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22:39-46; 히브리서 5:7(개역개정)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10일 동안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오로지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을까요? 그들이 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승천 직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 예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세례를 받으리라는 약속입니다. 제자들은 그 약속을 믿고 성령을 받기 위하여 전심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10일이 지나 오순절이 되었을 때에 약속하신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 마가의 다락방에는 어떤 현상이 있었습니까? 그곳에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가득했으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들이 사람들의 머리 위에 임하였으며, 그들을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데 가장 집중했던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주님의 약속을 믿고 예루살렘에 남아서 가장 힘을 썼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매우 중요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려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기도에 대해서 다루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의 기도가 가장 모범적인 기도라고 생각합니까? 홍해를 가른 모세의 기도입니까? 하늘 문을 닫고 열었던 엘리야의 기도입니까? 사자굴에 들어가는 상황이 발생해도 기도를 쉬지 않았던 다니엘의 기도입니까? 모두가 훌륭한 기도자들이었고 아름다운 기도의 모범을 보인 분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의 모범이 훌륭해도 우리 예수님의 기도의 모범만큼 훌륭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모범이 큐빅과 같다면 예수님의 기도의 모범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을까요? 우리의 기도와 같은 기도였을까요 아니면 다른 기도였을까요? 오늘 함께 읽은 두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기도에 관해서 나누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 있는 7가지를 살펴봅시다.
1. 습관 눅 22:39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예수님에게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무슨 습관이 있었을까요? 감람산에 가시는 습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려고 감람산에 가셨습니까? 기도하시려고 감람산에 가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습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도스’라는 단어인데 성경본문 원어사전인 바이블렉스 8.0에서는 ‘정해진 장소와 정해진 시간이 있는 독특한 개인적 행동의 규칙’이라고 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정시기도라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정시기도의 습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정시기도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생각나나요? 다니엘입니다. 단 6:10에 보면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다니엘은 정치적인 적들의 궤계로 위험에 처했습니다. 다니엘의 탁월함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밀리던 적들은 다니엘을 몰락시킬 방법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국사에 관해서는 흠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용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다니엘의 신앙적인 면을 공격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정시기도를 하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30일간 왕 외에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집어넣는 법을 제안하고 왕의 도장을 받아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니엘은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정시기도를 드렸습니다. 다니엘은 정시기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습니까? 목숨이 걸린 상황 속에서도 정시기도를 포기하지 못할 정도로 정시기도는 그에게 중요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정시기도가 목숨보다 중요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제가 지난 금요일 설교시간에 정시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상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은 제 말이 아니라 엔드류 머레이가 한 말입니다. “일정한 기도 시간이 없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다” 생각해 보세요. 정해진 기도시간을 갖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기도 할까요?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기도하는 것 외에 개인적으로 얼마나 되는 분량의 기도를 할까요? 하루 1시간 기도가 가능할까요? 제가 관찰할 때는 하루 1시간이 아니라 1주일에 1시간 기도도 못하고 있는 분들이 태반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금요일 설교 말미에 나는 언제 어디서 얼마만큼의 시간을 기도할 것인지 옆 사람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주일의 기도 플랜을 세우십시오. 그리고 실천하십시오. 지속적으로 유지하셔서 기도가 습관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르짖음 예수님의 기도에는 부르짖음이 있었습니다. 41,42절을 봅시다.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이 때 예수님은 어떤 기도를 드리셨습니까? 묵상기도인가요? 아닙니다. 그럼 무슨 기도입니까?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과 어느 정도 거리에서 기도하셨습니까? 돌 던질 만큼입니다. 그럼 돌 던질 만큼의 거리는 얼마나 떨어진 거리인가요? 아주 먼 거리는 아니지만 바로 옆도 아닐 것입니다. 돌을 던질 만큼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한 거리는 알 수 없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기도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도 기억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이 묵상기도를 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발성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히 5:7에서는 주님의 기도에 ‘심한 통곡’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 주님은 부르짖는 기도를 드린 것이 분명합니다. 렘 33:3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이 어떤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시는 분들 중에는 왜 교회는 그렇게 시끄럽게 기도하는가? 하나님은 큰 소리로 기도해야만 들으시는가? 라는 의구심을 갖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기도자들에게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34:15에 보면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간절함의 다른 표현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의 도움이 시급하다는 표현입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어떻게 합니까? 차분히 낮은 목소리로 “불이야. 우리 집에 불이 났어요. 도와주세요”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크고 다급한 소리로 “불이야, 불, 불, 불이야. 도와주세요. 불이야”라고 오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부르짖음이 극에 달해서 심한 통곡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통곡을 하면 언어는 사라지고 소리만 나옵니다. 기도하다 울부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어~~”하고 부르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부르짖음이 극에 달하면 언어가 사라지고 소리만 남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기도 그리고 통곡의 기도, 언어는 사라지고 소리만 남는 기도를 해보셨습니까? 제가 집에서 개를 키우며 보니 좋다는 표현 중에 하나가 주인을 살살 무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가 물었는데 살살 아프려고 하면 면 “아파, 그러면 어떻게, 조심해야지, 큰일 날뻔했잖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아프면 큰 소리로 “아파. 하지마”라고 할 것입니다. 심하게 아프면 “악~” 언어가 사라집니다. 소리만 남습니다. 기도가 간절해지면 조곤조곤 말하지 않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더욱 간절해지면 부르짖지만 언어는 사라집니다. 소리만 내게 됩니다. “어허~” 예수님의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였으며 또 통곡의 소리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기도가 경험되고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기도에 있었던 것 세 번째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눅 22:42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도 육신을 입고 있으셔서 십자가를 지시는 고통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를 원치 않는 육신의 뜻을 구했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땅에 오셨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시고, 아버지의 뜻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하셨고, 결국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 뜻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기도의 초창기에는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축적되면 내 뜻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갈등 속에서 때로는 내 뜻을 선택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더 깊은 기도의 세계에 들어가면 내 뜻은 사라지고 아버지의 뜻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대가도 지불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이런 수준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종종 빠지는 실수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내가 구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실망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구했던 것이 아버지의 뜻인데도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구한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었을 때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의 뜻을 구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굉장히 혼란스럽고 굉장히 낙심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때 왜 혼란과 낙심이 찾아오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결과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결과 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길게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지금 안 되는 것 같다고 계속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잘 되는 것 같다고 계속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의 형통은 형통이 아닙니다. 의인의 불통은 불통이 아닙니다. 길게 보면 악인은 흥하는 것 같아도 사실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고 의인은 망하는 것 같아도 사실 영생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이유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보다 옳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도저히 받아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드리는데 모범을 보인 부부가 있습니다. 1704년 독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베냐민 슈몰크 목사 내외가 멀리 심방을 갔다 왔습니다. 집에 와 보니 집에 불이 나서 집이 다 타버렸습니다. 잿더미 속을 뒤져보니 두 아들이 부둥켜안고 죽어 있었습니다. 두 아들의 시신을 안고 두 부부는 울부짖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울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이후 그 목사님 부부가 보인 반응이 놀랍습니다. 한참 후에 두 분의 마음이 진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부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 부부가 마침내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이것이 그때 그 목사님 부부가 고백한 눈물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고백의 글에 곡을 붙여 만들어진 노래가 찬송가 549장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4. 땀 예수님의 기도에는 땀이 있었습니다. 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열심히 기도하셨다는 것이죠.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는지 ‘힘쓰고 애써’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시다보니 몸에서는 땀이 흘렀습니다. 제 스승 목사님께서 젊은 시절에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에 가셨습니다. 기도원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밖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구경을 하셨는데, 그 때 믿음이 없는 입장에서 보니 마치 미친 사람들처럼 보였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기도원에서 기도하던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를 했기 때문에 불신앙을 가진 분의 눈에 그렇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를 고상하게 해야지 무식하게 요란하게 기도 하면 되느냐’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기도는 고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하고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운동선수가 시합을 할 때 고상하게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열심히 해야지요.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를 할 때도 고상하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고상하게 일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도, 찬송도 고상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찬송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을 들을 때도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수련회 때 기도회를 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을 보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기도를 합니다. 반면에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아서 뽀송뽀송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모습을 기뻐하실까요? 고상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아니라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좋아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땀이 있었습니다.
5. 눈물 히 5:7을 보면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며 눈물을 흘려보지 못한 사람은 기도의 맛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기도할 때 흘리는 눈물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회개의 눈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신의 죄악으로 인하여 흘리는 눈물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눈물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 없으신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며 하나님께 통회하는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둘째, 기쁨과 감격의 눈물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기독교인들에게 “술도 먹지 않고 무슨 재미로 사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사실 신앙생활에는 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나는 재미가 있습니다. 주님에게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자주 울었습니다. 감사해서 울고 감격해서 울고 주님의 은혜에 젖어서 울었습니다. 이 눈물은 고통의 눈물이 아니라 행복의 눈물입니다. 셋째, 안타까움의 눈물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눈물 중에 가장 비중을 차지하는 눈물이 이 안타까움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영혼이 안타까워서 우셨을 것입니다.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을 보며 안타까워서 우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눈물이 마르지 않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흘리는 눈물을 보십니다. 왕하 20:5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시고 히스기야를 죽을 병에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잊지 않으십니다. 시 56:8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소멸되게 하시지 않고 눈물 병에 담으십니다. 잊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눈물 흘린 것을 주님의 책에 다 기록해 놓으십니다. 왜냐하면 갚아주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 죄를 사해주시고,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 더 큰 기쁨과 감격을 주시는 것이고,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면 그 눈물을 기억하셨다가 열매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눈물이 있었습니다.
6. 피 예수님의 기도에는 피가 있었습니다. 눅 22:4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너무 힘을 써서 땀에 피가 섞여서 나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도하실 때 피가 나왔다는 말은 주님은 생명을 거는 기도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기도에 생명을 걸었잖아요. 적들이 이상한 법을 만들어서 기도하면 사자굴에 들어가야 하는데도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사자굴에서 다니엘을 지켜주셨고, 적들을 처리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목숨을 걸 일은 많지 않습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지만 공부하다 죽으면 안 됩니다. 아니 죽음이 아니라 공부하다가 병들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분들 직장생활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지만 직장생활에 목숨을 걸면 안 됩니다. 직장생활 하다가 죽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기도는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죽는 일은 거의 없지만 기도는 죽을 만큼 해야 합니다. 다니엘처럼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공부보다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직장생활 보다 중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드리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7. 경건한 삶 히 5:7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심한 통곡과 간구와 소원과 함께 경건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삶이 뒷받침 되는 기도였습니다. 엉망으로 살면서 기도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정한 기도는 삶이 뒷받침 되는 기도입니다. 제가 어릴 때 전도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들었던 예화가 생각납니다. 시골에서 어느 분이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고 집으로 가다가 목이 마르니 남의 오이 밭에서 오이를 따서 감사기도를 하고 먹었답니다. 새벽기도도 좋고 감사기도도 좋지만 남의 밭의 오이를 내 맘대로 따먹으면서 새벽기도하고 감사기도 하는 것은 옳지 않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삶이 뒷받침 되는 기도입니다. 기도를 바르게 하려면 세상에 나가서 바르게 사십시오. 바른 생활이 있는 기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 1장에 보면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사를 드렸지만 생활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들은 악한 생활을 고치지는 않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성전을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런 이중적인 생활을 악하게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삶을 고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찾는 그들이 무거운 짐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에 눈을 감고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와 제물과 기도를 거부하셨을까요? 그들의 생활이 악했고, 그들이 그런 악한 길에서 돌이키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는 올바른 생활이 있는 기도입니다. 말씀을 정리합시다. 여러분! 기도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기도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 기도는 아닙니다. 기도는 하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서 합시다. “그래도 기도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인간적으로 기도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도 그래도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입니다. 바쁘다고 호흡을 멈추면 어떻게 됩니까? 몸이 아프다고 호흡을 멈추면 어떻게 됩니까? 핍박이 있다고 호흡을 멈추면 어떻게 됩니까? 죽음입니다. 어떤 상황이 되어도 호흡은 멈추면 안 되는 것이듯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멈추면 영적으로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전쟁입니다. 영적 전쟁입니다. 적이 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피곤하다고 핑계할 수 있습니까? 바쁘다고, 몸이 아프다고 회피할 수 있습니까? 무슨 이유가 통할까요? 적이 총을 겨눈 상태에서 전쟁을 회피할 수 있는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귀가 죽이려고 노리는 상황에서 기도를 회피할 수 있는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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