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발의 신을 벗으라(출3;1~12)
김우현 감독의 작품 "팔복"으로 유명한 최춘선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이분은 목사님이십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팔복"을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저도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지하철에서 이분을 몇 차례 전철에서 뵌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전철이 10호선까지 있으니까 아마 우리 중에는 아직 타보지 않은 전철이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25년전 일이니까 그 때는 전철이 1호선 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최춘선 할아버지가 전철에서 전도를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좀 특이한 전도를 하신 분이라고 기억됩니다.
보통 지하철 안에서 전도하시는 분들은 차 안에 들어서면 큰소리로 연설을 하듯 얘기를 하셨는데, 이 분은 별로 말을 하지 않으시고, 피켓을 들고 다니셨습니다. 그리고 피켓에 조악한 글씨로 예수. 천국, 하나님, 빨간 십자가를 그려놓았습니다. 대부분 지하철 전도자들이 차 안에 들어오면서부터 큰 소리로 일장 연설을 하는 식으로 전도를 하였는데 이 할아버지는 별로 말씀은 하지 않으시고 피켓을 들고 또 머리에 할아버지식의 모자를 쓰고 그냥 통로를 지나가시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가끔씩 어떤 사람 앞에서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몇 마디하고 지나가신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분이 신발을 신었는지 안 신었는지는 몰랐습니다. 팔복이라는 기록물을 보고 그분이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할아버지에게 언제 신발을 다시 신으실 것이냐고 물었을 때에 통일이 되면 신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최춘선 할아버지는 신발을 다시 신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요즘 신발을 신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발을 신습니다. 아직도 아프리카를 비롯한 동남아에는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오지에는 신발을 신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지 여행자들의 필름을 통해서나 보고 있습니다. 저도 태국에서 잠시 신발을 신지 않고 다녔습니다. 흙이 얼마나 부드럽던지 신발을 벗고 싶은 충동이 일어서 신발을 벗고 꽤나 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에는 학교를 파하고 집에 가는 길에 신발을 벗고 멘 발로 다닌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신발을 벗고 걷는 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지금은 도시에서는 흙을 밟을 수가 없습니다. 웬만한 시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깊은 산골이나 포장이 되지 않았지, 웬만한 길마다 아스팔트 아니면 시멘트로 덮어 씌워났습니다. 그러니 신발을 신지 않으면 다닐 수가 없습니다. 작심하고 신발을 벗지 않으면 신발을 벗을 날이 현대인들은 없을 것입니다. 작년에 신발을 벗고 다닌 지 육 개 월 되었다는 한분을 만났는데 이분도 나름대로 뜻을 두고 신발을 벗고 다니는 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담의 신발을 들어보셨습니까? 성경에 아담은 나오지만 아담의 신발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담은 신발을 신었을까요? 아담은 신발을 신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 신발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제가 전문가가 아니니까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신발을 신게 된 것이 고기를 먹으면서부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이야 가축이라는 것이 있지만 처음에는 다 야생이었겠죠. 그러므로 고기를 먹으려면 야생동물을 사냥을 해야 합니다. 사냥하다보면 신발을 신지 않고서는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야생동물들이 도망갈 때에 좋은 길로 도망을 가겠습니까? 길이 없는 곳으로 도망을 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곳을 신발을 신지 않고 쫓아가다가는 발이 성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신발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아담은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신발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지천에 먹을 것이 널려 있습니다. 아담은 신발을 신지 않은 채로 에덴동산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신발을 신으면서부터 이제 갈 수 없었던 곳도 가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러면서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 욕망이 인간을 사로잡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 욕망의 산물을 오늘 사람들은 문화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이 문화라는 기저에는 욕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여야겠다는 욕망이 문화를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욕망이라는 것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지만 호기심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욕망을 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현대인들은 이 욕망을 꿈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이 욕망에 사로잡히면서부터 그 심령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는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이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더 튼튼한 신발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것이 성공인줄 알았습니다. 정말로 성취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기 욕망만을 위해서 살아가면서부터 그 심령은 병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인간은 최근에 와서야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욕망의 문화들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요즘 말하는 환경운동 또는 생태 보존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청계천을 복개했다가 다시 뜯어내고 청계천에 물이 흐르도록 한 것입니다.
환경운동이나 생태 보존운동은 인간의 욕망의 산물이 얼마나 인간을 황폐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반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신의 일이란 바로 인간이 욕망에 사로잡혀서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바로 인간의 욕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발을 처음 만든 것은 인간의 욕망의 문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신발을 신으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음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얼마 전에 한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얘기입니다. 나무가 얼마만큼 자라는지 아십니까? 나무는 땅의 기운이 올라오는 만큼 자란다고 합니다. 그 나무가 사는 지역의 땅의 기운은 그 지역에서 키가 제일 큰 나무의 높이라고 합니다. 혹시 아파트로 이사를 간다고 하더라도 그 지역에서 제일 큰 나무의 높이 이상으로 이사 가지는 마십시오. 과학적인 연구결과에 의하면 아파트 높은 층에 사는 사람들이 특별히 여성들이 우울증에 많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처음 지으신 환경으로부터 인간이 소외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높이 집을 올리는 것을 문명의 성취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을 하나님의 축복으로부터 소외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레위 지파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모세가 태어날 때에 애굽의 바로는 모든 히브리인의 아이를 다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아이를 숨겨서 키우다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자 갈대상자에 아이를 태워 나일강에 버렸습니다. 마침 그 때에 강으로 목욕하러 나온 바로의 공주가 갈대상자를 발견하고 가서 열어보니 거기에 잘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습니다. 공주는 이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의 아들로 키웠습니다. 공주는 이 아이가 히브리인의 아이인 줄 알고 히브리인 유모를 구했습니다. 미리암이 자기 어머니를 공주에게 소개하여서 모세는 겉으로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지만 실제로는 유모 노릇을 하는 자기 어머니를 통하여 히브리인으로 길러졌습니다. 비록 바로의 왕자로 살았지만 그의 정신에는 히브리인의 정신이 뿌리 박혀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사십이 되었을 때에 성을 쌓는 공사 현장에서 애굽의 감독이 자기 동족인 히브리인을 괴롭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그 감독을 쳐서 죽였습니다. 다음날 또 성을 쌓는 현장에 가보니 이제는 자기의 동족인 히브리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목격하고, 싸움을 말립니다. 아니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로의 종이 되어서 종살이 하는 것도 억울한 일인데 같은 동족끼리 싸우면 어떻게 합니까? 힘을 합쳐도 시원치 않은데 같은 동족끼리 싸우면 어떻게 하냐고 하면서 싸움을 말렸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이 마음도 모른 체 저들은 오히려 모세를 향하여 네가 어제는 애굽의 관리를 죽이더니 오늘은 우리를 죽이려한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모세는 자기가 애굽의 관리를 죽인 것이 발각되자 도망을 쳤습니다. 모세가 도망간 곳은 미디안 광야였습니다. 모세는 거기서 십보라라는 여인을 만나서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제 모세는 미디안의 목자로서 자기 장인의 양을 치는 처가살이 신세가 된 것입니다. 사십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 모세는 백발이 성성한 양치기가 된 것입니다.
모세의 조상 할아버지 야곱도 형의 축복권을 빼앗았다가 자기 삼촌이 사는 밧단아람으로 피난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야곱도 혈혈단신으로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도 거기에서 20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처가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엄청난 재산을 모아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사십년을 처가살이를 하면서도 자기 재산을 하나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능력이 없어서일까요? 아마 이것은 모세가 지난 사십년의 세월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한 후로는 인생에 꿈이 사라졌습니다. 그저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냥 하루 세끼 먹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모세는 꿈이 없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느 날 매일 하던 대로 양을 치러 광야로 나갔는데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시덤불이 불타는데 사라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사실 가시덤불이 불타는 것은 광야에서 양을 치다보면 매일 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모세가 보았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확 타오르는가 하면 곧바로 사그라졌는데 지금 자기가 보고 있는 가시덤불은 사그라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분명히 가시덤불을 활활 타고 있는데 사그라지질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이게 도대체 어찌된 광경인지 보려고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모세에게 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제가 여기 있나이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오늘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모세가 우연히 만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시고 지금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초청한 것입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말씀을 얼핏 들으면 부정적인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정의 하나님이 아니라, 긍정의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지금 모세의 상황이 하나님과 가까이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를 징벌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이제 부자간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아름다운 관계로 나가기 위함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야 나의 거룩함에 너도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하나님의 초청인 것입니다. 네가 신발을 신은체로는 나의 거룩함에 함께 할 수 없으니 신발을 벗고 나의 거룩함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초청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의 죄를 드러내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여전히 인정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을 우리는 견고하게 가져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잘 드러난 장면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하는 유월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13장에서 그 장면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13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의 배반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배반하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이 배반의 역사는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얼마나 주님을 배반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 앞에서 맹세하였던 맹세를 헌신짝 버리듯이 버린 것이 어디 한 두 번입니까? 제자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사랑했던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끝까지 사랑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의 지난날의 모습이 어떠했던지 간에 주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만은 흔들리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사십년간 꿈을 잃은 체로 살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거룩함이란 모세에게는 상관없는 말이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체로 그냥 그렇게 살다가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시덤불에서 나타나시어 나의 거룩함에 참여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거룩함의 꿈이 사라졌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때로는 모세처럼 그냥 이렇게 살다 가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 나이에 무슨 꿈을 꿔. 이 형편에 하루 세끼 먹으면 다행이지, 내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네 신발을 벗으면 네 안에 내가 준 꿈이 있노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신발을 벗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 꿈들이 보입니다. 모세의 머리는 백발로 변했지만, 이제 그의 몸은 팔십의 노인이 되었지만 아직 하나님께서 그에게 준 꿈은 그대로 그에게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그 꿈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발의 신을 벗으라고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그가 그 옛날에 기억도 가물가물한 엄마의 젖을 먹으면서 들었던 이름입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사십년 광야에서 양을 치면서 그 이야기는 다 사라진 옛날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시 그 꿈꾸던 시절의 이름들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모세의 꿈을 다시 살리시기 위함인 줄로 믿습니다. 양치는 사십년 세월에 다 흘러가버린 옛날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 꿈을 지금의 꿈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과거의 꿈을 현재의 꿈으로 창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 모세는 어머니의 품안에서 아브라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모세의 마음에는 꿈이 솟아났습니다. 나도 믿음으로 가리라. 하나님의 음성만을 의지하고 가리라. 주께서 가라 하시면 그 곳이 어느 곳이든지 내가 가리라.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하리라. 이삭의 얘기를 들으면서 순종을 배웠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어떤 어려움과 곤경에 빠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내가 살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나간 옛이야기입니다. 이제 내 마음에서 사라진지 오래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면서 가물가물한 그 이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는 이 이름을 알지 못하느냐? 아브라함도 포기하고 사래도 포기하였지만 하지만 나는 약속대로 백세에 아들을 낳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나는 그 하나님이시다. 너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결코 사라지는 하나님이 아니다. 너의 꿈도 사라지지 않았다. 너의 욕망의 신발을 벗으면 그 꿈은 다시 살아난다. 꿈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너에게 꿈을 준 나는 이처럼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으로 내 앞에 이렇게 있지 않느냐! 이 가시덤불을 보라! 너는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 않고 있지 않느냐? 내가 너에게 준 꿈도 사라지지 않았다. 네 욕망의 신발을 벗어버리면 네 꿈은 다시 활활 타오를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나이에 무슨 꿈이냐고 생각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이대로 살다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신 분들이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욕망의 신발을 벗어버리면 그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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