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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타락의 결과! (창 3:8-10)

타락의 결과! (창 3:8-10)
 
 

창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마지막 여섯 째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위하여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그곳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아담의 아내 하와는 뱀의 꾐에 빠져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하와는 그것을 자기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 아담도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범죄함으로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우선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실제적이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타락한 것도 역시 실제적이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에 기록된 모든 내용도 역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창세기의 내용은 결코 신화나 전설이나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발생했던 실제적 사건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수백 만년에 걸친 진화의 과정을 통해서 오늘날의 상태로 발전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지 창조의 마지막 여섯 째 날, 그 하루 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단 한 순간의 잘못된 행동으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우리는 인류의 시조 아담이 실제적이며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담이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타락했을 때, 아담 안에서 그의 후손인 우리 모두도 함께 죽었다는 사실도 역사적으로 실제적인 사건이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아담은 역사적인 인물이며, 또한 그의 타락도 실제적인 사건이었음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삶을 얻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다시 오셔야 합니까? 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해야만 합니까? 우리가 사람의 타락을 실제적이고도 역사적인 사건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장차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절대적입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판단하거나 평가할 권한이 없음을 늘 명심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기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기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순종하기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풍성히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창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아담과 하와의 도피입니다(8절). 둘째, 하나님의 질문입니다(9절). 셋째, 아담의 답변입니다(10절).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아담과 하와의 도피입니다.


창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1) 날이 서늘할 때에

우리말의 “서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어는 “바람”(wind)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어 성경을 직역을 하면, “그 날의 바람 때에”입니다. 해가 비치면 기온이 상승하지만, 해가 지면 기온이 내려갑니다. 그때 기온의 차로 인한 기류가 발생하면서, 선선한 바람이 붑니다.

말하자면 이제 에덴 동산에 저녁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 날 낮에 하와는 혼자서 뱀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와는 뱀의 꾐에 빠져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 후에 하와는 자기 남편 아담을 만나서, 그에게도 선악과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담도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시간이 흘러서 이제 그 날 저녁이 되었던 것입니다.


(2)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

“거니신다”라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분사형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분사형은 일회적 동작이 아니라, 반복되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날 특별하게 에덴 동산을 거니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평소와 같이 그 날 저녁도 동산을 거니셨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와 같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거니실 수가 있으셨습니까? 또한 어떻게 아담과 하와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까?

이때 하나님은 육신을 입으신 모습으로 동산을 거니셨던 것입니다. 흔히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신 최초의 경우가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에도 하나님은 종종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사6: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요12:41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선지자 이사야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때 이사야가 영이신 하나님을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은 눈에 보이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본 것은 성육신 하시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종종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삼위 하나님의 2위이신 예수님이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해서, 이는 전혀 이상하거나 놀라운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 특별히 창세기에서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창16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첩 하갈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창17장과 18장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창26장에서는 이삭에게, 그리고 창28장, 32장, 35장에서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서도 육신을 입으시고 그곳을 거니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육신을 입으신 모습으로 에덴 동산을 거니셨습니까? 그만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와 함께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들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면서 대화를 나누며 교제하기를 원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마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또한 그들도 하나님에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말 성경은 여기서 아담과 하와가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音聲, voice), 곧 목소리를 들었다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동산을 거니시면서, 입으로는 말씀을 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음성”이 오늘 본문 10절에서는 “소리”(sound)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사실 똑같은 히브리어 단어(לוֹק)가 삼하5:24과 왕상14:6 그리고 왕하6:32에서는 “걸음 걷는 소리” 또는 “발소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경우도 아담과 하와가 들은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에덴 동산을 거니실 때 나는 소리였을 것입니다. 예컨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몸이 나무에 스치시거나 하나님의 발이 나뭇가지를 밟으시면서 생기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3) 아담과 하와의 반응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기척이 있었을 때, 아담과 하와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에게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악을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떳떳하지를 못했습니다. 면목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했습니다.   


욘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왜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했습니까?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가 거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악을 행하는 자는 빛 되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들기 마련입니다.


요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또한 선지자 요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들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기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기 위하여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습니다. 아니 그들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들의 숨은 곳을 모르시겠습니까?


시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139: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시139:10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139: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시139: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서, 배 밑층에 내려가 깊이 잠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다에 대풍을 일으켜 그를 깨우셨습니다.


렘23: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십니다. 온 천지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피해 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담과 하와도, 그리고 선지자 요나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악을 행하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또한 선지자 요나처럼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으려고 들 수밖에 없습니다.


창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창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17:1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도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처럼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풍성히 누리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창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 여호와 하나님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길 잃은 양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선한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친히 찾아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 두 가지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과 하나님이라는 이름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고유명사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신(神)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칭호입니다.


출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출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은 창세기의 족장들에게는 그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족장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제 모세에게 와서 비로소 이루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호12:5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


여호와는 하나님의 기념 칭호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라는 이름은 무엇을 기념하는 칭호입니까? 여호와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념하는 칭호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적 칭호”라고 불립니다.


창3: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사단은 하와를 미혹하면서, 의도적으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단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떼어놓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단의 말에 영향을 받은 하와도 역시 하나님을 여호와라고 부르지를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변함없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변함없이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끝까지 변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2) 아담을 부르심

하나님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사단의 말을 들은 아담과 하와를 바로 그 자리에서 심판해버리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담을 불러주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천사장 루시퍼가 범죄했을 때, 또한 그 뒤를 따라서 천사들의 삼분의 일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 즉시 정죄하시고, 그들을 땅으로 내쫓아 버리셨습니다.

따라서 만일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주시고 불러주지 아니하셨으면, 그들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범죄한 그들을 그 즉시 심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찾아오셔서 부르셨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와 같이 하나님은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경고하신 대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그 즉시 정죄하시고 죽이실 수 있으셨습니다. 사실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분명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자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 대한 심판을 보류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그 즉시 심판 받아 마땅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서,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그러기에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악을 행하며 죄를 범했는데도,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지 아니하십니까?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바라시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잠시 보류하고 계실 뿐이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맙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다면, 얼른 회개하고 잘못된 길에서 돌이킵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며, 다시금 우리를 축복의 동산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이 물으심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와 같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가 숨어있는 곳을 모르고 계시기 때문에 던지신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숨어있는 곳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실은 오늘 본문을 보더라도 분명해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그에게 이르시되.” 지금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지금 아담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지금 아담의 면전에서, 아담의 얼굴을 마주보시면서 그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자기들의 입으로 솔직하게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왜 너희들은 지금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느냐?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이리 나와서 솔직하게 털어놓아라.”

한편으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을 부드럽게 나무라셨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들이 회개하면서 하나님에게 돌아오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출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은혜로우십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이 많으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시며, 우리에게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행여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있지는 않습니까? 행여 우리는 요나처럼,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있지는 않습니까? 행여 우리는 탕자처럼, 아버지를 떠나 먼 곳에서 처량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어있었다면, 그 동안 숨어있던 곳에서 뛰어나갑시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에게로 달려갑시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기쁨으로 우리를 영접하십니다.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아담의 답변입니다. 


창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 아담이 대답함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셔서 아담을 부르실 때, 아담은 어쩔 수 없이 하나님에게 나아가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때의 부르심은 절대적입니다. 아무도 그 부르심을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부끄러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대답하며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아담의 그릇된 대답

왜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그 즉시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찾아오셨습니까? 왜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면서, “네가 어디 있느냐?”고 그에게 물으셨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이 상한 심령으로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회개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오 하나님!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큰 악을 행하였나이다. 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옵소서.”

아담의 대답은 이와 같이 되었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대답에는 죄에 대한 고백이 전연 없었습니다. 회개도 전연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용서도 전혀 구하지를 않았습니다. 그의 대답은 진실하지도 않았고, 솔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점에서 아담의 대답은 진실하지를 않았습니까? 그는 하나님에게 자기가 벗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지금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담은 문제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려고, 잔꾀를 부렸던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점에서 아담의 대답은 솔직하지를 못했습니까? 아담은 자기가 벗었기 때문에 두려워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솔직한 대답은 무엇이라야만 했습니까?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먹었기 때문에, 지금 내가 두려워하나이다”라고 대답했어야 옳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악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선만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늘 진실했고 솔직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진실함도 잃어버렸고, 솔직함도 상실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속성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처럼, 죄도 계속해서 번져나갑니다. 그러므로 살전5:22의 말씀처럼, 악은 그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늘 빛 되고 성결한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타락의 결과

본시 에덴 동산은 어떠한 곳이었습니까? 그곳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거니시던 동산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곳에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충만했습니다. 자연히 그곳에는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찬양이 넘쳐 났습니다.


사51:3 대저 나 여호와가 시온을 위로하되 그 모든 황폐한 곳을 위로하여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 기뻐함과 즐거움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타락한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과 멀어지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그들이 누리던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찬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결과입니다. 타락의 결과는 그만큼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담 안에서 에덴 동산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삶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에덴을 다시금 회복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에덴의 축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기서 결론적으로 한 가지를 생각해봅시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게 되었던 근본적인 원인이 과연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 마디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지를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지를 못하니까, 그들은 사단의 시험에 빠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다 보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다 보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니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담과 하와가 타락의 길로 빠졌던 것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지를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지키며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시험을 이기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에녹처럼 노아처럼 아브라함처럼, 우리 모두도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아울러 하나님의 축복으로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함과 찬양이 넘쳐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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