀랍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크게 3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모든 약한 자와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이 중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하신 사역은 치유사역이었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보혜사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요 14:16에 보면 주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해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보혜사이셨는데 주님이 가시니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혜사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보혜사란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제자들 곁에서 제자들을 도우셨던 보혜사였습니다. 보혜사이신 주님이 승천하셔서 하늘로 가셨지만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주님의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할 수도 있고 우리의 가족들에게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막 10장에 보면 여리고에 살던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나옵니다. 그가 주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제자들이 시끄럽다고 저지하려고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주님을 불렀습니다. 가던 길을 멈춰선 주님이 바디매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디매오가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바디매오는 맹인이었으니 세상을 사는 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했겠습니까? 바디매오는 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밥을 먹는 일, 씻는 일, 구걸하기 위하여 성문 앞에 나아가는 일 등 거의 모든 부분에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그날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가 주님에게서 받은 도움은 전에 받았던 그 어떤 도움보다 중요하고 큰 도움이었습니다. 맹인이 눈을 뜨게 된 것보다 더 큰 도움이 있겠습니까. 막 9장에 보면 한 아버지가 간질 하는 아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이아들은 귀신이 역사하기 시작하면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집니다. 아버지는 이 아이의 치료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했을 것입니다. 많은 돈을 썼을 것이고, 많은 수고를 아까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많은 의사들의 도움도 받았었고, 많은 약사들의 도움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제자들을 만났고 제자들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이에게 역사하는 귀신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아이에게서 떠나가고 아이가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수님에게 받은 도움이 그때까지 받은 모든 도움보다 더 크고 중요한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를 도우셨고, 귀신들린 아들 문제로 고통을 당하던 아버지를 도우셨던 예수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돕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 7:7,8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면 기도 응답을 통해서 우리를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은 왜 나를 도와주지 않으시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도와주고 싶어하십니다. 기도하십시오. 작정하고 기도해보십시오. 주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애연이라는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남편과 작은 시계방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소 건강하던 남편이 갑자기 열이 나고 심하게 앓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병원에 가서 약을 타서 먹었지만 더 심해질 뿐 효과가 없었습니다. 구토까지 하면서 도저히 아픔을 견딜 수 없다고 호소를 해서 성모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했습니다. 허리에서 물을 빼 검사한 결과 ‘뇌수막염’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이 집사님은 조금 있으면 낫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남편의 진단결과를 듣고 놀랐습니다. 남편은 입원 후 3일 만에 혼수상태가 되어 중환자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손발이 굳어지고 눈동자는 옆으로 돌아가고 산소 호흡기가 끼워졌습니다. 의사는 “이 사람은 다시 깨어난다 하더라도 80%는 식물인간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집사님은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신 하나님을 부르며 남편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3일 동안 눈물로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기적같이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습니다. 남편이 정말 식물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기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주일, 수요일, 새벽예배, 철야기도회, 그저 시간만 나면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병원비를 중간 계산해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중환자실에 있으니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병원비를 달라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에 한 점잖은 신사가 한 분 오시더니 시계를 주문했습니다. 로렉스시계를 진품으로 5개 살 테니 한주에 하나씩 구해서 준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시계를 다 팔고 나니 병원비도 모두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지만, 남편이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드리는데, 어느 날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 데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아멘, 아멘!” 하는 소리가 크게 터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설교시간 내내 “아멘, 아멘!”을 하니 심령이 뜨거워지고 머리에서 뭔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기분이 아주 상쾌해졌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난 후 병원에 갔더니 남편이 정신이 돌아와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의 남편은 예전에는 바쁘고 피곤하다고 갖은 핑계를 대며 교회를 잘 가지 않았지만 이제는 건강한 몸으로 열심히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봉사하며 충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려움을 만났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니 주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기도해도 변화되는 것 같지 않아도 철야하며 죽기 살기로 매달리니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우리들을 놀랍게 도우십니다. 저와 여러분도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옵시다. 그리고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주님의 놀라운 도움을 받기를 바랍니다.
3. 주장이 놀랍습니다. 라원기 목사님의 글을 나눠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을 가만히 살펴보면 단 한 번도 자기의 말을 취소하거나 수정하거나 가감하거나 후회하거나 사과하거나 회의 하신 일이 없습니다. 주님은 단 한 번도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고 한 일이 없으십니다. 단 한 번도 죄 문제로 고민하신 일도 없으십니다. 또한 주님은 말씀하실 때 “아마 그럴 것이다”, 혹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등 애매한 말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신적 권위를 가지시고 하나님처럼 말씀하셨고, 하나님처럼 행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놀라운 가르침 아닙니까? 예수님이 하셨던 여러 주장들과 이 세상의 위대한 위인이나 성자들이 한 말을 비교해 보면 놀라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무지를 안다. 즉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라고 했습니다. 간디는 죽기 2주 전에 “오, 나는 괴롭다. 무엇을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간디 그리고 공자는 도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를 알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들은 혼돈 속에서 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십니다. 예수님이 도이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간디 그리고 공자가 그렇게도 찾았던 도가 바로 예수님이셨던 것입니다. 마호메트는 “나는 죄를 씻기 위해 무릎이 닳도록 기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도 죄인이었고 죄를 처리하지 못해서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마 9장에서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신 후에 중풍병을 치료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의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석가는 “너의 구원을 너희가 힘써 성취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는 것처럼 멸망 받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을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태평양 한 가운데 빠진 사람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영을 잘해도 불가능합니다. 올림픽 수영 종목에서 금메달을 몇 개를 딴 사람도 태평양 한 가운데서 스스로 구원을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주님은 구원에 대해서 조금도 주저함 없이 자신을 믿으라고 외치셨습니다. 막 16:16에 보면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6:40에 보면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주님이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구원의 도를 외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던 구원은 영적인 구원만이 아닙니다. 막 5:34에 보면 12년을 혈루병으로 고통당하는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선포하셨고 그 선포대로 여인은 즉시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만 아니라 질병으로부터도 구원하시고 가난으로부터도 구원하시고 실패와 절망으로부터도 구원해주시는 분입니다. 괴테는 죽음 직전에 “빛이 그립다. 문을 열어다오”라고 말했습니다. 반면에 우리 주님은 요 8:1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주님 자신은 빛을 찾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빛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빛이셨기 때문에 주님을 따라는 자는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어둠이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놀라운 것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자신에 대한 주장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주님은 원더풀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놀라우신 분입니다.
4. 죽음과 부활이 놀랍습니다.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더 잘 사는 것이고 더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드리지 못하고 더 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죽기 위해서 이 세 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주님의 죽음을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를 살리기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으심이 놀라운 것입니다. 막 10:45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죄 없으신 주님이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죄인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이 놀라운 죽음입니다. 또 놀라운 사실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주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은 천사에게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후에 그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이치입니다. 그리고 죽으면 마지막 때까지는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3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놀랍습니다.
5. 임재가 놀랍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40일간 이 땅에서 자신의 살아나심을 증거 하신 후에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주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임재하시며 함께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믿는 자들에게 임재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하늘로 가셨지만 지금도 임재하시는 이 사실이 놀라운 것입니다.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자주 경험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기적은 2000년 전에 있었던 것으로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수없이 많은 기적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라원기 목사님의 책에 실린 간증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대학생선교단체인 CCC에서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만든 ‘예수’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누가복음을 기초로 하여 예수님의 일생을 영화로 만든 것인데 전적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기 위하여 만든 영화입니다. 지금까지 이 영화는 무려 50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이 되어 전 세계 51억이 넘는 사람들에게 상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가 상영될 때 영화 속에 등장하신 예수님께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임하셔서 그들의 삶을 바꾸어 놓는 놀라운 기적들이 지금까지 수없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던 실화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이슬람 국가 중의 하나입니다. 이곳에서 일단의 사역 팀이 ‘예수’ 영화를 상영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가 상영되던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15세의 노비(Novi)라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생후 18개월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불붙은 석유램프를 집어 던지는 바람에 깨진 유리조각이 눈에 들어가 완전히 실명을 한 상태였습니다. 노비를 딱하게 여긴 그리스도인이었던 노비의 숙모는 비록 노비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것을 믿고 그녀를 영화가 상영되는 곳으로 데려갔습니다. 노비는 비록 눈은 볼 수 없었지만 깊은 밤 마을 한 가운데서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영화 속에 나오는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노비의 숙모는 예수님께 필사적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침 영화가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장면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노비는 뭔가 부드러운 손가락이 그녀의 눈을 쓰다듬는 것을 느꼈습니다. 손가락의 감촉이 사라지고 난 후 노비는 눈을 떴고 눈앞의 스크린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노비는 깨끗하게 나음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만져 주셨던 예수님을 스크린을 통하여 볼 수 있었고 나무와 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숙모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기적은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지금 중동지역이나 이스라엘에서는 노비의 체험과 비슷한 체험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영혼을 구원해주시고 기적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으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시며 믿는 자들에게 임재 하셔서 기적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주님의 임재는 놀랍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부릅시다. 그리고 놀라우신 주님과 동행하셔서 인생에 놀라운 일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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