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절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지난주에 우리가 비록 이방인이기는 하지만 구원에 관한 한은
전혀 기가 죽을 일이 없는 약속의 자녀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믿음의 길을 걷고,
또 함께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울러 우리에게도
한 가지의 기준이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음을 늘 기억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자꾸만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이 뭡니까?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이 우리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되게 하였고,
또 함께 이렇게 신앙의 길을 걷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이방인이라고 한들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설 수 있는 길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방인이라고 하는 민족적인 한계를 뒤집는 복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복음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길을 걷게 하는,
그것도 함께 걷게 하는 복음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부족하니까 자꾸만 딴소리들을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신앙생활에 대한 근본적인 기초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기초가 부족하니까 응용을 하는 편에 가면 자꾸 딴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흔들림이 없는 믿음의 자세가 세워져야만 하는 겁니다.
그럼 복음이 뭡니까?
일단 복음의 출처부터 생각을 해봐야만 합니다.
복음이 누구에게서 시작되었습니까?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복음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이 세상은 만드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복음이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복음은 복음을 받는 대상을 구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유대인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했던 사마리아인들에게까지 다 허락하셨습니다.
그만큼 복음은 보편적이고, 평등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복음을 적용하고 살 때는 많은 특별함과 불평등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마치 등급이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 두드러진 현상이 바로 복음을 가지고 서로 간에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왜 경쟁이 필요합니까?
복음으로는 끊임없이, 무한정 섬기는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복음으로 섬기신 것처럼 섬기는 겁니다.
세상 모든 만물을 다 섬길 수는 없으니까 최소한
내가 살고, 내가 아는 영역에서는 무조건 섬기는 겁니다.
복음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물론 예수님의 섬김은 우리보다 그 사이즈가 훨씬 더 크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능력은 탐내면서도
예수님의 섬김은 모르는 척 하려고 하는 우리가 가진 죄인의 모습이 종종 보입니다.
능력은 탐나고 섬김은 싫은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나타나는 것이 서로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경쟁하는 부끄러운 모습 밖에 없습니다.
섬김을 경쟁해야만 하는데 오히려 그 쪽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립니다.
그래서 늘 쥐꼬리 만한 자존심을 내세우기가 일쑤고,
죄인의 모습을 그대로 여과 없이 드러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상 살면서 보면 누구 하나 성질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무지 작은 일에도 지려고 하질 않습니다.
내가 포기하고, 내가 양보해서 남을 세워주려고 하질 않습니다.
복음은 그런 우리를 섬기러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쩌든지 섬겨야만 합니다.
섬기는 것이 복음의 삶입니다.
맘에 드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래하는 겁니다.
나한테 잘하는 사람한테 잘 하는 것은 강아지도 그렇게 합니다.
마 5:43-47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제 우리는 최소한 이방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섬김으로 전하신 복음을 아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니 원수까지라도 사랑하고 섬겨주는 차원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기본의 도리입니다.
그 은혜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복음의 내용입니다.
복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롬 1:15-17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또 하나님의 능력, 실력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실력, 능력은 절대로 실패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감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대로 로마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실력, 능력이기 때문에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실력이나 언변,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가 섬김의 삶을 살면 그것으로
우리의 연약함이나 어리석음이나 무능력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서 남들보다 더 손해보고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오로지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자기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바보처럼,
뭔가 조금 모자란 사람처럼,
배알도 없이 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까 의심할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때문에 늘 갈등해야만 하고,
고민해야만 하고,
더 나아가서 기도해야만 하는 곳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결국 복음 안에서 사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내 실력이 아닌 하나님의 실력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손해 보는 겁니다.
마 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은 뭡니까?
세상에서는 제발 손해 보고 살라는 겁니다.
눈을 위아래로 휘번득이면서 자기 이익된 것을 찾아 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다 포기하고 살라는 겁니다.
복음을 듣고 아는 성도라면 이제 제발 세상사는 것에 대해서 영악하게 굴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성도들이 영악해지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손해 보기 싫다는 겁니다.
사흘 굶어서 도둑질 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성도가 복음의 내용을 따라 살지 않기로 한 것이 곧 세상의 타락입니다.
세상은 워낙 악한 곳입니다.
그런데 그 악한 곳에 성도들의 삶이 같이 악해지기로 하는 것이
곧 세상의 타락이고, 세상이 멸망당할 징조인 것입니다.
구약을 보시면 세상의 타락에 대해서 하나님이 더 이상 진노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은 워낙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이 세상을 살면서 이미 하나님의 의를 알고,
또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성도들이 타락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세상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런 의미를 생각해볼 때
지금이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은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 세상을 사는 오늘의 우리를 향해서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벧전 4:7-11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가 먼저 정신을 차려서 서로 사랑하고 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즉 복음을 붙들고 사는 지체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가장 바른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복음을 통해서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이방인인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그 복음을 제대로 잘 전해야만 하는 거룩한 책임이 주어졌다고 하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가 받은 이방인의 복음은 단순한 이방인의 복음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라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능력은 바로 이방인인 우리를 통해서
누구에게라도 증거 되고 전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결코 우리로 인해서 실패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거룩한 사명으로 가득 한 우리 삶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깨어 기도하고 사는 착하고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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