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 (마1:1-17)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라.”
여기에 사용된 세계(世系)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世界)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족보(族譜) 또는 계보(系譜)를 뜻하는 말입니다.
(1) 족보의 중요성(The importance)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통적으로 족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곳이라고 해서 아무 데서나 정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제비를 뽑았습니다. 그리고는 지파별로 땅을 나누어 자신들의 기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이 얻게 된 기업은 자손대대 이어졌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의 손에 그 기업이 넘어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룻기를 통해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간 기업은 다시금 원주인이나 그 원주인에게 가까운 친족이 원주인에게 가까운 차례대로 그 기업을 무를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가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서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한 지파도 있었습니다. 바로 레위 지파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해야 할 제사장 지파였습니다. 그러한 레위 지파에서도 족보는 역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스2:61-62 말씀입니다.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에 하나로 아내를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으로 이름한 자라 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자기들이 제사장들의 후손임을 주장하면서 제사장 직분을 행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레위 지파의 족보에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제사장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족보는 자신들의 기업인 땅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또 레위 지파에게 있어서는 자기들의 직분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도 족보는 역시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에서 행해진 인구조사가 지파별로, 족속별로 행해졌음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눅2:1-5 말씀입니다.
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사도 바울도 자신의 족보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베냐민 지파로 자주 밝혔습니다. 예컨대 롬11:1, 고후11:22, 그리고 빌3:5입니다.
롬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고후11:22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빌3: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족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왔습니다. 구약성경에만 오십여 개의 족보가 등장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후 1세기에 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가정에 매우 자세하게 기록된 족보를 소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대부분의 족보는 소멸되었습니다. 그 이후 오늘날에 와서는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뿌리를 증명할 수 있는 족보가 전혀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다윗 왕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삼하7:12-13 말씀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이 약속은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이나 그 이후의 어떤 왕에 의해서도 성취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래도록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기다려왔습니다. 물론 이 약속의 말씀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 가운데는 아직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이제는 그들에게 남아있는 족보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제 자기들이 메시야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이 생기더라도,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아직도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만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입증이 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시며, 마지막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2) 네 복음서의 강조점(The emphasis)
신약성경에는 모두 네 권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의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메시야는 똑같은 뜻의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이고, 메시야는 히브리어일 뿐입니다.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anointed one)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 제사장들, 그리고 왕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직분을 모두 가지고서, 기름 부으심을 받으셨습니다. 네 권의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이 만백성들의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시도록 되어 있던 바로 그 메시야(the Anointed One, the Messiah)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 복음서가 나름대로 강조하는 점이 따로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메시야적 왕(the Messiah King)으로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메시야적 종(the Messiah Servant)으로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합니다(the Son of Man).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합니다(the Son of God).
우리는 각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이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마태복음을 살펴봅시다. 마1:1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조상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열왕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창17:6에서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또한 다윗은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다윗에게만 왕이라는 칭호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6절 상반부 말씀입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말하자면 예수님은 열왕의 아비인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인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예수님의 왕적 족보(royal genealogy)를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자신이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신 적도 있으셨습니다. 요18:37입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아무튼 마태복음은 그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의 왕 되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없습니다(no genealogy).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종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에게 무슨 족보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전혀 기록되고 있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은 3장에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하향식 족보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밑으로 내려오면서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 3장의 족보는 상향식 족보입니다.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첫 사람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예수님의 법적 부친인 요셉 집안의 족보인 반면, 누가복음 3장의 족보는 예수님의 혈통적 모친인 마리아 집안의 족보입니다. 눅3:38입니다.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이처럼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첫 사람 아담까지 추적해서 올라갔습니다. 말하자면 누가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는 인적 족보(human genealogy)인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는 어떠합니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인적 족보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말씀도 전혀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처음 시작부터 아예 예수님의 신적 족보(divine genealogy)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1:1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족보 한 가지를 통해서도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왕 되심을,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종 되심을,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인성을,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3) 마태복음에 나타난 왕의 모습(The presentation)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의 왕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망하던 메시야의 대명사인 셈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의 왕은 세 가지 다른 각도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이 왕으로 나타나심(the revelation of Jesus as King)
마태복음이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는 대표적인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족보를 통해 예수님의 왕 되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은 동방박사들의 입을 통해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는 선구자 세례 요한이 왕 되신 예수님의 나라가 가까웠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4장에서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천하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겠다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심지어 마귀조차도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릴 권세가 있으신 왕이심을 인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은 왕이신 예수님이 그 백성들인 우리들에게 내린 조서, 곧 가르치심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은 자신이 가지신 초자연적인 능력을 통해서 여러 가지 기적들을 베푸심으로 자신이 이 세상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 되심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여러 비유들을 통해서 그 나라의 비밀을 말씀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때 그곳에 있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칭하면서 환호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왕의 아들로 나타내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이 하늘의 천사들을 다스릴 권세가 있는 줄 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죄패가 붙어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인 28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졌음을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그 어느 복음서보다도 예수님의 왕 되심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건만,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을 했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왕으로서 배척을 당하심(the rejection of Jesus as King)
마태복음은 그 어느 복음서보다도 예수님의 배척 당하심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배척의 그림자는 마태복음 전체에 깊이 깔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기 이전부터,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자기의 남편 요셉에 의해서 끊김을 당할 처지에 놓였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태어나시면서 곧 헤롯 왕에 의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모님은 예수님과 함께 애굽으로 피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 요한은 옥에 갇히더니, 결국 목 베임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 기간 동안에 머리 둘 곳도, 다시 말해서 마땅하게 거할 처소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과는 달리 마태복음은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 모두가 예수님의 왕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무리들만 모여 있었습니다. 요한복음과는 달리 마태복음에서는 여인들도 그저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마태복음 마지막 장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에게 돈을 주고서 그들을 매수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 군병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적질하여 갔다고 거짓말을 하도록 시켰습니다.
이처럼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도 예수님에 대한 배척이 더 집요하고 더 사악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결국 배척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이로서 끝나지 않습니다. 왕 되신 예수님은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다스리실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이 왕으로서 다시 오심(the return of Jesus as King)
마24:30과 마25:31-33 말씀을 읽어봅니다.
마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5:31-3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예수님의 재림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영광의 왕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은 승리의 복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대로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심을 여러 가지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영광의 왕으로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영원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
이상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오늘 본문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의 왕 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겁먹지는 마십시오. 이 시간 그들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차례대로 살펴볼 생각은 없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에 그렇게 하는 것은 역부족입니다. 아울러서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별반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우리를 다스리시지만, 철권으로 다스리시는 왕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율법으로 다스리시지 않고 은혜로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은 은혜로우신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이 무슨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인 여호수아 또는 예수아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Jehovah saves)”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마1:21에서 요셉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왕으로 오시되, 그 이름의 뜻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도 예수님은 은혜의 왕으로 오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네 가지 사항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시간적인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한 여성의 선택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첫 사람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예수님의 모습도 흙으로 만드실 수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여성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로 하여금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다윗의 아들이었던 솔로몬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나 눅3:31에 기록된 대로 마리아는 다윗의 또 다른 아들이었던 나단의 자손이었습니다. 마리아도 왕의 혈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습니다. 눅3:23에 있는 말씀에 따르면, 마리아는 헬리라는 사람의 딸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전연 알려지지 않은 인물입니다. 따라서 만일 마리아가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평범한 여성으로 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자신의 삶을 끝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물론 마리아는 그 당시 사람들에 비해서 다소 경건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는 천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서 마리아가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리아가 완전한 인물이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눅1:28입니다.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자가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였습니다. 여러분, 은혜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죄인들인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자비가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마리아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눅1:46-47에서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마리아에게도 구주가 필요했습니다. 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무명의 한 여인이었던 마리아를 택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로 삼으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리아를 지나치게 높이는 다음과 같은 말들에 미혹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리아도 예수님처럼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났다.” “마리아는 죄가 없는 사람이다.” “마리아는 동정녀의 몸을 그대로 가지고 살다가 죽지 않고 하늘로 승천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두 분인데, 한 분은 예수님이고 또 다른 한 분은 마리아이다.”
이는 다 비성경적인 주장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오히려 마리아를 의도적으로 낮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마12:46-50 말씀입니다.
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47 한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하니
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또 눅11:27-28입니다.
27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에 나오는 여성은 요즘말로 하면 열심 있는 천주교 신자가 될는지는 모릅니다. 마리아를 높이려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주셨습니다. 마리아를 높이는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이 중요한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마리아를 신성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우는 법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리아를 사람의 위치 이상으로 높여서 신격화하는 일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도 우리와 같은 죄인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모친이 되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리아라는 한 여성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한 무명의 여성이었던 마리아에게 베풀어졌던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두 남자의 삶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여기에 예수님의 조상으로서 두 남자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따지고 보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죄인들에 불과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은 두 번씩이나 자기 아내 사라를 자기의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한 번은 애굽의 바로를 속였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또 한번은 그랄 왕 아비멜렉을 속였습니다.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함으로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욕되게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아브라함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의 아내 사라가 제안하는 대로 하갈을 첩으로 들여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의 가정뿐만 아니라, 자손대대 많은 불행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조상도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메시야의 조상도 되었습니다.
다윗은 어떠합니까? 그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습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자기의 아내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야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그는 엄청난 죄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면, 그가 이런 말씀을 들어야 했겠습니까? 대상22:8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다윗은 자식들 교육에서도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였던 압살롬은 자기 아버지 다윗을 처치하고 왕좌를 빼앗으려 들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아들들은 서로 싸우면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죄 많고 허물이 많은 다윗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이상적인 왕으로 추앙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난 한 여성 마리아도, 또한 두 남자 아브라함과 다윗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다 부족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부족과 허물과 실패를 다 극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루지 못한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함으로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모두 다 성취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세 시기의 역사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7절입니다.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러라.”
마태복음은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세 시기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시기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입니다. 이 때는 이스라엘의 여명기입니다. 이 시기는 족장들과 그들의 뒤를 이은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이스라엘을 만들어나가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여러 영웅들이 활약하던 상승기였습니다.
둘째 시기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입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의 쇠퇴기였습니다.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 때에 이스라엘은 잠시 영화를 누렸을 뿐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나자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쪼개졌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남 유다도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때, 그저 빤짝거릴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만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을 지킬 뿐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때는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결국 남 유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유다의 많은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셋째 시기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입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의 몰락기이며, 암흑기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스알디엘부터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의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들에게 전연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입니다. 이 시기 육백 년 동안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의미 없는 존재로 그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보잘 것 없는 역사를 가진 이스라엘이었지만, 바로 그 이스라엘을 통해서 메시야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의 결과였던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불명예스러운 네 명의 여자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에서 보여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 이하 6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방금 읽은 본문에는 네 명의 여성이 등장합니다. 다말과 라합과 룻과 우리야의 아내 곧 밧세바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족보에는 여성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처럼 네 명의 여성 이름이 포함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들 네 명은 하나같이 불미스러운 과거를 지닌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메시야의 족보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첫째 여성은 다말입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창세기 38장에 자세히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가나안 여자였습니다.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남편이 죽자 창녀의 행세를 하면서 자기의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했습니다. 그리고는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습니다. 다말은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되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둘째 여성은 라합입니다. 여러분, 라합이 어떤 여성이었습니까? 여호수아서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그는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다말은 자손을 갖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창기 노릇을 했습니다. 반면에 라합은 그 일을 자기의 직업으로 갖고 있던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여호수아가 보낸 이스라엘의 두 정탐군을 숨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여리고 성이 멸망당할 때, 그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살몬과 결혼해서 룻기에 나오는 경건한 남성으로서 다윗 왕의 증조 할아버지였던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이방 여인이었던 라합이, 기생이었던 라합이 메시야의 조상이 되어 메시야의 족보에 오르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셋째 여성은 룻입니다. 물론 룻은 다말이나 라합처럼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여성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룻도 두 여인과 마찬가지로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모압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모압이 본시 누구였습니까?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대로 모압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술에 취해 그의 큰딸과 동침해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신23:3입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뿐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처럼 모압 사람들은 저주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원칙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사람과 결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나오미의 아들이었던 말론은 모압 여인이었던 룻과 결혼을 했습니다. 또 말론의 형제 기룐도 모압 여인 오르바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일찍 죽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하나님의 명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벌을 받았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룻은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할 수도 없었던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시모 나오미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베들레헴의 유지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영광스럽게도 메시야의 족보에까지 그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룻이 저주받은 백성 가운데서 택함을 받아, 이스라엘의 총회로 들어오게 되고, 더 나아가서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마지막 넷째 여성은 밧세바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고, 단순히 우리야의 아내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불러서 동침을 했습니다. 그 결과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배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야는 최전선으로 보냄을 받아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후에 다윗은 밧세바를 자기의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솔로몬이었습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밧세바가 다윗의 아내가 되어 솔로몬을 낳고, 나아가서 그가 메시야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은 전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What a grace!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단순히 옛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예수님이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울러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여성 마리아에게서, 두 남자 아브라함과 다윗에게서, 세 시기의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리고 네 명의 불명예스러운 여성에게서 계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또한 죄인들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손이 되는 것도 우리에게 어떤 인간적인 공로가 있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이것 역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마9:13 하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은혜로우신 왕이십니다. 죄인들의 친구가 되십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본시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창기처럼 죄인으로 취급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마태를 부르시고, 그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그의 스승이 되어주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직접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마태는 감격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이 은혜의 왕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성탄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시간 다시 한번 우리 모두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십시다. 그리고 왕이신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 보좌에 모십시다. 예수님은 은혜로 우리를 다스려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인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우리의 모든 부족과 허물을 깨끗하게 덮어주실 것입니다. 은혜로 우리를 다스리시는 예수님은 우리의 실패를 성공으로, 우리의 패배를 승리로 바꾸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늘 충만하기를 은혜의 왕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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