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한 심령을 찾습니다.(시51;17)
우리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성도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에, 그래 내가 너와 같은 자를 찾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내일부터 학생회 동계 수련회가 있습니다. 이번 수련회에 참석하는 모든 학생들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런 사람들로 변화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런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권세를 갖게 되면 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아무리 얘를 써보고 노력을 하였지만 잘 안되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권세가 주어지면 이제 되어지는 일이 나타납니다. 찬송을 부르면 내 안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충만해지는 일이 나타납니다. 그전에는 "찬송합시다." 해도 입술에 자물쇠를 채운 것처럼 열려지지 않았는데, 큰 목소리로 찬송을 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옆 사람과 소곤거리는 시간이었는데, 이제는 내 영혼 가장 밑바닥에 가라 앉아 있던 내 영의 소원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나의 죄가 모래알처럼 많다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회개의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하여 우리 학생들에게 이런 은혜가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찾으시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권세를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찾는 그런 사람으로 합격만 되면 여러분들에게는 대통령이 갖는 권세보다도 더 큰 권세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이 이번 수련회를 통하여 이런 권세를 받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수련회에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님의 권유를 받아서 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왕 갈 바에야 내가 이번 수련회를 통하여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가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운명은 만남을 통해서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아먹고 살던 어부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운명은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달라졌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하여 내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수련회에 참석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함께 보겠습니다. "상한 심령을 찾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상한'이라는 말은 원어로는 '솨바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깨어진" 또는 "상처가 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사람을 찾으시고, 상처가 난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명절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연못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모여 들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는 낫는다는 속설을 믿고 찾아든 자들입니다. 그 사람들 속에 38년 된 병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명절에 찾아온 것입니다. 아마 이 사람에게도 가족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식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 옛날 얘기입니다. 이름뿐인 가족입니다. 발길이 끊어진지 오래입니다. 친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건강할 때는 함께 어울리며 우정을 다짐했던 그런 친구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 갔습니다. 홀로 남았습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38년 된 병자, 상할 대로 상한 심령을 갖고 있는 이 사람을 주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상한 자를 찾으십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물어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여러분이라면 이 물음에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예 낫고자 합니다. 낫기를 고대하고 38년을 여기 있었습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38년 된 병자는 그렇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시는데 "예! 주님 낫기를 원합니다."라고 그렇게 대답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대답이라는 것이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입니다. 원망입니다. 이제 낫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자기 상황에 대한 원망만 남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오직 원망만이 그의 마음에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원망 밖에 남아 있지 않은 38년 된 병자를 주님은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묻습니다. 주님께서 물으시는 것은 그의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의 원망으로 가득 찬 마음에 소망의 불씨를 지피기 위해서입니다. 그의 상한 심령을 위로하시고 소망의 씨앗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지금도 38년 된 병자처럼 원망 밖에 남아 있지 않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 가운데도 이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주님은 그렇게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신 주님은 오늘도 상한 심령을 가진 분들에게 찾아오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셔서 그 마음에 소망의 불씨를 지피십니다. 원망을 걷어내시고 그 심령의 밭을 새롭게 기경하셔서 옥토가 되게 하십니다. 세상은 상한 자를 외면하지만 주님은 상한 자를 찾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내가 처한 상한 상황이 원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입술의 고백이 원망이 아니라, 소망의 고백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람들은 상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과일을 고를 때에 상한 것을 고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좋은 것 상처가 나지 않은 것을 고릅니다. 상처가 난 것은 쉽게 썩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상처가 나지 않은 것을 고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쉽게 망가질 가능성이 있는 그런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자신을 잘 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형수술도 하고 좋은 옷도 사서 입고, 교양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이것저것 배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이럴수록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과는 멀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찾으시는데 "나는 상하지 않았어, 나는 멀쩡해"라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상한 심령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큰 소리로 들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내 인생이 왜 이래요. 나에게 왜 이리도 고통이 많아요. 왜 나는 밤낮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걱정 없는 날이 없는 것입니까? 내 마음이 너무 상해 있어요.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 심령을 고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 심령을 어루만지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롬3;23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상했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이 다 상해 있는데 자신이 상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상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상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다 상한 영혼인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간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상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성공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상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상함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알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지위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성공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유명세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그는 왕입니다. 이 땅에서 그보다 높은 자가 없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것은 그가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왕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위대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신이 상한 심령인 것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 세상에서는 왕이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상한 심령인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다 상한 자들입니다. 상한 심령이 아닌 사람이 이 세상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일까요? 너나 할 것 없이 다 상한 자들인데, 상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데, 왜 하나님께서 상한 심령을 찾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무도 자기가 상한 심령인 것을 자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상한 심령인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 자기가 멀쩡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떤 바리새인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바리새인의 삶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토색하면 안 됩니다. 불의하게 살면 안 됩니다. 간음을 해서도 안 됩니다. 금식도 하고,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십일조 생활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행위 때문에 내가 의인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생활이 나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 보지 마십시오. 내 속을 들어다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어떤 자인가 보이지 않습니까? 내 심령이 얼마나 상해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속은 들어다보지 않고, 겉만 봅니다. 그리고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속을 들어다보아야 합니다. 나의 겉모습만 보면 안 됩니다. 나의 행위만 보면 안 됩니다. 내 속 심정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얼마나 상한 심령인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 내가 이렇게 상해 있네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간구할 수 있습니다. 올 해에는 우리들의 속을 더 많이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영적인 진보는 우리가 얼마만큼 우리들의 속을 살펴보느냐와 비래할 것입니다. 자기의 심령을 살펴보는 자가 영적인 진보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상한 심령을 발견하게 되면 통회하는 마음이 찾아옵니다. 참으로 아픕니다. 눈물이 납니다. 나의 심령을 살피면서 눈물이 나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상한 심령입니다. 외부에서 오는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지만, 더 귀한 눈물은 나의 마음을 살핌으로써 흘리는 눈물입니다. 내 심령을 살피면서 흘려본 눈물이 있습니까? 남편이 속을 썩여서 눈물은 흘리는데, 자식이 속을 썩여서 눈물은 흘렸는데, 내 상한 심령을 보고 눈물을 흘려보았습니까? 내 안에 있는 죄악을 보면서 눈물을 흘려보았습니까? 상한 심령 속에는 통회의 눈물이 있습니다. 자기의 영혼을 살피면서 흘리는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상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 상한 자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다 상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우리 모두가 다 상한 자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상해 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상한 심령인 것을 고백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찾으십니다. 세상은 상한 자를 원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상한 자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 상한 심령에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통회의 눈물을 씻어주십니다.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통회의 눈물을 조롱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통회의 눈물을 멸시치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상한 심령이 되어서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나의 심령을 살펴보며 하나님께 통회의 눈물을 흘립시다. 내 심령의 죄악을 살피며 눈물을 흘립시다. 우리 이 시간 통성으로 함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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