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베드로후서 1장 16 - 21절(개역개정)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거북이 한 마리가 부산에서 서울로 출발하였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지렁이 한 마리가 가고 있었습니다. “어디 가니?”, “서울가.”, “나도 서울 간다. 내 등에 타라.” 그리고 지렁이를 태우고 서울로 올라가고 있는 데 굼벵이를 만났습니다. “어디 가니?”, “서울가.”, “나도 서울 간다. 내 등에 타라.” 그래서 거북이 등에는 지렁이와 굼벵이가 같이 타고 있었습니다. 굼벵이가 지렁이에게 말했습니다. “꽉 잡아! 되게 빠르다. 번개 같아. 잘못 하면 떨어진다.” 굼벵이 눈에 거북이는 정말 빠릅니다. 그러나 토끼눈으로 보면 거북이는 느림보입니다. 우리 보기에 문제가 큰 것이지,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역사하셔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엄청난 것도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 107:19,20은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도와주시는가를 말씀합니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20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부르짖어 기도하면 우리들을 구원해주시는데 말씀을 보내어 구원해주십니다.
여기서 구원은 영혼의 구원과 생활의 구원을 포괄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말씀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말씀의 역사로 인하여 생활의 구원도 풍성하게 받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포괄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으로 말씀을 보내시고 그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를 위경에서 건지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하나님은 성경으로만 말씀하시는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성경으로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제 아내에게 제 뜻을 전달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직접 말할 수도 있습니다. 편지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문자로도 가능합니다. 표정으로도 제 뜻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몸짓으로도 가능합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제 뜻을 전달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방법 역시 다양합니다. 이미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제 책을 읽어보고 하나님 음성에 관한 제 설교를 들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오늘 설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써주신 편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문자로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정확합니다. 성경은 오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자신의 뜻을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으로만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어떤 방법으로 말씀하실까요?
1. 음성으로도 말씀하신다. 제가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책을 썼더니 어떤 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느냐고 비판하더군요. 제가 그 책에서 사용했던 ‘하나님의 음성’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주시는 모든 방법‘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음성이라는 말을 ‘귀로 들리는 소리’라는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으면 죽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사람이 죽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서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창조되자마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범죄한 후에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죽지 않았습니다.
출 19:19에 보면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고 기록되어 잇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모세가 죽었습니까? 죽지 않았습니다.
신 4:33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이 말씀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일을 기억을 하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죽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는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 외에 다른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죽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는 특별한 은혜를 입은 백성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흔히 사용하시는 방법은 아닙니다. 귀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도 아주 자주 들었던 사람들은 거의 희귀할 정도로 적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음성으로도 말씀하십니다.
2. 성령의 감동으로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실 때 저자들에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저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셔서 성경을 더 기록하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성공적인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성공적인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뜻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다양한 방법으로 알 수 있지만 우선순위를 둔다면 첫 번째가 성경입니다. 두 번째가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입니다. 성경에 있는 것은 성경대로 하면 됩니다. 성경에 없는 것은 성령의 지도와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큰 그림을 보여준다면 성령의 감동은 성경에는 없는 좀 더 작은 부분까지 구체적으로 인도를 하십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미국을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면 성령님의 감동은 언제, 미국 어디를, 누구와 어떤 방법으로 가야 하는 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준다고 보면 됩니다.
지금은 성령님께서 믿는 사람들 속에 거하시며 인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도를 잘 받으려면 성령님의 감동을 잘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음의 소원입니다. 성령님은 주로 마음에 소원으로 우리들을 인도를 하십니다. 빌 2:13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이루시고 싶은 일이 있으시면 하나님은 먼저 우리 마음에 소원이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소원을 따라 움직이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꿈과 비전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과 비전을 위하여 땀 흘려 수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과 비전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을 잘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음의 주파수를 하나님께 맞춰야 합니다. TV 수신기를 mbc에 맞추면 mbc에서 보내는 방송을 볼 수 있고, kbs에 맞추면 kbs에서 보내는 방송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키고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받게 되고 마귀에게 맞추고 있으면 마귀의 영감을 받게 됩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영감을 받는 수신기입니다. 이 수신기는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 수신기는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전파를 잘 잡아내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영감을 주시면 우리 편에서는 순종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감동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가니 한 청년이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목사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도 다니지 않고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연히 이 길을 지나가다 교회를 보고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생겨 예배에 참석했는데,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이제 방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 청년은 교회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었습니다. 그 청년은 그 감동을 따라 행동했다가 하나님을 만났고 믿음이 회복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씀하십니다.
3. 설교로도 말씀하신다. 여러분! 설교란 무엇입니까? 설교를 설교학적으로 정의 하자면 다양한 답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설교란 설교자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경 본문을 풀어서 회중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가운데 설교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설교자를 통해서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전 12:11 말씀에 보면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여기서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설교를 말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 한 목자가 주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목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다. 설교는 사람이 하지만 그 설교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설교를 통해서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설교를 어떻게 들어야 할까요?
① 믿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살전 2:13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설교할 때 바울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신비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믿음대로 역사를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심플 웨이(Simple way)라는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마약 중독자, 노숙인들을 돕는 선교단체입니다. 이 단체를 이끌고 있는 분은 세인 클레어본(Shane Claiborne)입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돕고 싶어서 못 견디는 사람입니다.
그가 중남미로 선교하러 떠났습니다. 의약품을 가지고 가서 선교하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가지고 간 약이 설사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닥났습니다. 각종 병을 가진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고쳐 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리고 약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이들에게 할 수 없이 남은 설사약을 먹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무슨 병에 들었든지 관계없이 설사약만 먹여도 병들이 다 고침 받았습니다. 약이 고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면 된다는 믿음이 병을 고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설사약을 주어도 설사약이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런 사실을 [저항할 수 없는 혁명]이라는 책에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설교를 들을 때 믿음으로 들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② 아멘으로 화답하며 들어야 합니다.
신 27장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합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 중 일부 지파들은 그림심산에 서고 나머지 지파들은 에발산에 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레위인이 말씀을 선포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복의 말씀도 아멘으로 화답하며 듣고 저주의 말씀도 아멘으로 화답하며 들으라고 했습니다. 설교는 아멘으로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멘을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멘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고후 1:20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회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면 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아멘하여야 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하는 것은 하나님께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네”라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아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느 부흥사 목사님이 충청도 어느 도시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여자 집사님이 아멘을 너무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아멘을 한 번도 아니고 연속해서 두 번씩 “아멘. 아멘” 하였습니다. 너무 심하게 아멘을 하니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좀 방해가 되고 살짝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분이 강사목사님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목사님이 식사 중에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왜 그렇게 아멘을 열심히 합니까?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아멘, 아멘’ 두 번 연속해서 합니까?”
집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건축업을 하는 사람인데 어느 날부터 배가 아팠습니다. 그런데 정해진 기간 안에 건축을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에 배 아픈 것을 무시하고 소화제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이 아파서 병원에 가보니 위암 말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교회에 와서 하염없이 울면서 기도하는데 마음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지금부터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면 아멘으로 화답하리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멘을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아멘, 아멘’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얼마 지나면서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하다고 하던 병이 차차 낫게 되고 나중에는 완치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멘 아멘’ 하게 되었습니다” 부흥사 목사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그렇다면 내가 아멘을 중단시킬 수 없지요. 당신은 계속해서 ‘아멘 아멘’ 하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멘으로 화답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③ 내가 순종해야 할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성경지식을 쌓기 위해서 듣지 마시고 내가 순종해야 할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또 그 말씀을 남에게 적용하지 말고 자신에게 적용해서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이 됩니다. 하나님은 들어야 할 사람이 듣게 하십니다. 오늘 내가 이 설교를 듣고 있다면 이 설교는 이곳에 없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이곳에서 설교를 듣고 있는 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④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잡생각은 마귀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마귀가 역사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잡생각입니다. 집중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무엇이든지 세계적인 사람들은 집중력의 대가들입니다.
베토벤은 언제나 오선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길을 가다가도 악상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바로 그렸다고 합니다. 하루는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는데 음식을 주문하기도 전에 악상이 떠올라서 오선지에 막 그렸습니다. 종업원이 와서 “선생님, 무얼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어도 모른 채 그는 악보만 그렸습니다. 한참 후 자리에서 일어나 프런트로 갔습니다. “얼마예요?” “무얼 드셨습니까?”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 것 아닙니까?” 감을 잡은 종업원이 말했습니다. “오늘은 무료입니다.” 베토벤이 “고맙소.”하고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베토벤은 자신이 식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음악에 몰입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위대한 음악가, 베토벤이 된 것입니다.
차범근은 말했습니다. "나는 공이 너무나 좋다. 그래서 공을 찰 땐 공만 찼고, 공을 차지 아니할 때에는 공만 생각했다" 그의 마음은 오로지 공으로 가득 찼습니다. 집중하면 그것만 생각하게 됩니다. 설교는 집중해서 들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의 대리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대리자는 천사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특별한 경우에 천사들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대리자로 세우셔서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삼상 2,3장에 보면 엘리제사장은 제사장이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잘못된 삶을 돌이키라고 경고하시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셔서 엘리제사장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엘리 제사장은 돌이키질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셔서 엘리 제사장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엘리는 돌이키질 않았습니다. 결국 그와 그의 가문이 망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겸손해야 잘 들을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들어도 무시해버립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이 이것입니다. 사울은 범죄한 후에 사무엘을 통해서 책망을 받아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교만하다가 졸지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달랐습니다. 다윗이 범죄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셔서 다윗을 책망하시고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책망을 받을 때 겸손하게 반응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참회하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다윗을 축복하셔서 점점 강성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대리자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5. 신비로운 방법으로도 말씀하신다. 성경에는 신비로운 일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워낙 신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에 신비로운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왕상 19장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굴에서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지나가셨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먼저 크고 강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바람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 후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후에 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는데 그 소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역사상 어느 누구도 체험해보지 못했던 신비로운 방식으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가지고 온 기물들을 술잔으로 삼고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잔치가 진행 중일 때 갑자기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벽에 ‘메네메네데겔우바르신’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을 다니엘이 해석을 했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고,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고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대로 그날 밤에 갈대아 사람 벨사살왕은 죽고 매데 사람 다리오가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하루는 비극적인 여인을 심방하였습니다. 전염병에 걸려서 자녀 6명이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엎친대 덮친 격으로 남편이 바다에 나갔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그 집을 방문한 웨슬레 목사님은 할 말이 없었습니다.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있는 데 그 여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한 명 한 명 죽어가는 고통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도 같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가족 한 명 한 명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늘나라에 와 있으니 안심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는 안심하고 있습니다. 나의 관심사를 오직 하늘에 두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았습니다.” 놀랍습니다. 자녀 6명이 죽고 남편마저 잃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그녀를 소망 가운데 살게 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으로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음성으로도 말씀하시고 성령님의 감동으로도 말씀하시고 설교로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겨지는 다양한 방법들에 대해서 반드시 분별을 해야 합니다.
사극을 보면 가끔 왕이 먹을 음식에 혹시 독이 들었는지 테스트를 해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독이든 음식과 독이 들어있지 않은 음식은 모양이나 색깔을 통해서는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용하는 도구가 있습니다. 은수저입니다. 독이 든 음식에 은수저를 넣어보면 독으로 인하여 은수저에 변색이 일어납니다. 은수저에 변색이 일어난다는 것은 독이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그 음식은 먹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할만한 것들 중에는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하면 독이 든 음식처럼 보기에는 하나님의 말씀 같은데 실상은 마귀가 사망의 독을 타놓은 것들이 있습니다. 은수저로 독이 든 음식을 분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아닌 것을 분별하는 도구가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체험은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개인적인 영적 체험보다 더 확실한 것이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본문(벧후 1:19)에 보면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자신이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변화산에 올라가 체험했던 확실한 체험을 이야기 한 후에 한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따라서 산에 올라간 일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중에 변화 되셨습니다. 주님에게서 광채가 나고 옷이 희어졌는데 세상에서 어떤 방법을 써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잠시 후에 구름이 덮이더니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베드로는 놀라운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 체험은 환상이 아니라 실제였습니다. 그 체험은 너무나 확실한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확실한 체험을 말하고서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더 확실한 예언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 개인이 체험한 어떤 영적 체험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체험을 했어도 그 체험이 성경을 앞서지 못합니다. 아무리 엄청난 음성을 들었다하더라도 그 음성이 성경을 앞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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