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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복음의 일꾼 / 엡 3:7 (신 313쪽)

3: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자기가 받은 

사명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표현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오늘 이 자리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갈수록 악해져간다고 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자기의 해야만 할 일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고 하는 겁니다.


흔히 세상에서 하는 일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누군가로부터 반드시 하라고 명령을 받은 일입니다.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남이야 어떻게 하든지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몽땅 다 자기가 뒤집어쓰게 되는 일입니다. 


또 하나는 하고 싶은 일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 

따라서 내 상태에 따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입니다. 

모든 가치가 다 내 판단과 의도에 따르는 것이 때문에 

굳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 사도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는 

과연 하고 싶은 일일까요? 아니면 할 일일까요? 


그리고 사도 바울의 일꾼이 되었다고 하는 이 고백이 과연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에게는 사도 바울과 같은 일꾼의 삶이 

과연 “하고 싶은 일”일까요? 아니면 “해야만 하는 일”일까요?


솔직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해야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거의 동급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일꾼으로 사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라고 말씀을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전해야하는 복음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겁니다.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삶이 사도 바울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곧 오늘 우리들의 삶이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복음을 위한 삶을 상당히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교회생활만 잘 하는 것이 복음을 위한 삶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마디로 교회만 잘 다니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뭘 하고 살든지 그저 지금 이 시간처럼 

교회의 공식 모임에만 열심히 나오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모든 책임을 다 했다고 여기는 성도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때문에 실제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나타나질 않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말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임을 당당하게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을 하셨습니까?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는 이미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존재입니다. 

예수 믿고 나면 그 다음에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가 이제는 소금과 빛입니다. 

본질이 소금이요, 본질이 빛입니다. 


이제 우리의 본질은 슬그머니 숨겨도 그냥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가운데 있으면 그냥 소금이고, 빛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미 썩은 곳이고, 세상은 이미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런 곳에 우리가 들어가면 

당연히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고,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의미로 복음의 일꾼이라고 표현을 하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이미 우리가 복음의 일꾼입니다. 


복음의 일꾼이 되자고 결의하고, 

구호를 외치고, 

전단지와 전도지를 들고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복음의 일꾼입니다. 


우리 삶의 자리에서 복음의 일꾼으로서 드러나게 사는 겁니다. 

때문에 복음의 일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을 말합니다. 

복음의 일꾼으로서 우리 인격이 소금으로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감춘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어떻습니까? 

다 감추고 숨기고 드러내질 않습니다. 

예수 믿고 산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을 우리와 똑같이 사셨던 예수님의 인격이 

우리 삶의 자리에서 도무지 나타나질 않습니다. 


예수님은 믿는다는데 정말 거칩니다. 

복음을 위한 삶이 거칠면 좋겠는데 자기 욕심을 위한 삶에서 거칩니다. 

복음을 위한 삶으로 과감하고 담대하면 좋겠는데 그쪽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위한 삶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사람 못지 않은 욕심과 과감함과 담대함으로 무장을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성도에게서 온화함과 화목함과 화평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양보하고 포기하고 섬겨주고 사랑해주는 미덕이 사라졌습니다. 

이젠 신앙생활도 세상 사람들의 거친 삶처럼 무한 경쟁의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허락하시는 부분들이 

우리 신앙생활에서 점점 더 사라지고 없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일꾼이 되어 사는 것도 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대로 따르는 삶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결국 자기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의 결과에 대해서 자기가 주장하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신 다고 하는 분명한 신앙고백입니다.


때문에 자기 스스로 결코 서두르거나 주저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오늘 좀 어렵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 좀 잘 나가더라도 교만하지 않는 겁니다. 

상황이나 환경에 굴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갈 길을 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걷고 있는 

복음의 일꾼이라고 하는 삶의 자리에서 가지는 진지한 태도가 

신약성경 곳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행20: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빌 1:29-30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심을 의지하는 것이 때문에 

형편과 처지와 상황의 변화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형편들로 인해서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겁니다. 


어려우면 어렵다고 더 의지하고, 잘 나가면 잘 나간다고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가 중간에 서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가로채서는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살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돌아가신 것처럼 나서지 말라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뭡니까?


출 14:8-14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 때에 애굽 군대가 추격할 때에 

두려워서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담대하게 외친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운다, 

그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행하시는 놀라운 구원을 보라.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심지어는 모세까지도 미처 생각지 못한-방법으로, 

즉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으로 이스라엘은 애굽 군대의 추격을 따돌립니다. 

아니 따돌릴 뿐만 아니라 애굽 군대가 홍해에 빠져서 다 죽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보자는 겁니다. 


왜 우리가 복음의 일꾼으로 삶을 살지 못합니까? 

내가 이것저것 다 해보려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꾸만 내 형편만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겁니다. 

환경만 탓하게 되는 겁니다. 

예수 믿는 성도로 사는 것에 주눅이 들고 위축이 되는 겁니다.

‘예수 믿고 사니까 손해를 좀 보면 어때?’하고 

담대하게 살아야만 하는데 그렇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매사에 

자기 계획, 자기 수단, 자기 의지, 자기 노력으로만 가득합니다. 

애굽 군대가 뒤에서 따라오는 겁니다. 

잠시 쉬는 틈도 없이 정신없이 살기는 사는데 도무지 열매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고, 또 전해지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고작해서 하는 말이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복 받을라고 예수 믿는다는 너희들, 제발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고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오히려 염려하고 걱정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할 일을 해야만 합니다. 

아니 할 일을 하고 싶은 일의 수준으로 가져가야만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우리 할 일입니다. 

다 주의 종이 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겁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푹 빠져서 사는 삶이여야만 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감정상의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의 전인격에 걸친 은혜입니다. 

그 어떤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예수 믿는 성도다움을 잃지 않는 은혜입니다. 

앞길에 장애물이 있다고 해도 결코 뒤돌아서지 않는 겁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으면서 우리가 가진 복음의 일꾼 됨을 잃지 않는 겁니다. 

때문에 늘 화목하고, 늘 평안하고, 늘 든든하고 건강한 성도로서 걸어가는 겁니다. 

그 은혜에 푹 빠지시기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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