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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밀의 경륜 / 엡 3:8-9 (신 313쪽)

사도 바울을 바울답게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은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의 우리들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제대로 살고 있는지는 의문일 수는 있습니다. 

특히 자기 혼자만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모르겠지만 

남들과 비교해서 판단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깨닫고 느끼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느 정도인지의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사실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하는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좀 더 철저해야만 합니다. 

내가 제대로 산다 못 산다, 형편이 이렇다 저렇다 여부에 관계없이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말씀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바로 이런 자세가 좀 더 철저한 사람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바울이 오늘 하는 말씀도 역시 같은 의미입니다.


8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사실 이 부분의 말씀을 우리는 제대로 잘 표현할 수 없는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을 단순히 겉치레의 접대용 멘트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문화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런 표현에 대해서 의외로 오해를 많이 합니다. 

진심 그대로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자기에 대한 표현이 어떻습니까?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 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단순히 우리의 유교적 가치관에 따르는 겸손의 표현이라고 이해를 하시면 

정말 좁게 보는 겁니다. 

이런 표현은 사실 정반대로 봐야 더 정확하게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반대로 보면 어떻습니까? 

작다의 반대는 크다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사도 바울이 지금 표현하고 있는 것은 

세상 그 어떤 큰 사람보다 자기가 훨씬 더 큰 사람이라는 겁니다. 


무엇에서 그렇게 크다고 하는 겁니까? 

하나님은 은혜를 받는 부분에서 그렇습니다.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자기가 더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때문에 어떻습니까?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은혜의 기준에 놓는다는 겁니다.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준으로 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자기 생각이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한마디로 자기의 생각과 판단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 그렇다는 겁니다. 


이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고 사는 겁니다. 

때문에 자기 판단과 자기 기준이 없습니다. 

은혜를 알기 때문에 은혜를 베풀 줄 아는 겁니다.


솔직히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다 자기가 한 것으로 알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많아도 보통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의 특징이 뭡니까?

내 비위를 맞추라는 겁니다. 

나를 따르라는 겁니다. 

나한테 잘하면 내가 다 해주겠다는 겁니다.

그게 다 세상의 방법과 가치입니다. 


세상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을 뒷받침 해 줄 테니까 너는 성적만 잘 내라는 겁니다. 


프로 야구선수가 1군에 속한 것과 2군에 속한 것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합니다. 

대우가 그만큼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물론 1군 선수들한테 잘 해주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그 선수의 실력을 이용해 먹으려고 그러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선수로 하여금 시합을 잘 하도록 해서 

구단의 수입을 올리고 이름도 자랑하려고 하는 겁니다. 

때문에 1군 선수라고 할지라도 조금이라도 못할 경우에는 가차 없이 2군으로 보내버립니다. 

이게 세상의 방식입니다. 

정도 없고 이해도 없고 배려도 없습니다. 


때문에 신앙이 아주 우습게 되어 버렸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세상 앞에서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자랑한다는 것이 동네방네 나 잘했다고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가 자랑할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사람에게 우월감을 갖거나 잘난 척을 하거나 과시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물어보면 딱 한 가지 대답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내가 했더라도 내가 한 일이 전혀 없는 겁니다. 

이유가 오로지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언제부턴가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 앞에 아무런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 자랑할 것이 많아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다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가만 보세요. 

우리가 자랑하는 것들이 정말 자랑해야만 하는 일인지를 봐야 합니다. 


믿음이 좋은 줄 알았는데 믿음이 진짜 믿음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세상의 힘입니다. 

돈의 힘입니다. 

육체의 힘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아야만 하는데 

오히려 너무 크게 드러나는 겁니다. 

때문에 기독교가 지금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너무너무 초라해져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겨우 대학 들어가는 기도회를 할 때나 위력을 발휘합니다. 

그런 것은 몽땅 다 세상에다 줘도 되고, 우상에게 줘도 되는 겁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을 차지하려고 그냥 예수 십자가까지 다 내려놓고 따라간다는 겁니다. 

아니 십자가를 높이 들고 앞장서서 나가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부끄러운 것인 줄을 모릅니다.


기독교가 뭡니까? 

죽음 앞에서 큰소리를 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죽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 아니라 죽어도 좋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목사는 장례식장에 가서 우는 사람들을 향해서 울지 말라고 큰소리를 치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왜죠? 

여기서의 죽음이 우리 삶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기서 죽으면 이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 앞에 무한한 영광을 돌리는 완성된 은혜를 누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뭡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 죽음 앞에서도 큰소리를 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니 여타의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좀 더 당당해져야만 합니다. 

눈치를 보지 말아야합니다.


9절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은 우리가 왜 이렇게 당당한지 그 이유를 전혀 모릅니다. 

아니 알 수도 없습니다. 

세상 것은 도무지 자랑할 것이 없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할 것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그 비밀을 아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겁니다. 

때문에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만족과 기쁨과 감사를 당연하게 누리는 겁니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하게 보고, 

어리석게 보고, 

바보같이 생각하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겁니다. 

도대체 저 인간은 뭘 믿고 왜 저렇게 웃고 사는지 모르겠다 라는 소리가 들려와야 정상입니다. 


세상은 그 누구도 이런 나의 비밀을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외롭습니다. 

힘이 듭니다. 

결국 나 혼자 만의 싸움입니다. 

내가 서야할 문제이고, 내가 감당해야만 할 몫입니다. 

나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오신 것 같이 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교회 탓하고, 

목사 탓하고, 

남을 핑계할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결국에는 내가 다 책임 추궁을 받을 뿐입니다. 


왜 내게만 탓을 하십니까?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나한테는 다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동의하기 힘들겠지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다 맛 본 사람들입니다. 

다 봤습니다. 

때문에 핑계할 거리가 전혀 없습니다.


고전 4:1-5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는 이미 모든 비밀을 다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이제 또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고 전하고 가르쳐야만 하는 거룩한 책임을 지고 사는 겁니다. 

때문에 오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힘쓰고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주저앉거나 포기하거나 낙심하거나 좌절하는 것조차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소리에 너무 크게 좌지우지 되지도 말아야만 합니다. 

사람이 날 어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채점 앞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제목이 “비밀의 경륜” 입니다. 

경륜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심, 인도하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것이 비밀입니다. 

그 놀라운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이미 알고 믿는 성도입니다. 

비록 인간적인 모습으로 볼 때는 삶이 크게 꽃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삶의 행복을 알고 사는 겁니다. 

삶의 맛을 아는 성도입니다. 


때문에 겉치레의 인사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처럼 이미 확고부동한 믿음 가운데 사는 겁니다. 

아무리 세상의 가치가 모든 사람을 다 유혹해간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서 지조와 정조와 뜻을 지키는 겁니다. 

내 한 목숨이 이 세상의 멸망을 막는다고 하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내 한 목숨이라도 잘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믿음 안에 사는 겁니다. 

오늘 하루만 살다가 그만 둘 것처럼 살고 있는 세상을 결코 부러워하지 않으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믿음의 삶을 지켜가는 겁니다. 

비난과 조롱을 받으면서 내가 서있어야만 하는 믿음의 자리를 지키는 겁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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