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증인(6) (행2:1-4)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위대한 약속 두 가지가 성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성령님이 오신 것입니다.
요14:16-17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 즉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주시지는 않으셨을까요? 요7:37-39 말씀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난 후에 제자들에게 주어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에 따라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도 예수님은 사도들을 위시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약속하셨습니다. 행1:5 말씀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이제 예수님은 지상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 누리시던 본래의 영광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성령님이 오신 것을 보게 됩니다. 이로서 성령 강림에 대한 예수님의 위대한 약속이 성취된 것입니다.
(2) 교회가 탄생된 것입니다.
마16:18 말씀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합니다. 때로는 그리스도를 포도나무로, 교회를 그 가지들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예수님을 목자로, 교회를 양 무리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현저하게 쓰이는 표현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보는 것입니다. 고전12:27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오순절을 맞이해서 제자들은 모두가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은 그들 모두를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그들을 묶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약속하신 신약 시대의 교회가 드디어 이 땅에 탄생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위대한 약속 두 가지, 곧 성령님의 강림과 교회의 탄생에 대한 약속이 그대로 성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상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령 강림의 배경입니다(1절).
둘째, 성령 강림의 현상입니다(2-3절).
셋째, 성령 강림의 결과입니다(4절).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원합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첫째, 성령 강림의 배경에 대해서 살펴봅니다(1절).
1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오늘 본문은 성령 강림의 배경으로서 세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성령 강림의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다같이.”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곳에 모였더니.” 성령 강림의 장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사람(who)이나 장소(where)에 있지 않고 때(when)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이 사람과 장소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기록하면서도, 때에 대해서는 맨 앞에 오순절 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1) 성령 강림의 때
오늘 본문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님이 우연히 이 날에 오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따라서 이 날, 곧 오순절에 반드시 오시도록 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그 하나는 어구적 예언(verbal prophecies)입니다. 다른 하나는 상징적 예언(typical prophecies)입니다. 어구적 예언은 앞으로 되어질 일을 그대로 말씀한 것입니다. 예컨대 사7:14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어구적 예언은 마1:22-2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으로 말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한편 상징적 예언은 앞으로 되어질 일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였습니다. 그들은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를 치실 때, 그 피를 보시면 그 집은 그냥 넘어가셨습니다. 이 때를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여러분, 유월절 어린 양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고전5:7 하반부 말씀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양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징적 예언입니다. 물론 상징적 예언이 어구적 예언에 비해서 다소 분명하지 못하고 직접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징적 예언이 어구적 예언보다 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상징적 예언도 어구적 예언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의 사건도 바로 상징적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님은 반드시 오순절에 오시도록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 가운데 예정되고, 또 그렇게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23장에는 세 개의 절기가 나옵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절기가 바로 오순절에 해당됩니다.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1) 유월절(The feast of Passover)
레23:4-5 말씀입니다.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하나님이 애굽에 내리신 열 가지 재앙 가운데 마지막 재앙은 그들의 장자를 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죽음의 사자는 그 피를 보고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치시지 않고 그냥 그 집을 넘어가셨습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이 때 유월절 어린 양은 고후5:7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표현된 상징적인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가 된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음의 사자에게서 보호를 받았듯이,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하심에게 보호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유월절 양이시기 때문에 유월절에 죽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영원하신 섭리 가운데 상징적으로 예언된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사랑하시는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드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유월절에 돌아가심으로 “유월절 양”이라는 구약성경의 상징적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2) 초실절(The feast of firstfruits)
레23:9-11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초실절은 땅의 소산 중 첫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날입니다. 첫 이삭은 그 나머지 곡물의 추수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날은 유월절 기간 중에 있는 첫 안식일 다음 날, 곧 요즘말로 하면 주일날에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상징적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초실절, 곧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로 예수님의 부활은 초실절의 성취임을 깨닫고 고전15:20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니까, 그 다음으로는 우리들의 부활도 확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요14:19 하반부에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초실절 날에 부활하시도록 상징적으로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 중인 첫 안식일이 지난 그 다음 날인 일요일, 곧 지금의 주일에 부활하심으로 초실절의 상징적 예언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3) 오순절(The feast of harvest: Pentecost)
레23:15-17 말씀입니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제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 처소에서 에바 십분 이로 만든 떡 두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우리는 나이 70을 칠순이라고 부릅니다. 팔순은 80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오순은 오십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초실절로부터 오십 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이 때는 밀의 첫 수확으로 떡 두 개를 만들어서 하나님께 바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이 때의 떡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누룩이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성경에서 누룩은 죄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초실절에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보리에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오순절에 드려지는 떡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얼마든지 누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첫 수확된 밀 이삭들이 한 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오순절에 성령님은 강림하셔서 따로 따로 떨어진 제자들을 한 덩어리, 한 몸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것입니다. 떡은 두 덩이였습니다. 유대인들이든지 이방인들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는 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의 죽으심도, 부활하심도,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심도 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성령님이 오순절에 임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은 구약성경의 상징적인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오순절에 오셨던 것입니다.
(2) 성령님을 받은 사람들
본문 1절 중반부는 “저희가 다 같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의 “저희”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을 위시하여, 행1:15에 기록된 일백이십 명의 성도들 모두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오실 성령님을 함께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 성령 강림의 장소
1절 하반부에는 “한 곳에 모였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은 저들이 “집”에 앉아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의 “집”을 하나님의 집인 성전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행2:46에서 성전과 집을 명백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의 “집”은 그들이 그 동안 모여 있던 예루살렘의 다락방, 곧 전통적으로 행12:12 말씀에 의거해서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불리는 곳에 모여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둘째, 성령 강림의 현상에 대해서 살펴봅니다(2-3절).
오늘 본문 2절과 3절은 성령 강림의 징표를 두 가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바람으로, 3절에서는 불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람과 불은 둘 다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을 때, 하나님이 징표로 사용하시는 현상입니다. 성령님도 성삼위 하나님의 삼위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실 때에도, 같은 징표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1) 바람(The wind, 2절)
2절 말씀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오늘 본문은 매우 중요한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어느 때라도 잊지 말아야 할 단어입니다. “홀연히”라는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시작은 홀연히, 순간적으로 되어졌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의 마지막도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22:1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도, 순간적으로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다시 말해서 우리를 순간적으로 하늘 나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명심합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오순절 성령 강림이 다 하나님의 정해진 경륜에 따라서 하나씩 하나씩 성취되어 가듯이,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도 정해진 때가 되면 홀연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도적과 같이 임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그 날을 준비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있는 자들은 놀라운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한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아니라 바람 같은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낀 것이 아니고,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것도 소리 없이 불어오는 미풍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급하고 강한 바람, 곧 태풍이 휘몰아칠 때에 나는 큰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늘로부터” 온 소리였습니다. 이것은 그곳에 모인 일백이십 명의 사람들이 통성으로 기도하면서 만들어 낸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또 이 소리는 천둥과 같이 기상학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이 소리는 지진과 같이 지질학적으로 만들어진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본문 바로 뒤에 있는 6절에 의하면, 그 주변에 있던 불신자들이 온 집에 가득한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그곳으로 많이 모여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날씨에 이상이 있었다면, 또는 지진과 같은 재앙이 있었다면 주변에 있는 불신자들이 그곳으로 모여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온 소리의 기원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의 삼위가 되시는 성령님의 임재에 따른 징표로서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과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할 정도로 크게 울렸던 것입니다.
(2) 불(The fire, 3절)
3절 말씀입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성령님은 2절에서는 제자들이 청각적으로 들을 수 있게 임하셨습니다. 이제 3절에서는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임하셨습니다. 물론 이 때도 실제적인 불이 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했더라면 제자들은 모조리 화상을 입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불이 아니라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모세는 시내산에서 떨기나무에 불은 붙었으나, 전연 그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제자들도 그와 똑같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연 움직임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전연 뜨겁지가 않았습니다.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성령님이 그곳으로 강림하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그곳에 있는 각 사람 위에 임하셨습니다. 이제 그들 모두는 예수님이 행1:5에 약속하신 대로 성령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령님은 그들 속에 계시면서 영원토록 그들과 함께 있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요14:16-17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고전12:13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들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 곧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로서 드디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 땅에 탄생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교회를 탄생시킨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은 특별한 현상을 나타내시면서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미 교회는 탄생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에 성령 세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 속에 계신 것입니다.
셋째, 성령 강림의 결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4절).
4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 세례는 성령 충만으로 이어졌습니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인 일백이십 명의 성도들은 2-3절에서 성령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은 다릅니다. 우리는 성령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됩니다. 성령 세례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순간에 일회적으로 단 한번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성도가 된 자들에게 또다시 성령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이와는 다릅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엡5:18 말씀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예컨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술에 취해버리면 술로 충만해집니다. 그러면 술이 그 사람의 생각도, 말도, 행동도 다 지배를 해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습니다. 그리해서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고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머무르지 말고, 우리는 늘 성령님으로 충만해서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도, 우리가 말하는 것도, 우리가 행동하는 것도 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와는 달리 계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성령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일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인 반면, 성령 충만은 그 뒤에 우리가 부단 없이 추구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예컨대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인 일백이십 명의 성도들은 오순절 날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그 날로 끝나지 않고 그 뒤로도 계속 반복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경우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아울러 성령 충만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가를 눈 여겨서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행4:8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행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행7:55-56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이처럼 성령 충만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의 강림 이후에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결과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은 무엇입니까?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령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한 일원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서 저절로 누군가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하면 저절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이 강권적으로 그렇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4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성령님이 그들의 입과 혀를 다스리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습니다. 방언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좀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릴 것은 여기에서의 방언은 남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낸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있는 행2:11 하반부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은 다른 사람들이 분명히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였습니다. 그리고 방언으로 말한 내용도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 충만하여 불신자들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그들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 충만의 결과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삶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성령 세례도 받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다음에 우리가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성령님은 우리를 위한 보증이 되십니다. 엡1:13-14 말씀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을 받고 성령 세례를 받아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기업으로 이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만 머무르지 맙시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다. 그리해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능력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 인간적인 뜻, 인간적인 고집과 편견을 다 버리고, 성령님에게 우리의 삶 전체를 온전히 맡기십시다. 그리할 때 성령님은 비로소 우리를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한 생명을 살리는 영혼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나가실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있기를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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