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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최일환목사

[스크랩]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요20:19~29/2001년 3월 11일

성경: 요한복음20:19~ 29

제목: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

2001년 3월11일 주일낮 설교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0:24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0: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0: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설교:

제가 신학을 할 때 고등학교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교회는 다니지만 천국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 친구였습니다. 자기는 천국, 지옥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왜 교회 다니냐 물으니 좋은게 좋으니까 다니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제가 천국을 믿으라, 천국과 지옥은 반드시 존재한다 설명을 해도 가보기 전에는 안믿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마디하고 말았습니다.

"그래! 네가 가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니 하는 수 없지,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알아라, 가보고 믿으면 이미 그때는 믿어봐야 소용없는 때라는 것을 알라" 했습니다. 사실 그 친구는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3년씩이나 주님을 따랐음에도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장차 부활할 것을 여러 번 예언하셨음에도 그를 믿고 있던 제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저도 목사로서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된다"고 가르쳤는데 오늘 죽어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가 물어보면 손을 못드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답답 한지요?

하물며 예수님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의심을 물리치게 하시고 주님의 부활을 확신케 하십니다.    

주님은 3년이나 따라다니며 배웠는데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이게 "믿음 없는 자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 주님의 열심히 오늘 이 자리에 나온 저와 여러분에게도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의 열심이 의심 많은 도마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세워 굳게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씀 중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구절이 있습니다.

2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가? 그 의미를 생각하며 함께 은혜를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이 있는가 ?

1.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이란 존재는 육으로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라는 뜻이 무엇입니다.

영은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단순히 우리 사람처럼 존재하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생기란 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육을 입은 사람에게 영혼이 있는 것입니다.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하나님은 당신을 보여 주시기 위해 예수님을 인간으로 입게 하여 내보내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속에서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눈에 안보이는 영이신 분을 보는 것으로만 믿는다면 어떻게 복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주님이 도마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중에는 이런 소원이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천국을 한번 가 보았으면" 하는 분, "내 눈으로 예수님을 한번만 보았으면" 또는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어보았으면... 하는 소원이 있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예수를 믿지 못할 자가 누구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굳이 어려운 방법으로 전도 할 필요가 무엇일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설사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정말 믿을까요? 그래도 안믿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교훈을 통해 하신 말씀을 보세요.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할지라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이신 하나님을 보고 믿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마치 개미가 인간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해가 안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정상입니다.

삼위일체가 왜 이해가 안되는 줄 압니까? 그것이 육을 가진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기에 오히려 보지 못하였을지라도 약속을 믿는 그 믿음이 복 있는 믿음인 것입니다.

 

왜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복인가요?

2.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그 숨이 무엇일까요? 그냥 우리가 말하는 "후"하고 부는 입김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을까요? 그 시점에서 만나자마자 첫마디가 성령을 받으라 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입니다. 우리가 주를 믿는 그 믿음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하고 성령으로만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말마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믿게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며 믿으라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까? 어떻게 믿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믿어집니까?

예수님의 재림도 믿습니까? 어떻게 믿어집니까? 현대 과학이나 경험으로는 말도 안되는 사실을 어떻게 믿냐구요?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믿어집니다. 그리고 확신합니다. 어떻게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 믿게 하시는 영이며 깨닫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그 영으로 믿어야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였지만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믿는 자가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성도의 구원 사역에서 절대적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거듭나게도 하시고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도 하십니다. 또한 우리를 세상과 구별되게 만드시기도 하십니다.

그러기에 보지 못하였으나 만져 보지 못하였으나 성령의 강권적 역사로 주를 믿게 되고 그를 위해 목숨 바쳐 살게 됩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고도 예수를 믿는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는자이기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왜 보이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는가?

3. 체험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약속중심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TV에서 요즘도 하는지 모르겠으나 "체험 삶의 현장"이란 프로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정부 고위 관리, 유명 인사, 탈랜트, 방송인들이 공장, 농촌, 어촌등에서 고생하며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수고를 나누며 거기 얻은 수익금의 일부를 불우 이웃 돕기에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저는 그 프로를 볼 때  한편으로는 그들이 고생하는 것이 재미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은근히 화가 나곤 합니다.

그들이 하루 고생 고생하여 일하여 번 것을 불우이웃 돕기라고 내놓는 것이 맘에 안듭니다. 사실 그들은 그곳까지 일하러 가는 경비가 더 듭니다. 그럼에도 몇 만원 품삯을 구제한다고 내놓는 것이 맘에 안듭니다.

또 하나 그러나 정말 그들이 카메라가 찍지 않아도 그런 곳에 갈 수 있을까? 방송되지 않아도 그렇게 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정말 체험을 해 보지 않고는 모르기에 그렇게 나서서 얄뺙한 동정을 하는 것일까? 게중에는 하루 출연료만해도 몇백씩 받는 사람들이 그 몇만원 내놓기 위해 그렇게 고생하는 것일까 생각하면 은근히 화가 납니다.  

그래도 긍정적 시각으로 그들을 봅니다. 체험을 통해 그들을 배우고 알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사람은 체험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능력을 판단할 때 경력이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경험, 체험, 지식, 이와같은 것은 강력한 힘을 소유하기도 했으나 그러나 실상 인간은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갖습니다. 금방 잊어 버립니다. 언제 그랬냐 싶게 돌아섭니다. 그러기에 체험과 한계는 믿을 대상이 못됩니다.  

인간의 체험은 시간에 따라, 환경에 따라 다르게 느껴집니다. 또 수시로 변합니다.  

 

제주도에 가면 제주 남제주군과 북제주군을 연결하는 언덕길이 있는데 분명 차를 중립으로 세워 놓았을 때 뒤로 올라갑니다. 뒤쪽이 높고 앞쪽이 낮아 보이는데 차는 높은 쪽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내려서 자세히 봅니다. 분명 우리 눈에는 앞쪽이 낮은데 차는 뒤로 미끄러져 갑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재보면 앞이 높고 뒤가 낮은 것이 들어 납니다. 옆에 있는 언덕이 길과 나란히 있어 착각하게 하는 역할을 한답니다.

사람의 판단은 이렇게 환경이나 감정에 의해 변화를 이룹니다. 확실한 체험도 시간이 흐르면 흔들립니다. 그래서 인간의 체험이나 경험을 토대로 한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어느 기도원에 수많은 암 환자들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치료되는 이도 많답니다. 그런데 그 치료된 사람들이 믿음을 오래 지켜내지 못합니다.

왜요?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사람의 경험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로 오염되어 모둔 부분이 부패하고 타락 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실상 어느 한구석도 온전히 믿을 것이 못됩니다.

 

건강? 믿을 것이 못됩니다. 큰소리 치지 마세요?

재물? 역시 믿을 것이 못됩니다. 가족, 친구, 부모, 자식, 왜 그들을 의지합니까? 수없이 속는 모습을 보아 왔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을 분은 오직 한 분입니다. 오직 주님이시며 그분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보고 믿는 것은 유치한 신앙입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그림이 많은 책은 유치부 어린이 책입니다. 그러나 점점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그림은 없어지고 글만 있게 됩니다.  

 

벧전1:8 9절에 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신앙의 체험, 경험,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의 기초가 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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