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증인(7) (행2:5-13)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사도행전 2장은 인류의 역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놀랍고도 위대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도행전 1장의 내용과 사도행전 2장의 내용을 서로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과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차이점들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을 세 가지만 대표적으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사도행전 1장에서는 예수님이 승천하셨습니다. 반면 사도행전 2장에서는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이 하늘로부터 오셨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성령님은 필요에 따라서 일시적으로 오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리함으로서 예수님이 요14:16-17에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둘째,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시기 위해서 사도들에게 여러 가지를 준비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일곱 가지로 그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반면에 사도행전 2장에서는 드디어 교회가 이 땅에 탄생했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이 마16:18에서 하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셋째,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님이 오시기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서는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이 행1:8에서 하신 말씀도 이루어졌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승동의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 승동교회에도 새로운 시대를 여는 놀랍고도 위대한 전환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10월 29일 총동원전도주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크게 역사하심을 우리의 두 눈으로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이는 앞으로 우리 승동교회에 어마어마한 부흥의 불길이 일어나게 될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승동교회와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통일한국의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에 크고도 위대하게 쓰임 받게 되기를 만 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행2:1-4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서 성령님은 오순절 날에 오시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 성령님은 그 날 오시도록 이미 상징적으로 예언이 되어 있었습니다. 드디어 예정된 그 날이 이르렀습니다. 행2:1입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성령님은 성삼위 하나님의 삼위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임재하실 때, 때로는 임재의 징표를 보이시기도 합니다.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징표가 바람과 불입니다. 성령님도 이 두 가지의 징표를 나타내시면서 강림하셨습니다. 행2:2-3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일백이십 명의 성도들은 모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날 그 시간, 그들은 성령 세례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은 그들을 주장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그들을 통하여 한 가지 특별한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행2:4입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제 오늘 본문은 그 연속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큰 무리의 모여듬입니다(The Crowd, 5-8절).
둘째, 이들의 구성입니다(The Composition, 9-11절).
셋째, 이들의 반응입니다(The Response, 12-13절).
이 시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말씀을 전할 때도 온전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받을 때도 온전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말씀을 받기를 소원합니다.
첫째로, 오늘 본문은 큰 무리가 그곳으로 모여들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The Crowd, 5-8절).
오늘 본문 5절입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삼차씩, 곧 삼대 절기 때에는 예루살렘으로 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신16:16입니다.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여기에서 말하는 칠칠절은 곧 오순절을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은 이 규례에 따라서 삼대 절기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국내에 거주하는 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스라엘 국외에 흩어져 거주하는 자들도 열심이 있는 자들은 멀리서도 예루살렘을 찾아왔습니다.
약1:1과 벧전1:1 말씀을 읽어봅니다.
약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벧전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헬라말로 흩어짐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외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켜서 흔히들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그 때”는 오순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많은 디아스포라들이 천하 각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몰려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그들을 가리켜서 “경건한 유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에 순종해서 멀리서부터 예루살렘을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6절 상반부의 말씀입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여기에서의 소리는 단수형입니다. 만일 여러 사람이 방언으로 말할 때의 소리라면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소리는 성령님이 강림하실 때 들려왔던 소리, 곧 2절에 기록된 대로 하늘로부터의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서 온 집에 가득했던 소리가 분명합니다.
그 때 일백이십 명이 모여있었던 예루살렘의 다락방, 곧 마가의 다락방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몰려 있었을 것입니다. 주후 70년 로마의 장군 디도가 예루살렘을 공격했을 때, 그 때 예루살렘에는 약 3백만 명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에도 그 정도에 버금가는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오순절을 맞이해서 많은 디아스포라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으니 얼마나 사람들이 많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성령님의 강림 소리를 듣고서 무슨 일인가 하고서 그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이 와보니까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6절 하반부 말씀부터 8절 말씀까지 읽어봅니다.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그곳으로 모여든 디아스포라들이 놀라는 모습을 세 가지 동사들을 연속적으로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동했습니다. 그들은 다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만큼 그곳에서는 특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현상이었습니까? 디아스포라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기들 곧 디아스포라들이 살고 있는 국가나 지방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어쩌다 한 두 마디 정도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 “듣고”는 미완료형입니다. 계속적인 동작을 나타낼 때 쓰이는 시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치 그 언어가 자기들의 평상시 언어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치 외국인이 우리 나라 말을 할 때처럼 더듬거리면서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디아스포라들은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각 나라의 방언을 말하되, native speaker처럼 곧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유창하게 말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지금 디아스포라들이 기이하게 여기는 주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가는 그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갈리리 사람들이 어떻게 이처럼 자기 나라의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갈릴리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 천한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 정평이 나있던 곳이었습니다. 예컨대 요1:45-46 말씀을 읽어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나사렛은 갈릴리의 한 동네입니다. 갈릴리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요7:52입니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하여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이처럼 갈릴리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던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갈릴리 사람들에게는 독특한 어투가 있었습니다. 마치 경상도 시골 사람들이 “쌀”이라는 발음을 제대로 못해서 “살”이라고 말한다든지, 또 전라도 사람들이 “의”자 발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의사”를 “으사”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식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이 말하는 것만 들으면 그 사람이 갈릴리 사람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마26:73 말씀과 막14:70 말씀입니다.
마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막14:70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니라
갈릴리 사람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를 못했습니다. 사투리도 심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른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니 그 말을 듣는 디아스포라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들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그 때,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물론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도 방언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령님은 특별한 때, 특별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목적으로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지금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그러면 선교사님들이 무엇 때문에 몇 년씩이나 선교지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고생을 해야 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만 하면 되는데요.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듯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님이 특별한 때에, 특별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해서 더 이상 같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방언의 목적을 살펴보면 금방 이해가 갈 것입니다.
(1) 사도행전 8장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들
행8:14-17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본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이 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 가운데도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령님은 이들을 위해서 한 가지 특별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교회의 두 지도자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사마리아인들도 이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에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했던 것처럼, 이들 사마리아 사람들도 역시 방언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성령님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게 된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일 성령님이 사마리아인들에게 그러한 특별한 현상을 나타내시지 아니하셨더면, 그 당시의 사도들이나 우리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2) 사도행전 10장에 등장하는 이방인들
행10:44-46입니다.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고넬료는 로마사람으로서, 이방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그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방언을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베드로와 함께 왔던 유대인들이 놀랐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그들이 깨닫게 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뒤에 베드로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그 때의 일을 상고하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15:6-9입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와 그의 가족들도 모두가 성령 충만하여 방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성령님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분간이 없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3) 사도행전 19장에 등장하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
행19:1-7 말씀입니다.
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여기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 열 두 명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을 말했습니다. 그리함으로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성령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어나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그 다음으로는 사마리아인들에게, 그 다음으로는 이방인들에게, 마지막으로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까지 하나가 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징표로서 성령님은 모두에게 똑같이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특별한 때, 특별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이미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그 순간 구원을 받습니다. 아울러 그 순간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됩니다. 고전12:13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따라서 더 이상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방언을 말하게 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엡5:18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바울은 곧 이어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의 모습은 부부사이의 사랑과 존경으로 나타납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의 올바른 관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살펴보아도 방언으로 말해야 한다는 말씀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필요도 없고, 또 있지도 않은 방언을 구하지 맙시다. 만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지금도 있다면, 이것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은 우리들이 아니라 선교지에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할 선교사님들일 것입니다.
둘째로, 오늘 본문은 모여든 큰 무리의 구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The Composition, 9-11절).
(1) 방언들(The languages, 9-11상)
누가는 오늘 본문에서 디아스포라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인 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모두 열 다섯 개의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물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똑같이 열 다섯 개의 방언을 다 말했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방언으로, 어떤 사람은 저 방언으로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9-11 상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처음 네 가지, 곧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메소보다미아는 바벨론 지역에 해당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들처럼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정착해서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유대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 곧 이스라엘 땅의 북쪽인 수리아지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곳을 포함해서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그리고 밤빌리아는 소아시아 지역에 해당합니다. 그러니 먼저 동쪽 바벨론 지역에서 이제 서쪽 소아시아 지역으로 옮겨서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애굽,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지방은 모두 아프리카에 해당하는 지역입니다. 그런 다음에 오늘 본문에서는 로마가 두드러지게 표현되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세계의 수도였습니다. 아울러 복음이 전해져야 할 땅 끝이라고 간주되던 곳이었습니다. 누가는 오늘 본문에서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유대인들은 아니지만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식들을 지키기로 하고 유대교에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킵니다. 아무튼 이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뒤에 로마교회를 설립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레데인들과 아라비아인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대륙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섬에 살고 있는 그레데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막 지방인 아라비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 내용(The message, 11절하)
11절 하반부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그곳에 모여든 큰 무리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두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택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는 분명 기적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적이 사단의 역사로 일어난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역사로 일어난 것이냐? 그들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큰 일을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분명 사단의 역사는 아닙니다. 자연히 그곳에 모인 무리들은 지금 하나님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놀라우신 성령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먼저 방언이라는 기적을 통해서 그곳에 모인 디아스포라들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성령님은 베드로를 일으켜 세우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디아스포라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베드로가 전하는 말씀도 역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드디어 베드로는 소리 높여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 다음 절인 14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러면서 그는 먼저 자기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된 것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베드로는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행2:22-24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증거하셨고, 하나님에 의해서 내어준 바 되셨고,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음을 베드로는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그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행2:36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처럼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인 일백이십 명의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서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은 성령님의 놀라우신 섭리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먼저 방언으로 그곳에 모인 디아스포라들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님은 베드로를 들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해서 우리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는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전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에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아멘으로 받으십시다. 그리할 때 성령님은 우리를 통해서 놀랍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오늘 본문은 이들의 반응이 서로 다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The Response, 12-13절).
예수님도 “씨를 뿌리는 농부”의 비유에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언제나 좋은 땅에만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길가에 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돌밭에, 또 때로는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서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복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음의 문을 닫아놓고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먼저 12절입니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그곳에 모인 디아스포라들은 다 놀랐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사실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자기들의 이성으로는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어찐 일이냐?”고 하면서, 모두가 의혹스러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들 가운데서 긍정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베드로가 전한 복음에 귀를 기울인 사람들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행2:37-41 말씀을 읽어봅니다. 이 때는 베드로의 설교가 끝났을 때입니다.
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마음의 문을 열고서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자는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그들 가운데는 성령님의 거룩하신 역사를 술 취한 자들의 소행으로 간주해버리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이었습니다. 마12:22-24입니다.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훼방은 오늘 본문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 행위는 점차로 더 심해지고 악해져 갔습니다. 행4:7입니다.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훼방자들은 사도들의 권세를 인정치 않았습니다. 행4:17입니다.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은 사도들을 위협했습니다. 행5:18입니다.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그들은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또 행5:40입니다.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그들은 사도들을 채찍질하더니 급기야 그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행7:57-60 말씀입니다.
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입을 열어 복음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듣는 이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 때문에 낙심치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천사의 말로 복음을 전한다 하더라도, 성령님이 그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복음이 그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런 사람은 반드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하심에 맡기고, 우리는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충성스럽게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잘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전3:6-8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심든지 물을 주든지 할뿐입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심었고 물을 주었는데도, 그것이 자라서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우리가 실패해버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상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가 심은 대로, 또 물을 준 대로 우리에게 상을 주실 것입니다.
지난 일년 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기 위해서 많이 노력해왔습니다. 많이도 심었습니다. 물도 많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지난 10월 29일 총동원전도주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생명의 면류관, 자랑스러운 면류관을 받아쓰는 그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어 부지런히 복음의 씨앗을 심고, 이웃을 위한 기도의 눈물과 사랑의 땀을 흘릴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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