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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람의 타락(3) (창3:1-7)

사람의 타락(3) (창3:1-7)

 


창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오늘 본문은 사람의 타락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타락함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 결과 이 세상의 모든 질병과 모든 문제와 모든 참상과 모든 사망이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타락하기에 앞서, 천사들 가운데 일부가 먼저 타락했습니다. 그 우두머리가 천사장 루시퍼였습니다. 그가 타락해서 된 것이 바로 사단입니다. 사단은 에덴 동산에 있는 뱀의 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하와에게 접근하여, 하와를 미혹했습니다.


창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모든 피조물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절대적입니다. 그러기에 피조물인 사람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거나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단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단은 하와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게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사람의 먹는 자유를 제한함으로서, 사람에게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아버리는 듯한 인상을 사단은 하와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이때 하와는 사단을 대적하며, 사단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하게 변호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사단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며, 사단과의 대화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하와는 사단의 거짓말에 영향을 받고 말았습니다.


창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사단은 하와의 대답을 들으면서, 하와의 마음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적극적인 공세를 폈습니다. 사단은 흔들리는 하와의 마음을 완전히 꺾어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와 같이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단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으면, 오히려 사람에게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사단은 사람이 잘 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처럼 말함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결국 사단은 거짓말로 아담과 하와를 죽였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거짓말로 뭇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지 맙시다. 언제나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는 일전에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의 마지막 부분인 6절과 7절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람이 죄를 범하는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창3:6 1)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2)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7 3)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와의 욕심입니다. 둘째, 사람의 범죄입니다. 셋째, 범죄의 결과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며, 하나님의 말씀에 즐겨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하와의 욕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1) 여자가 나무를 봄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하나님은 에덴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나게 하셨습니다. 이 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사단의 꾐에 빠져서, 평소와는 다른 시각으로 그 나무를 보았습니다.

남자가 어른이 되면, 목 중간쯤에 약간 튀어나온 부분이 생깁니다. 우스개 말로 여자와는 달리 남자는 선악과를 먹다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선악과를 완전히 삼키지 못하고, 그것이 목 중간 부분에 걸려버렸다고 합니다.

이 부분을 우리말로는 결후(結喉) 또는 후골(喉骨)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을 영어에서는 Adam's apple이라고 칭합니다. 이를 직역하면 “아담의 사과”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사과나무이고, 선악과는 사과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남자가 선악과를 먹다가 목에 걸려 남자의 목 중간 부분이 튀어나왔다는 말도 근거가 없고, 오늘날의 사과나무가 에덴 동산의 중앙에 서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였다는 말도 역시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오늘날의 사과가 에덴 동산의 선악과였다는 말이 떠돌게 되었을까요? 중세에 사용하던 언어인 라틴어에서는 사과 또는 사과나무를 malum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선악이라고 할 때의 악을 malus라고 합니다. 음이 서로 비슷합니다.

아울러 이 두 단어의 소유격은 둘 다 mali입니다. 다시 말해서 라틴어로 “사과의”라는 단어도 mali이고, “악의”라는 단어도 역시 mali입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가 선악과는 바로 사과일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사람이 타락한 후에, 사람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었던 노아 홍수 때, 에덴 동산 자체도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왜 하와가 그 나무를 보았느냐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와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늘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사단의 말을 듣고서, 자기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이 금하신 그 나무,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와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와의 결정적 실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의 말에 속아서,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바라보지 맙시다. 그러다가는 마귀의 올무에 빠지고 맙니다. 베다니의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늘 예수님의 칭찬을 받으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하와의 욕심

사단의 유혹을 받은 하와는 흔들리는 마음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하와의 눈에 들어오는 그 나무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1) 먹음직도 하고 2) 보암직도 하고 3)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첫째, “먹음직도 하고”입니다.

에덴 동산에는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까? 그래서 하와가 몹시도 굶주리고 있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창2:9에 있는 말씀처럼, 에덴 동산에는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에덴 동산은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가 그 나무를 볼 때, 그 나무의 실과가 먹음직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와의 욕심에서 나온 감정이었습니다. 하와는 자기가 그 실과를 먹으면, 자신이 지금까지 누리지 못했던 어떤 새로운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처럼 여겼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직역하면 이와 같이 됩니다.

“여자가 본즉 그 나무가 먹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1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였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꾐에 빠진 하와는 더 이상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원리에 서있지를 않았습니다. 하와는 욕심에 빠져서 “내가 보기에 좋았더라”의 자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보기에 좋았더라”입니까? “내가 보기에 좋았더라”로 살면 불행해집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살아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보암직도 하고”입니다.

이것도 역시 하와의 욕심에서 나온 느낌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은 결코 광야와 같이 삭막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창2:9의 말씀과 같이, 그곳에는 보기에 아름다운 각종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 보암직하게 여긴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이기적인 욕심과 불만족의 결과였습니다. 사람이 이기적인 욕심에 사로잡히면, 자기가 보는 그것만이 자꾸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딤전6:8 말씀과 같이,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우리는 족한 줄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명심하면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입니다.

지금까지 하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해서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하와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와의 관심사가 바뀌어졌습니다.

하와의 관심은 하나님의 일에서 자신의 일로 바뀌어졌습니다. 하와는 자기가 지혜롭게 되기를 바라면서, 자기 만족을 꾀했습니다. 이 또한 욕심의 결과였습니다. 이는 여기에 사용된 “탐스럽다”는 단어가 바로 탐욕을 뜻하는 단어라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9:10 말씀과 같이,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지혜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지혜에 따라서 복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사단의 시험

지금도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사단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시험합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이것을 사도 요한은 무슨 말로 표현했습니까?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1) 육신의 정욕과 2) 안목의 정욕과 3) 이생의 자랑이니....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볼 때, 첫째로 먹음직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육신의 정욕입니다. 둘째로 보암직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안목의 정욕입니다. 셋째로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생의 자랑입니다.

누가복음 4장에서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사단은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세 가지로 시험했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시험은 육신의 정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눅4: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때 예수님은 사십 일 동안 금식하시고 난 뒤였습니다. 사단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사단은 하와에게도, 또한 예수님에게도 먹는 것으로 시험했습니다. 먹고자 하는 육신의 욕구를 채우도록 시험했던 것입니다. 

하와와는 달리 예수님은 사단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이끌고 올라갔습니다. 사단은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면서, 예수님에게 두 번째 시험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안목의 정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눅4: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눅4: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눅4: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사단은 안목의 정욕으로도 예수님을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안전하게 뛰어내려서,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사람들에게 밝히 보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생의 자랑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눅4: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사단은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육신의 정욕, 곧 어떻게 하면 우리의 육신을 좀더 즐길까? 안목의 정욕, 곧 어떻게 하면 우리의 눈을 좀더 만족시킬까? 이생의 자랑, 곧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 위에 우리를 좀더 높일까? 이것이 바로 사단의 시험 방식입니다.


약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육신의 정욕으로, 안목의 정욕으로, 이생의 자랑으로 시험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금하신 것은 아무리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다 하더라도 욕심을 내지 맙시다.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섭시다. 그리함으로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함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사람의 범죄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창3:6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1)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우리말 성경에는 “따먹고”라는 식으로 하나의 동사로만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로는 “따다”와 “먹다”라는 두 개의 동사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사단의 꾐에 빠진 하와는 선악과를 자기 손으로 땄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먹었습니다.

먼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그 실과를 딴 것은 누구였습니까? 그것은 사단이 아니라 하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이 선악과를 따서 하와에게 건네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와가 자기 욕심에 끌려서 선악과를 자기 손으로 땄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단은 선악과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선악과를 따서 하와에게 강제로 먹일 수는 없었습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웠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예수님을 강제로 밀어서 떨어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사단은 결코 전능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사단은 우리를 유혹할 수는 있어도, 사단은 우리를 강제로 시험에 빠지도록 만들지는 못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유혹하는 사단보다 크시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사단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서 그것을 먹었습니다. 이는 단순하고도 간단한 동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이 경고하신 대로, 하나님의 명을 어긴 하와에게는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어기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아무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도 하나님이 금하신 것은 아예 욕심을 내지 맙시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기 때문입니다.


(2) 아담에게 줌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여기에 아담과 하와가 함께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아담은 뱀과 자기 아내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옆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을까요? 그러면서도 아담은 뱀을 물리치지 않고, 하와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서 먹도록 내버려두었을까요?

여기서 함께 한다는 말씀은 지금 두 사람이 꼭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큰아들은 우리와 함께 살고, 둘째 아들은 나가서 삽니다.” 그렇다고 해서 큰아들이 늘 부모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창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딤전2: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아담은 그가 선악과를 먹은 것을 뱀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여자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사도 바울은 아담이 뱀의 꾀임을 보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로 미루어볼 때, 그때 아담은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그때 아담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우리는 모릅니다. 어쩌면 아담은 땀흘리면서 에덴 동산에 있는 식물들을 가꾸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체질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낮잠을 더 즐기기 때문에, 아담은 잠시 낮잠을 자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때 하와는 혼자서 동산을 거닐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근처에서 신기한 듯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단은 혼자 있는 하와에게 접근을 했던 것입니다.

사단의 미혹을 받은 하와는 선악과를 자기 손으로 땄습니다. 아마도 하와의 손은 다소 떨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결국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와는 달리, 그의 목숨은 그대로 붙어있었습니다. 

그래서 하와는 얼른 아담에게로 뛰어갔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 아담이 하와에게로 다가왔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하와는 아담을 만나서 그에게 선악과를 먹으라고 건네주었습니다. 그때 아담은 어떻게 했습니까?


(3) 아담도 선악과를 먹음

“그도 먹은지라.”

아담도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아담이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그렇게나 쉽게 선악과를 먹고 말았을까요?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아마도 하와는 사단이 자기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아담에게 옮겼을 것입니다. 아울러 하와는 그 말에 한 가지를 더했을 것입니다. 즉 하와는 자기가 선악과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점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하와의 말에 설득을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담은 자기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의 아내와 운명을 같이 하기를 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부득불 아내가 건네주는 선악과를 먹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성경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유에 대해서는 밝히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담이 뱀의 꾀임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결코 그의 죄가 가벼워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언제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단 한번도 하와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분명 뱀의 꾀임을 본 것은 하와인데, 왜 성경은 언제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씀합니까?


고전11:3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와 같이 여자의 머리는 남자입니다. 남자가 여자를 주관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의 질서입니다. 여자를 주관하는 책임이 남자에게 있기 때문에, 성경은 언제나 남자인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6절에는 다섯 개의 동사가 등장합니다. 첫째, 여자가 그 나무를 “보았다.” 둘째, 여자가 그 실과를 “땄다.” 셋째, 그것을 “먹었다.” 넷째, 자기의 남편에게 “주었다.” 다섯째, 그도 “먹었다.” 각 동작은 순식간에 그 다음 동작으로 넘어갑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법입니다. 죄도 언제나 순식간에 번져나갑니다. 그러므로 살전5:22 말씀처럼,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늘 성결한 삶, 빛 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범죄의 결과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1) 그들의 눈이 밝아짐

성경에서 “눈이 밝아진다”는 말은 과거에 보지 못하던 것을 새롭게 본다는 뜻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예컨대 엠마오 마을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눈이 밝아지자, 그들은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눅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과거에 그들이 보지 못하던 것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진 것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나 축복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진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무엇을 새롭게 보았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몸을 보고서,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눈이 밝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늘 우리와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밝히 보며,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예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그들의 몸이 벗음을 알게 됨

에덴 동산은 모든 것이 완벽한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뜨거운 태양 빛을 피하기 위하여, 또는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옷을 걸치거나 입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도 벌거벗고 살았습니다.


창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이와 같이 두 사람은 벌거벗었지만, 전연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가 선악을 알기 전에는 자신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는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수치스럽게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에게는 부끄러운 감정이 절로 생깁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부끄럽고, 다른 사람에게도 부끄럽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먹으면, 평생 부끄러운 생각이 따라 다닙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기에, 아예 그것을 쳐다보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함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 그것이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들이 얻게 된 지혜는 어떠했습니까? 고작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하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다른 식물들의 잎에 비해서 무화과나무의 잎은 비교적 크고도 넓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잎은 톱니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중간 중간이 비어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여러 장의 무화과나무 잎을 모아서 함께 엮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기 위해서는 가늘고 긴 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컨대 포도나무 가지가 적합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했습니다. 그것으로 자기들의 하체를 가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아담과 하와는 그것으로 자기들의 얼굴을 가리지 않았을까요? 왜 그들은 그것으로 그들의 손이나 발을 가리지 않았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하필이면 치마를 하여 자신들의 하체를 가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이와 같은 복을 내리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이에 따라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지식적으로 악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외부에 있는 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 자체가 바로 악이었습니다. 그들은 악을 행함으로 악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 속으로 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 속에 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속에 자리잡은 죄악은 그들의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와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 심한 죄의식을 느꼈을 것입니다. 자연히 그들은 그들의 후손을 생산하는 기관인 그들의 하체가 부끄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무의 잎을 엮어서 치마를 했습니다. 자기들의 수치를 가리어 보기 위해서 나름대로 머리를 썼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치마는 영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서 햇빛에 말라버리고 말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우리의 손으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만든 치마로는 우리의 수치를 결코 가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지어주신 가죽옷을 반드시 입어야 합니다. 이는 곧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한 우리의 모든 수치를 가리운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시간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왔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늘 감사하면서 삽시다. 아담과 하와와 같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지 맙시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날마다 빛 가운데로 행합시다. 그리해서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에덴 동산을 잃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복된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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