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요한복음19:1~16
제목: 다시없을 희한한 재판
2001년 2월11일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19:1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19:2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19:3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19:4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19:5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19:6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19:7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19:8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19:9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9:10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9: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19:12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9:13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19:14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9:15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하소서, 없이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9: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 주니라
설교:
법원에 가면 재판을 방청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1)다양한 죄인이 있다는 것, 2)판사의 권위가 상당하다는 것, 그러나 저는 사람의 재판이 사람이기에 실수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보지만 한편으로는 자기들의 이익을 앞세우고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매사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총독에게 재판을 받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빌리도 총독의 법정은 재판관은 빌라도이고 원고는 대제사장과 장로와 서기관들이고 피고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재판이 참으로 이상합니다. 분명히 재판장인 빌라도가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판결은 뒤집어져 사형으로 재판이 끝이 납니다. 분명 판사는 피고 예수를 심문해 보니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사형입니다.
참으로 희한하지요? 판사가 죄가 없다고 3번이나 선언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18장 38절에서, 그리고 19장4절과 6절을 보면 분명히 죄를 찾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방청객들인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하며 소리를 지르자 판결이 뒤집어 집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깊이 연구해 보면 몇가지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사형을 받게 된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1. 종교지도자들의 무지와 탐심 때문입니다.(6절)
예수님 당시에 종교지도자들, 그들은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엄청난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너무 무지했습니다.
종교 지도자,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시는 메사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너무 무지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가 어디서 태어나며 어떻게 오실 것이며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잘 알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사야 53장을 몰랐습니다.
자기들의 생각에 메시아가 그렇게 초라하게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시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메시야를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선 것입니다. 무지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님을 그렇게 가까이 본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메시아입니다. 다윗도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예수님, 그 예수님을 보고도 섬기지는 못할 망정 죽이는데 앞장서다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왜 그렇게 했습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가 무지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또 성경을 알되 잘못 알았기에 이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혹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딴에는 하나님을 위한다 하는데 실상은 잘못 알고 잘못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둘째가 종교 지도자들의 세속화입니다. 제사장은 영적 지도자인데 전혀 영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어찌하든지 예수를 죽이려 합니다. 빌라도가 무죄라고 석방시키려 하자 사람들을 동원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지르게 합니다. 권모술수를 동원합니다.
또 15절을 보면 빌라도가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하자 대제사장들이 대답하기를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엄청난 아부입니까?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람들이 전능하신 왕, 창조주이신 우리 왕을 버리고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합니다. 얼마나 기막힌 모습입니까? 이것을 세속화라 합니다. 영성을 잃은 종교지도자, 참으로 무서운 모습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화 된 성도는 예수를 대적하는 일에 쓰임을 받을 위험이 있습니다.
셋째로 그들은 탐심에 눈이 어두워진 자들입니다. 자기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자를 제거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들이 성전에 장사꾼들과 결탁하여 챙기는 각종 이권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제사장들에게는 예수는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이는 일에 앞장섭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로만 삽니다. 그러나 그런 자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며 믿음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찌하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가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혹시 그의 모습이 우리 속에는 없습니까? 혹 우리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무지하여, 탐심에 이끌려, 또는 명예욕에 눈이 어두워 세속적인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렇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2. 빌라도의 정치적 술수입니다. (10절)
빌라도는 총독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가 관할하는 지역의 치안과 안정을 유지하여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한사람 때문에 예루살렘이 소란스럽게 되자 총독이라는 자리유지에 치명적 손해가 될 것 같았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이 고소한 예수를 재판함에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잘못되면 폭동이 일어나 총독의 정치적 능력에 의심을 받을 수 있게 되는 상황이 닥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재판을 맡게 되었는데 아무리 예수를 심문해 보아도 죄가 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신을 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정의에 편에 서자니 여론의 저항이 있게 되겠고 그렇다고 사형 판결하자니 양심에 찔립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그는 명절에 죄수하나를 석방하는 관례를 이용하여 예수를 석방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못하자 예수를 정치적 반란사건의 주범자로 처리하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묻기도 하고 결국 십자가 죄패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써 붙었던 것입니다. 이는 이중 효과를 보게 되는데 하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소원대로 예수를 처형해 주는 것이 되고 둘째는 정치적 반란 사건의 진압으로 정치적 공로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빌라도는 일석이조를 노리는 모략가였습니다. 그는 정치적 머리가 비상한 사람으로 교묘하게 자기의 유익을 추구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빌라도 같은 사람이 받을 형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대에 아주 중요한 지역을 통치함으로 하나님의 이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런 정치적 술수와 야망 때문에 돌이키기 어려운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오늘날도 사도신경에 기록되어 예수님을 죽인 자로 그 이름이 불려지고 있습니다.
유명한 사람은 되었으나 아무도 그의 이름을 본받지 않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바울, 야고보, 요한, 모두가 남에게 덕을 세우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쓰나 빌라도 이름은 본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자신의 출세 길로 이용치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보려는 계산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는 승진하기 위해 사장이 믿는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선거에서 기독교인들의 표를 얻기 위해 예수 믿는 것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술수를 쓰지 마세요, 사람은 속일 수 있으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겸손히 정직하게 살아가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내 이익을 위해 정의 길을 포기하는 빌라도 같은 사람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이익에 눈이 어두워 가장 중요하신 예수를 헌신짝처럼 버리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오늘날 빌라도 같이 계산이 빠른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정말 중요한 신의도, 믿음도, 사랑도 다 버립니다.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한가지 더 살펴봅니다. 왜 예수님이 사형을 당하셨나요?
종교지도자들의 탐심, 빌라도의 정치적 술수, 이런 모든 것들이 예수를 죽음으로 내 몰았으나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3.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대제사장과 그 일당, 그리고 정치적 계산이 맞아떨어진 빌라도, 그들에 의해 예수님은 비참하게 죽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면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분 같이 보이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약속대로 이루어진 대속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죽음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당한 개죽음이 아닙니다. 창세기 3:16절의 말씀을 성취하는 죽음이요, 구약에 대대로 흐르는 죄 속함의 은총을 완성하시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의 속죄가 필요치 않는 구원의 완성 사건이었습니다.
참으로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희한한 재판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공로자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죄 없는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에 당연한 형벌을 받게 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 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혹 무지와 탐심으로 예수를 대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탐심과 욕심을 채우려고 예수를 이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이익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앞세우면 반드시 그 길은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면 주님이 우리를 존귀케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를 위해 살면 주께서 나를 위해 일하시고 내가 나만을 위해 살면 주님은 우리를 구경만 하고 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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