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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1) (눅2:41-51)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1) (눅2:41-51)


눅2:41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눅2:42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눅2: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눅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눅2: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눅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2: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눅2: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열두 살 되셨을 때, 예수님에게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소년 시절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유일하게 예수님이 공생애 이전에 하셨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눅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눅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말하자면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부터 예수님이 열두 살 되실 때까지의 모습이 눅2:40의 한 절 말씀에 요약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열두 살 되셨을 때부터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던 삼십 세까지의 모습이 눅2:52의 한 절 말씀에 요약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두 절 말씀으로 그저 간단하게 요약했습니다. 단지 오늘 본문만 예외적으로 예수님의 소년 시절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오늘 본문의 내용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에 중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우선 예수님이 열두 살 되실 때까지의 삶과 모습이 어떠하셨는가를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눅2:40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삶과 모습을 네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자라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자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10개월을 자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태어나셔서, 똑같은 방식으로 자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자라셨습니까? 예컨대 예수님은 첫 사람 아담처럼 아예 처음부터 성인으로 오셔서, 얼른 십자가만 지시고 다시금 하늘 나라로 되돌아가시면 안 될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가 받는 시험을 똑같이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이기셨기에,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를 쉽게 시각적으로 설명하면 이러한 뜻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마치 우리인 것처럼 예수님을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 된 삶을 사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심판하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마치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예수님의 온전한 삶을 산 것처럼 우리를 대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성장하셨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강하여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체적으로 강하고 튼튼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열두 살 때에 어른들의 별다른 보살핌이 없이도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의 멀고도 힘든 여행을 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막6:3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목수의 일을 하셨을 것입니다. 목수가 하는 일은 정신 노동이 아니라 힘든 육체 노동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신체적으로 잘 단련이 되셨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언제나 마음도 튼튼 몸도 튼튼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먼길을 걸어다니시면서 사역을 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주 밤을 새워 기도하실 만큼 신체적으로 강건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지혜가 충족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지혜가 충족한 예수님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살 때에,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던 선생들 가운데 앉으셨습니다. 그 때 선생들조차도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을 기이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자라나시면서, 하나님의 지혜는 점차로 예수님에게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셨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게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이 하셔야 될 사명이 무엇인가를 밝히 깨달아 아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열두 살이 되셨을 때에,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보시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일을 생각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 위에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들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 위에 있었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

이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예수님을 보시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예수님을 기뻐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은혜는 이와 같은 의미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님 위에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눅4:22에 기록된 말씀처럼, 예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도 늘 은혜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삶 자체도 은혜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영원토록 본받아야 할 분이십니다. 특별히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의 자녀들 모두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모습과 삶을 그대로 본받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이주일을 맞이해서, 오늘 본문의 상반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어버이주일을 맞이해서, 오늘 본문의 나머지 후반부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Jesus' Going Up To Jerusalem)


눅2:41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눅2:42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1) 유월절(逾越節, the Passover)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지켜야 할 삼대 절기가 있었습니다.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이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고 난 뒤에, 이스라엘의 모든 성인 남자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삼대 절기를 지켰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하여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장자와 짐승들의 처음 난 것들을 치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서 어린 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피를 집 문에 발랐습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러왔던 죽음의 사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집 문에 칠해진 어린 양의 피를 보고서 그 집은 넘어갔습니다.

바로 이 때의 일을 기념하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이라는 말이 “넘을 유, 넘을 월” 곧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영어로도 “pass over"를 합친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 고기를 불에 구워서 먹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칠일 동안 무교병(無酵餠), 곧 누룩이 없는 떡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무교절이라고도 불리어집니다.


(2) 예수님의 부모

로마 시대의 유대인들은 대개 남자가 15세, 여자가 13세에 결혼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십대에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첫 아들 예수님이 열두 살 되셨으니까, 그들은 20대 중반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당하면, “해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살 되셨기 때문에, 그 해만 특별하게 올라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십이 년 동안, 가끔씩 올라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이 되면, 해마다 어김없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물론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남자인 요셉은 필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인 마리아는 의무적으로 올라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부부는 유월절이 되면, 해마다 언제나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 이후에,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계속 자녀들이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을 떠나서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까지 갔다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빠짐없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눅2: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눅2: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눅2: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예수님이 탄생하신 지 팔 일이 되었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지 40일이 되었을 때,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정결례와 헌신례를 행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율법에 명한 대로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유월절이 되면 어김이 없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진실로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키며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경건한 가정에 하나님이 아기 예수님을 맡기신 것은 전혀 놀라울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과 마리아처럼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 앞에서 경건한 삶의 본을 아름답게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의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신앙적인 삶을 살며,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받아 귀하고도 훌륭하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3)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남자가 열세 살이 되면, “바 미츠바”(bar mitzvah)라고 불리어집니다. 이는 우리말로 “계명의 아들”(a man of the commandment)이라는 뜻입니다. 이 때부터 남자는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켜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대개 자기 아들이 열세 살이 되기 한 해 전에, 자기 아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함께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교육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그 다음해부터는 아들 스스로가 유월절을 지킬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예수님은 열두 살 때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유월절을 지키셨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성전의 제사장이 예수님의 가족을 위해서 어린 양을 잡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셨습니다.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고 그 피가 제단에 뿌려지는 것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이시며 또한 자신의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를 밝히 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 이 세상 모든 죄를 짊어져야 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심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약 이십 년 후에는 바로 그 곳 예루살렘에서,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붉은 피를 흘리시고 죽어야 하실 것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월절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고, 그 피가 제단에 뿌려지는 것을 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분명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뒤로 그 때의 생생한 체험을 잊지 않으시고, 늘 마음에 깊이 간직하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도 어릴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꿈을 품고 살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자녀들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 품은 꿈들을 다 이루는 복되고 보람된 삶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예루살렘에 남으신 예수님(Jesus' Stay Behind In Jerusalem)


눅2: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눅2: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눅2: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1) 그 날들을 마치고

본시 유월절은 칠일 동안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오고가는 데에만도 많은 날들이 소요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 가운데는 예루살렘에서 이틀 정도만 머물고, 서둘러 그곳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기간 칠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충실하게 예루살렘에서 다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요셉과 마리아의 경건한 삶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돌아갈 때에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직선거리가 약 120km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은 그 가운데 있는 사마리아 지방을 거쳐서 가기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단강 동편으로 둘러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렇게 되면 150km는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하루에 40km를 걸어간다고 해도, 나흘 정도가 소요되는 여행길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도 나흘 길을 걸어서 갔습니다. 이제 다시금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길도 역시 나흘 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3) 예루살렘에 머무신 아이 예수님

우리말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아이 예수”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열두 살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아이 예수”(the child Jesus)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소년 예수”(the boy Jesus)라고 번역해야 옳을 것입니다.

아무튼 요셉과 마리아는 유월절 모든 기간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떠나서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를 따라서 나사렛으로 내려가시지를 않고, 그대로 예루살렘에 머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더 이상 예수님은 가난한 시골 동네에 살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었습니까? 더 이상 힘든 목수의 일을 하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번 일을 통해 요셉과 마리아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번 일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셔야 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요셉과 마리아에게 분명하게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4)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예루살렘에 홀로 남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당연히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일행 중에 함께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요셉과 마리아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동안 모든 면에서 사려가 깊으셨고, 언제나 책임 있는 행동만 하셨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은 언제나 있으셔야 할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전연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는 이번에도 당연히 예수님은 나사렛으로 돌아가는 일행 가운데 함께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요셉과 마리아의 시임은 두터웠던 것입니다. 


(5)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그 당시에는 유월절을 당하면, 온 동네가 함께 모여서 단체로 여행을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축제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들은 여행 비용도 줄일 수가 있었을 것이고, 또한 여행의 안전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벳새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것도 여자와 아이를 제외한 어른 남자의 수만 오천 명이었습니다. 그 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습니까?


요6: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그들은 유월절을 맞이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순례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유월절이 되면,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큰 떼를 이루어서 함께 여행을 했습니다. 이번의 경우에도 분명 수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동행했을 것입니다.

보폭을 잘 맞추기 위해서, 언제나 여자들이 아이들과 함께 앞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그 뒤를 따랐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예수님이 마리아와 함께 앞에서 걸어갈 줄로 생각했을 것이고, 마리아는 예수님이 뒤에서 요셉과 함께 따라올 줄 생각했을 것입니다.


(6) 하룻길을 간 후

예루살렘에서 나사렛까지는 나흘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곧장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서 가지 않고, 요단강 동편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높은 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요단계곡을 따라서 요단들쪽으로 내려갔을 것입니다.

하룻길을 간 후 저녁이 되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한 후 잠자리에 들어야 했습니다. 그 때는 가족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그 때야 비로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7)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요셉과 마리아는 아마도 예수님이 자기들의 일행 중 그 누군가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사랑스러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자기들의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예수님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물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걱정이 되어서, 식사를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날밤 그들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을 것입니다. 


(8)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어두운 밤에는 여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벽 일찍이 일어나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행여 예수님이 뒤에서 따라오는 다른 행렬 가운데 계실 줄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예수님에 대해 수소문을 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9) 교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지를 않으셨습니다. 행여 우리도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를 않건만,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다시금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예수님과 멀어지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봅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되찾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잠시도 놓치지 않고, 언제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성전에서 만난 예수님(Jesus' Being Found In The Temple)


눅2: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2: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1) 사흘 후에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을 향하여 하룻길을 내려갔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어두운 밤에는 여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뜬눈으로 꼬박 밤을 새우고서, 그 다음날 새벽같이 예루살렘을 향해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길의 연속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계속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 물어보아야만 했습니다. 자연히 그들은 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밤늦게 예루살렘에 당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먼저 그들은 자기들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머물렀던 장소로 가보았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이 계실 만한 곳을 이곳저곳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밤중에 예수님을 찾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그 날은 그들이 예수님과 떨어진 지 사흘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사렛으로 내려간 하루,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온 하루, 그리고 그 다음 날 하루, 도합 사흘 후가 되는 셈이었습니다.


(2) 성전에서 만난 즉

그 다음 날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언제나 많은 인파들로 붐비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더욱이 유월절은 끝났지만 아직 자기 고향으로 되돌아가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서 예루살렘 성전은 평소보다 더 붐비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색깔의 같은 형태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니 요셉과 마리아가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흘이 되던 날에도, 그들은 가까스로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3)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유대인들은 가르칠 때도 앉아서 가르쳤고, 배울 때도 앉아서 배웠습니다. 대개 가르치는 선생들은 의자에 앉고, 배우는 학생들은 바닥에 앉았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이 때 성경에서 유일하게 가르침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살고 계셨던 나사렛은 시골 동네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동안 훌륭한 선생들을 만날 기회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처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여러 선생들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선생들은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루살렘에 사는 선생들도 있었겠지만, 유월절을 맞이해서 세계 각처에서 온 내노라하는 선생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성경을 논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살이셨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열정으로 불타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때에 유월절을 맞이해서 전세계에서 올라온 선생들이 다 한 자리에 모여있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그 기회를 놓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4)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유대인들의 교육은 주입식이 아니라, 대화식이었습니다. 문답의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선생들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선생의 입장에서 앉으신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 그 자리에 앉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선생들에게서 성경을 배우시기 위해서 그들의 가르침을 듣고 계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의 선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아보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묻기도 하셨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경이 예언하는 메시야에 관하여 물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모르시고 물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메시야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5) 듣는 자들의 반응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여기에 “대답”이란 단어가 본시는 복수형입니다. 그리고 “기이히 여기더라”는 단어도 본시는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크게 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문의 뜻은 예수님이 지혜로운 대답을 하실 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매번 크게 놀랐다는 의미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선생들에게 질문을 하실 때, 최대의 경의를 표하시면서 공손한 자세로 물으셨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님은 정중하게 하나님의 지혜로 성경의 뜻을 밝히 설명해주셨을 것입니다. 

선생들은 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과 열두 살이셨습니다. 그러니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이 질문하시고 답하시는 은혜로우신 모습을 보면서, 또한 예수님의 지혜로우신 말씀을 들으면서 크게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눅2: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눅2: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4: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9: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이와 같이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이하게 여기도록 만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 위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49절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그리하심으로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 때문에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하고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신성모독으로 여겼습니까?

많은 분들이 여기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개념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음 주일에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니 다음 주일 예배에 한 분도 빠지지 마시고, 모두들 꼭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모두들 신앙으로 바르게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하기를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아름다운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루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부모 된 우리들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늘 신앙의 본을 아름답게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과 동행하며, 날마다 경건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일군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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