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2) (눅2:41-51)
눅2:41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눅2:42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눅2: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눅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눅2: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눅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2: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눅2: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님은 누구이시며(identity),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mission)?”
이는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 전체의 중심이 되는 주제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은 이를 예언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반면에 신약성경은 이를 성취적으로 밝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도 예외는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신분과 예수님의 사명을 계속해서 증거했습니다. 예컨대 누가복음 1장과 2장에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여러 증인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맨 먼저 등장한 증인은 제사장 사가랴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었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도 예수님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베들레헴 인근에 있는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도,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시므온과 안나도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사람들만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천사 가브리엘도,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앞에 나타났던 천사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친히 이렇게 증거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이와 같이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서, 천사들에 의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증거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중요한 한 가지 증거를 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증거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열두 살 되셨을 때의 일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시며, 자신이 하셔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밝히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신분과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아셨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이미 오늘 본문의 전반부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간단하게 요약을 해봅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셨을 때,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정해진 기간을 다 마친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홀로 예루살렘에 남으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룻길을 다 간 후에야,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흘 후에야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선생들 중에 앉아서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에 대해서 크게 놀랐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지난 주일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계속해서 오늘 본문 하반부의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매 절 말씀을 한 대지로 삼아서, 모두 네 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부모의 반응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Parents' Response).
눅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1) 부모의 놀람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바로 앞 절인 47절에서 예수님은 성전에 있던 선생들을 놀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고 또 놀랐습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의 놀람은 선생들의 놀람과는 성격이 달랐을 것입니다.
선생들은 불과 열두 살밖에 되지 않으신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그것 때문에 놀랐다기보다는, 그 때 예수님이 너무나도 태연하신 모습으로 선생들 중에 앉아 계신 것을 보고서 놀랐을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과 마리아는 자기들이 예수님을 애타게 찾고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자기들을 애타게 찾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들의 행방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듯 보였습니다.
또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차있었을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에게 어떤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몸이 병들지는 않았을까, 또한 숙식문제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이런 등등의 근심이 끊이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일에도 전연 관심이 없으신 듯이 보였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은 선생들과 성경을 논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계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 동안 당황하던 자기들의 모습과는 달리 너무나도 태연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놀랐을 것입니다.
(2) 모친의 원망
예수님은 온전하신 분이시기에, 예수님은 언제나 사려가 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책임이 있는 행동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는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전연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들의 기쁨만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근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마치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근심을 끼치셨던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하여 원망스러운 듯이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물론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에 홀로 남으셨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에 근심을 끼치러 드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요셉과 마리아를 무시하거나, 그들을 거역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으셨습니다.
단지 예수님은 이번 일을 통해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한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들의 아들이기에 앞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셔야 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깨우쳐주시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사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부터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요셉과 마리아는 자기들과 예수님 사이에 성립된 인간적인 관계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깨어져야 할 일시적인 관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잠시라도 잊지 말아야 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그들 사이의 인간적 관계는 앞으로 십팔 년 뒤, 그러니까 예수님이 삼십 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온전히 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번 일을 통해서 그와 같은 사실을 미리 분명하게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3) 원망의 이유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마리아는 이와 같이 자신이 예수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사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기까지 계속해서 큰 근심에 싸여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마리아는 칼이 그의 가슴을 찌르듯 하는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눅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성전에서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예언적으로 했던 말씀이었습니다. 과연 시므온이 예언한 대로, 마리아는 이번에 칼이 그의 마음을 찌르듯 하는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이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눅8:19 예수의 모친과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를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눅8:20 혹이 고하되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섰나이다
눅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이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는 또다시 칼이 그의 마음을 찌르듯 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의 모친 마리아를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모친 마리아를 온전하게 사랑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은 이와 같이 의도적으로 마리아를 계속해서 멀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할 사명이 있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선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한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왜 요셉과 마리아가 근심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행여 우리도 예수님을 잃고서 근심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다시 만나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주인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어떠한 형편에서도 평온함을 잃지 아니하십니다. 평강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늘 우리 마음에 모시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때마다 일마다 늘 평안함을 누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서 살펴봅니다(Jesus' Reply).
눅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이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맨 처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아울러 이는 예수님이 공생애 이전에 하신 말씀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성경에 남아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 예수님의 놀라심
요셉과 마리아는 사흘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 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선생들 중에 앉으신 것을 보고서는 놀랐습니다. 그들 못지 않게 예수님도 그들을 보시면서 놀라셨을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은 그들이 나사렛으로 내려가지를 않고,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다는 사실에 놀라셨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이 지금까지 계속하여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찾았다는 말을 듣고서 더더욱 놀라셨을 것입니다.
사실 요셉과 마리아는 이미 여러 증인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분과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증거들을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분명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를 몰라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행여 예수님에게 잘못된 일이라도 생기게 될까봐,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아마도 놀라운 듯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나를 찾지 않으셔도 되는데, 나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왜 이렇게 힘들게 나를 찾아오셨나이까?”
그러면서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신분과 예수님의 사명을 다시 한번 더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어조는 부드러우면서도 분명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공손하면서도 단호했을 것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 자신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스스로 증거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있어야 마땅함을 밝히심으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스스로 증거하셨습니다.
사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의 일시적 부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영원하신 아버지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또한 나사렛에 있는 집은 예수님의 일시적인 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영원한 집은 성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는 하나님이신 것을 잊으셨나이까?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내 아버지의 집인 성전임을 잊으셨나이까?”
(2) 예수님의 신분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하늘과 땅의 여러 증인들에 증거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신약성경의 모든 기자들에 의해서도 증거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마귀도, 귀신들도, 안 믿는 불신자들도 이 사실을 증거했습니다.
눅4: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귀 = 사단)
눅4: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귀신들)
마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백부장과 군인들)
그러면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낳으셨다는 뜻입니까? 그 결과 그 때부터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이러한 개념은 결코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신 적이 단 한번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아들”의 개념은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이라고 할 때, 우리는 “낳다, 출생하다, 시작하다”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동등하다, 같은 수준이다”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막3: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행4: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권위자)라 하니(勸慰子 = 권위의 아들 = the Son of Encouragement)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우뢰라고 불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성질이 바로 우뢰와 같다는 뜻입니다.
또한 사도들은 요셉을 바나바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는 권위자(勸慰子), 곧 “권위의 아들”입니다. 이는 요셉의 부모가 “권위”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권면과 위로를 잘 하는 사람, 곧 권위의 대명사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아들”이라는 말의 개념은 출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들은 “동등하다, 똑같은 수준이다”라는 의미로 “아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요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요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이와 같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 자신의 신성, 곧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참람한 말을 했다고 신성모독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저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는 그 자신들이 참람하고 말았습니다.
(3) 예수님의 사명
요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서 하셔야 할 사명이 있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뜻을 행하셔야 했고, 또한 언제나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셨습니다.
눅2:49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must)
눅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must)
눅9:22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must)
눅13: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must)
이와 같이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여야 하리라, 하여야 하리라”(must)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성전에 있어야만 한다는 말씀도 예수님의 사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시는 자신의 사명에 삶의 최우선순위를 두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계셨던 것도,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신 것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도 다 사명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우리의 사명에 삶의 최우선순위를 두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일보다도 하나님의 일을 먼저 구하기를 바랍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이나 불안정한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시며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부모의 깨닫지 못함입니다(The Parent's Lack Of Understanding).
눅2: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1) 예수님의 지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유월절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고, 그 피가 제단에 뿌려지는 것을 보시면서 과연 무엇을 보셨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져야 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라는 사실을 밝히 보셨을 것입니다. 아울러 앞으로 약 이십 년 후에는 바로 자신이 이곳 예루살렘의 갈보리 언덕에서 붉은 피를 흘리시고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도 밝히 내다보셨을 것입니다.
물론 아직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 앞에서, 또한 그곳에 있던 선생들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분과 사명을 밝히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2) 인간의 지혜
사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방 박사들의 내방도 받았습니다. 그 뒤 그들은 헤롯 임금의 박해를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헤롯이 죽은 후에, 그들은 나사렛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나사렛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한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지난 십이 년 동안 예수님이 살아오신 온전하신 삶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예수님이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셔야 하는지 밝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간단한 말씀의 뜻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느라고 너무나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려고 들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얼른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를 떠나서, 다시금 나사렛으로 되돌아가기만을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지혜는 상황에 따라서 수시로 바뀝니다. 요셉도 마리아도 인간이기에, 그들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눅9:45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 못하였나니 이는 저희로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 또 저희는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눅18: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와 같이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점차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확실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시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떠한 일을 하셨는지 분명하게 알고 분명하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런데 우리가 인간의 지혜로는 생명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지혜를 풍성하게 받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날마다 자라가며,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위에 확고하게 서서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이루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효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Jesus' Duty To His Parents).
눅2: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1) 나사렛으로 내려가신 예수님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많은 선생들도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사역에 적절한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에 머무시기를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를 따라서 나사렛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육신의 부모님에 대한 책임을 다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삶의 최우선순위를 하나님의 일에 두셨지만, 예수님은 부모님에 대한 효도의 의무도 결코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2) 부모를 순종하여 받드신 예수님
예수님은 지금까지 십이 년 동안 그 부모 요셉과 마리아를 순종하여 받들어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 이후 자신이 공생애를 시작하는 삼십 세가 되시기까지, 십팔 년 동안도 변함없이 그들을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흠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우리와 똑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결점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이 없으신 예수님은 흠투성이의 부모를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눅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삶의 최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뜻에 두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마땅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 부모를 순종하여 받드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부모와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마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부모에게 효도하시는 모습은 예수님의 뒤에 태어난 여러 명의 동생들에게도 귀한 본이 되셨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모님에게 효도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에게 날로 사랑을 받는 복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말씀을 마음에 간직한 마리아
오늘 본문은 이렇게 끝맺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물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 당시로서는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우리의 태도도 이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우리의 지혜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맙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마음에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비록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말씀들을 밝히 깨달아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가 마음에 간직한 바로 그 말씀이 우리 발의 등이 되고, 우리 길의 빛이 되어서 우리를 지키시며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부모 된 이들은 요셉과 마리아처럼 자녀들에게 늘 경건한 삶의 본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녀 된 이들은 예수님처럼 늘 자신의 부모님에게 효도하며 순종하여 받들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늘 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물댄 동산처럼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으로 가득 찬 축복된 가정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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