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사도행전27:6~26
제목: 하나님의 사람이 함께 하면
2000년 11월 19일 주일 낮 설교: 설교자: 최일환 목사
27:9 여러 날이 걸려 禁食하는 節期가 이미 지났으므로 行船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行船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 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過冬하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과동하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 편은 동북을, 한 편은 동남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得意한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 14 얼마 못 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 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 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 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免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22 내가 너희를 勸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설교:
사람은 마음속에 소원을 갖고 삽니다. 그런데 그 소원중에는 욕심으로 만들어진 소원도 있으나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소원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13에보면"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심어주어 사람이 그 소원을 이루도록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평상시 로마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리라 생각은 하고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갈 기회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방문한 바울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다 소동이 일어나 바울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군대가 동원되었고 그때 바울을 체포하여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공회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던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이 있는 것을 천부장이 사전에 알게되어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케 되고 총독앞에서 재판을 받던 바울은 로마황제에게 상소를 하여 결국 로마로 압송되게 된 것입니다.
왜 무죄 석방 될 수 있었던 그가 일부러 상소를 했을까? 그 해답은 사도행전23:11에서 찾아야 합니다. 갇혀 있는 바울에게 주께서 오시여 말씀하십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셨습니다. 드디어 소원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로마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고 일부러 상소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군대가 호위하며 배 삯을 지불치도 않고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알고 보면 끌려간 것이 아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대 사도가 함께 하는 그 여행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 여행은 엄청난 풍랑을 만나 말로 표현키 어려운 고난과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왜 하나님이 허락하신 여행인데, 왜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있는 여행인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 사건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교훈을 살피며 은혜를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문제를 단순하게 바라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라는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봐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이 그때 그 장소에 있었는데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무엇을 교훈하시는 것일까요?
1.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 주의 종의 말을 聽從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중해 동편에는 금식절기인 9월 중순이 지나면 예상치 못한 태풍이 불어옵니다. 그것을 유라굴로 라고 하는데 엄청난 재난을 가져다주는 태풍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가급적 항해를 않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에 3번의 파선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곳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더욱이 바울은 영적인 직감으로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번 행선이 엄청난 어려움이 있을 것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설득을 합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行船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그런데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런 말을 하는 바울의 신분이 보잘 것 없는 초라한 모습이었고 더욱이 그는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재판을 하러 가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누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겠습니까? 바울을 호송하는 책임을 밑은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배의 주인이 가겠답니다. 배의 운항에 전문가인 선장이 가겠답니다. 그러니 누가 막을 것입니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 배의 사람들이나 백부장은 한가지는 몰랐습니다. 바울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라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이 얼마나 권세있는 말인가를 몰랐습니다. 그는 항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기에 그가 남이 갖지 못한 영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치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종들을 외모로 판단하면 그는 엄청난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전혀 믿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습니다. 외관상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또 메시야는 구약성경에 베들레험에서 태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나사렛 출신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으로 온 것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실수를 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대머리였습니다. 열왕기하 2장 23절에 보면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조롱을 합니다. 그런데 무서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이들이 하나님의 종을 대머리라고 조롱한 후 산에서 암콤이 뛰어나와 40명의 이이들을 죽여 버립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종을 외모로 판단하고 비방한자의 결과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그 누구도 사람이기에 실수와 허물이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라도 실수와 허물이 있고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솔직히 세상 돌아가는 물정은 잘 모릅니다.
그렇다고 외모로 은근히 무시하거나 그의 말을 무시하면 그것은 엄청난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뭐를 물어보면 "몰라도 되요"하고 제껴 놓으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요, 기도하는 종들이라면 그의 의견을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 결정해 놓고 물어보지 말고 시작하기 전에, 결정하기 전에 과연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인지? 목사님의 생각은 어떤지를 물어보셔야 합니다. 아무 것도 몰라도 영적인 문제가 걸려있기에 물어보고 결정할 때 실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게중에는 다 결정 해놓고 이것 위해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라고 강요하는 분도 계십니다. 다 결정 되었으니 이제 와서 하지 말라고 하면 찝찝할 것이고 어쩝니까? 그냥 기도하겠습니다. 대답할 수 밖에요? 그렇다고 사사건건 물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가사, 중요한 정책, 중요한 문제는 가지고 와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함께하는 자의 복입니다.
2. 環境만 바라보고 따라가면 모든 것을 다 잃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는 선장과 선주의 말대로 출항을 했습니다. 왜요? 현재 머물고 있는 美港보다는 베닉스 항구가 겨울을 나기는 더 편하고 장사로 수익을 더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도 그들의 결정이 옳은 것처럼 남풍이 순하게 불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 유라굴로 광풍이 닥쳐왔습니다. 배를 정면으로 향하여 불어오니 도저히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뒤 돌아갈 형편도 아니였습니다. 결국 바람 따라 흘러 흘러갔습니다. 고생고생 끝에 겨우 땅에 닺을 내려 떠내려가는 것은 막았으나 암초에 걸릴까 두려워 배의 하물을 다 바다로 버리고 심지어는 배의 기구까지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돈이고 寶物이며 財産인데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다 버려야 했습니다. 20절의 말씀을 보세요. 구원의 여망이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왜 그들이 이지경이 되었습니까? 당장의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힌 선장과 선주의 어두운 판단, 그를 신뢰했던 백부장의 실수가 이런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뭔가를 決定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결정하십니까? 어떤 사업을 해야 할까? 이것을 할까, 저것을 할까의 결정 기준은 무엇입니까? 또 예를 들어 이사를 할 때의 결정 기준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당장의 利益이나 環境을 보고 결정한다면 그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할까요?
우리의 행동, 우리의 앞길을 결정 할 때의 그 기준은 3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1)하나님의 영광이고 2)교회의 덕 3)신앙의 유익입니다. 어떤 것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되느냐? 어느 것이 말씀에 더 합당한가? 어떤 것이 주를 더 잘 섬길 수 있는 길인가가 결정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當場의 이익, 눈앞의 환경만을 바라보면 분명 실패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좀 힘들고 좀 어렵더라도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라면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게 유익하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에 방해를 받는 것이라면 포기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3. 죽을 것 같은 狀況속에서도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22절~25절)
"내가 너희를 勸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은 다 망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그리고 더 이상 소망을 얻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람에게 찾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너희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을 것이다. 어제밤에 하나님이 내게 말씀해 주셨다. 내가 로마에 가서 가이사 앞에 서야 하고 너에게 너와 함께한 276명을 다 네게 주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메시지가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격스런 소리가 되었을까요? 이 말 한마디는 소망이고 빛이였습니다. 지프라기라도 잡으려 하는 그들에게 놀라운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나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어디서나 동행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아니 달라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누굽니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세상을 항해 이런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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