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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결혼 제도의 창설! (창2:24-25)

결혼 제도의 창설! (창2:24-25)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창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지막 여섯째 날, 하나님은 땅에서 살아가는 각종 동물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사람은 남자로서, 그의 이름은 아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여 에덴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자랐습니다. 그곳에는 큰 강이 흘렀습니다. 에덴 동산은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곳은 사람이 살기에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완벽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온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직은 한 가지 빠진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있어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에 따라, 사람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려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남자 혼자만으로는 누릴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여자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서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각종 동물들을 아담에게로 이끄셔서, 아담에게 그것들의 이름을 지어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아담이 독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에덴 동산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담은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통했습니다. 따라서 아담은 그가 살아가는데 아무런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담은 구태여 자기를 돕는 배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아담이 에덴 동산의 식물들만 보아서는, 그들에게 암수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자기 앞으로 각종 동물들이 지나갈 때, 아담은 그것들이 모두 암수 한 쌍으로 되어있음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에게는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자기 앞을 지나가는 동물들 가운데서, 자기의 짝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그 어떠한 동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지를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여기서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담은 원숭이를 보았을 때, 원숭이가 바로 자기의 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진화론자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철저하게 위배가 됩니다.

아무튼 아담은 자기만이 독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처하고 있는 아담을 위하여 그를 돕는 배필, 곧 그에게 적합한 배필로 여자를 만들어 주기로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신 과정은 어떠했습니까?

먼저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살로 대신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만드신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오셨습니다.

그 때 아담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아담은 비록 잠들어 있었지만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하신 일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서 돕는 배필로 만들어주신 여자를 보면서, 짤막한 사랑의 시 한 수를 지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나님은 아담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은 온전히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는 창1:31의 말씀과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시고, 그 두 사람을 짝지어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결혼 제도를 창설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축복에 따라, 사람은 바야흐로 생육하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밝히 계시해주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받아 행복이 늘 샘솟는 복된 가정을 이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결혼의 정의입니다(The Biblical Definition For Marriage).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1) 말씀의 주체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인 23절에는 아담이 하와를 보면서 불렀던 사랑의 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본문 24절도 역시 아담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는 부모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창세기의 저자 모세가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하나님이 창설하신 결혼 제도를 우리에게 설명해준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 24절은 결혼 제도를 창설하신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마19: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마19:5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여기서 예수님은 창1:27의 말씀과 창2:24의 말씀을 함께 인용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창2:24의 말씀을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밝히셨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본문 창2:24은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2) 결혼의 정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결혼을 어떻게 정의하셨습니까?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을 하나님은 결혼이라고 보셨습니다. 이는 결혼 제도를 창설하신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정의입니다.

말3:6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변역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상황에 따라서 수시로 바뀌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내리신 결혼에 대한 정의도 시대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바뀌어질 수가 없습니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연합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따라서 두 남자가 연합하거나, 두 여자가 연합한다고 해서 결혼이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법은 그것을 결혼으로 인정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결혼으로 간주하지 아니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까? 왜 하나님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짝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까? 생육하여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루게 하심입니다.

그런데 두 남자가 연합을 한다고 해서, 두 여자가 연합을 한다고 해서 그와 같은 축복을 이룰 수가 있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그러기에 동성의 연합은 결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일 뿐입니다.


(3) 타락의 결과


전7:29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전도서 기자의 말씀은 결혼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본시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연합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죄로 인해서 타락하게 되자, 그 결과로 남녀 사이에는 이런저런 온당치 못한 관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라멕은 아다와 씰라 두 여자를 자기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결혼 제도는 일부일처(monogamy)였습니다. 그런데 라멕은 일부다처(polygamy)를 취했습니다.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람은 자기 아내 사래의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첩으로 들였습니다. 이는 축첩(concubinage)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람은 자기 아내 사래를 두고서 다른 여성과 동침함으로 간통(adultery)을 행했습니다.

창세기 19장에는 소돔 사람들의 죄악이 나옵니다. 그들은 롯을 찾아온 나그네들과 상관하기 위하여 롯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동성애(homosexuality)를 즐기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이른바 “남색”(男色, sodomy)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창세기 34장에는 강간(rape) 사건이 등장합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마을의 여자들을 보러 나갔습니다. 그 때 그 마을의 추장 세겜이 디나를 보고, 그를 끌어들여 강간하여 욕되게 했습니다. 세겜은 폭력으로 디나의 몸을 짓밟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38장에는 유다와 그의 자부 다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다는 그의 자부 다말이 창녀인줄 알고, 그에게 약조물을 주고 동침했습니다. 이는 매춘(prostitution) 곧 성매매(the sex trade)일 뿐만 아니라, 근친 상간(incest)이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39장에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seduction)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날마다 눈짓을 하면서, 요셉에게 동침하기를 청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오히려 요셉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에 나타난 몇 가지 온당치 못한 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부끄러운 짓들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사람이 타락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결혼 제도를 창설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결혼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히13:4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만일 우리에게 찔림이 있다면 회개합시다. 하나님은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부끄러운 죄를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결혼을 귀히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결혼을 더럽히지 말고, 우리의 삶과 우리의 가정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누리는 행복한 가정들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결혼의 요소입니다(The Factors For Marriage).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오늘 본문은 “이러므로”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는 앞에서 일어난 일의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결혼을 토대로 해서, 장차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될 모든 인류가 따라야 할 결혼의 정의를 내리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결혼에는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둘째, 남자가 그 아내와 연합하는 것입니다. 셋째,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Leaving).

남자가 결혼을 하면, 남자는 부모를 떠나게 됩니다. 여기서 “떠난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남자가 결혼을 하게 되면, 더 이상 자기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결혼에 상관이 없이, 자기 부모님을 언제나 공경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의 “떠난다”라는 말이 공간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까? 예컨대 남자가 결혼을 하면, 부모와 멀리 떨어져 따로 살림을 차려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그의 처갓집에 가서 의무적으로 당분간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러한 뜻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통적으로 여자가 그의 부모를 떠나서 남자에게로 왔습니다. 예컨대 창24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내 리브가가 자기 남편 이삭에게로 왔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내 하와를 남편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자가 결혼을 하더라도, 그 부모를 떠나지 않고 함께 살았습니다. 예컨대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결혼을 했지만, 아버지 야곱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같은 생업을 하면서, 다 함께 모여 살았습니다.

이와 같이 여기서의 “떠난다”라는 말은 공간적인 개념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결혼의 두 번째 요소와 연계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이유와 목적은 그 아내와 연합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결혼을 해서 남편과 아내가 연합을 해야만, 그 독처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사람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그 때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떠난다”라는 말은 독처함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그 부모나 형제들과 함께 산다고 해도, 결혼을 하기 전까지는 독처함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는 곧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에서 동떨어진 셈입니다.


고전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고전7: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이와 같이 우리가 독신의 은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믿으시면, 더욱 주의 일에 헌신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상이 클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자신의 독처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더 많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남자가 그 아내와 연합하는 것입니다(Cleaving).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leaving) 것은 그 아내와 연합하기(cleaving)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연합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본시 매우 강한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본뜻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달라붙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결혼을 하기 전에는, 가장 가까운 관계가 자기와 부모와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나면, 그보다 더 강하고 더 긴밀한 관계가 새롭게 생깁니다. 바로 부부 관계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촌수로 따져 일촌이라면, 부부는 무촌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기 자녀들의 결혼을 결코 소홀히 여길 수가 없습니다.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보다도 더 강한 부부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그 자녀들이 결혼하기에 전에, 최선을 다해 그들을 지도해주어야 합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이삭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나안의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종을 자기의 고향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여자 리브가를 데리고 와서 이삭의 아내로 삼게 했습니다.

아울러 자녀들은 부모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무조건 결혼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일단 결혼하면, 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따라서 나중에 가서 잘못 결혼했다고 후회하지 말고, 부모님의 지도를 잘 받아야 합니다.

예컨대 이삭과 리브가에는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있었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나안의 여자들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삭과 리브가는 마음에 근심했습니다. 결국 에서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아버지의 축복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을 밧단아람으로 보내어, 그곳에서 아내를 취하게 했습니다. 야곱은 부모님의 뜻에 따라 밧단아람으로 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야곱은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외의 축복들도 풍성하게 받았습니다.   


잠19:14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십니다. 우리의 결혼을 홀로 주관하시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슬기로운 아내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우리에게 믿음직한 남편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창24:63을 보면,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삭은 그 때 그곳에서 자신의 아내를 구하러 간 종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는 자기의 아내를 맞이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위해 묵상하며 기도했을 것입니다.

결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는 남자와 여자가 연합해서 부모보다도 더 가깝고, 더 강하고, 더 긴밀한 관계가 확립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혼을 앞두고 있는 이들, 특별히 청년들은 많이 기도하면서 그 일을 하나님에게 온전히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결혼을 하셨습니까? 남편은 슬기로운 아내를 허락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합시다. 또한 아내는 믿음직한 남편을 허락하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에게 귀한 배필을 허락하시고, 우리를 짝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Oneness).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와의 경우는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하와는 아담과 별개의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아담의 몸의 일부로 만들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는 본래 한 몸이었는데, 둘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결혼을 통해서, 바로 자기 자신의 뼈와 살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담은 하와를 보면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결혼은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자신의 갈빗대, 곧 자신의 뼈와 살을 되찾는 것입니다. 둘로 나뉘어졌던 것이 다시금 본래의 하나로 되돌아가는 것이 바로 결혼입니다.


마19:6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결혼을 하면 더 이상 별개의 두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부부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한 몸입니다. 사실 부부는 육체뿐만 아니라, 삶의 목표와 방향, 이를 추구하는 생각과 마음까지도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가 모든 면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가장 확연하게 드러내는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그들의 자녀입니다. 부부의 몸이 섞기고, 성품이 섞기고, 재능이 섞기고, 모든 것이 섞여서 하나가 된 것이 바로 그들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짝지어서 부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부부는 둘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 몸이요, 하나입니다. 따라서 부부는 나누어질 수가 없습니다. 부부가 나누어진다는 것은 자기 몸을 둘로 쪼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읽었던 마19:6 하반부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여기에 두 가지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사람입니다. 둘째, 짝을 짓는 것 곧 결혼과 나누는 것 곧 이혼입니다. 예수님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결혼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이혼은 언제나 사람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어떠한 이유와 어떠한 경우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짝지어 부부가 되게 하신 것을 스스로 나눌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모든 결혼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입니다.


마19:7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마19:8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에도 이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마치 모세가 이혼을 명하였던 것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들의 이혼을 정당화시켰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이혼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혼을 단 한번도 권장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말2:16 말씀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단지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예외적인 경우에 이혼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컨대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여자가 음행을 할 경우 그를 돌로 쳐죽이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셔서, 그러한 경우에 이혼을 허락하셨습니다.

아울러 때로는 남자나 여자가 바람이 나서, 도무지 남편이나 아내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할 경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혼을 간접적으로 허락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하게 단서를 다셨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그렇습니다. 이혼은 본래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지금도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이혼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뜻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어 종신토록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혼의 아픔을 겪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는 이미 한번 죽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금 살게 된 것입니다. 한번 죽은 것으로 족하게 여기십시오. 두 번 다시 죽지 마십시오. 과거의 아픔을 경험 삼아서 남들보다 더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부부가 되셨습니까? 결혼을 주관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따라서 좋은 배필을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십시오. 아울러 이제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잊지 마십시오.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십시오.

아직 부모님을 떠나지 않고, 독처하고 있습니까? 많이 기도하십시오. 짝지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혼 생활을 통해서 우리 모두의 가정에 감사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고, 행복이 넘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결혼의 경이로움입니다(The Wonder Of The Original Marriage).


창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1) 벌거벗은 두 사람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욥의 말과 같이,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의 태에서 적신으로 태어납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창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짝을 이루고 난 뒤에도 역시 벌거벗은 몸으로 살았습니다.

에덴 동산은 모든 것이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의 기후도 더할 나위가 없는 최상의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또는 추위를 면하기 위해서, 옷을 걸치거나 입어야 할 필요가 전연 없었습니다.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사람도 벌거벗고 살았습니다. 짐승들도 벌거벗고 살았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몸을 따로 치장할 필요가 전연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 완벽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 부끄러워하지 않은 두 사람

두 사람은 벌거벗었지만, 전연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향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서도 부끄러워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부끄러워하지를 않았습니다.

첫째, 그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가 선악을 구별하기 전에는 자신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는 아직은 악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수치스럽게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둘째, 그들은 서로를 향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숨길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얼굴을 붉힐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은 부부로서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자기가 자기 몸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이 하나님과 자유롭게 교통했습니다.


(3) 죄로 인한 부끄러움

하나님은 사람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그것을 먹었습니다. 그 때부터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뒤,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옷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자기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 되자,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수치를 스스로 가리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를 못하고 숨으려고 들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떳떳하지 못한 감정, 죄악 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부끄럽고, 다른 사람에게도 부끄럽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기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죄를 멀리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죄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까? 죄를 알지 못했던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해서 죄를 알게 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음 주일에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그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합니다. 우리의 죄를 그대로 가지고는 설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한 우리의 수치를 가리어야 합니다. 우리 손으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했다고 해서, 우리의 수치가 가리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신 가죽옷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하나님의 어린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우리의 죄로 인한 모든 수치가 온전히 가리어집니다. 

날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누리며,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이 넘치는 우리 모두의 가정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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