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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말자(갈2;15~21)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말자(갈2;15~21)

 

성도는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날마다 은혜로 사는 사람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모는 삶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겨야 했습니다. 오해를 받기도 하였고, 모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은 변하지 않고 주의 일에 힘썼습니다. 이제 사도로서 인정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우리는 바울파라고 주장하는 그룹도 생겼습니다. 어쩌면 고린도뿐만 아니라 많은 교회에서 바울을 따르는 바울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모든 일들이 자기의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고전15;10절을 보면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바울 사도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의 함께 하신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속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신 은혜가 항상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알고 날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이 모습에도 하나님의 함께 하신 은혜가 있습니다. 혹자는 내가 이렇게 어렵고 힘든데도 정말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은혜가 있는 것일까라고 의문이 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 깊이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이 어려움과 고통 속에도 하나님의 함께 하신 은혜는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육체의 가시의 고통으로 너무 괴로웠습니다. 날마다 전도할 곳을 찾아서 이동을 하려면 얼마나 건강이 중요합니까? 요즘처럼 안락한 교통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걸어서 다녔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이 아프다는 것은 바울과 같은 전도자에게는 정말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 문제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세 번을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육체의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 해도 너무하십니다. 내가 편하기 위해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도한 것인데 그러실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말할 법도 한데, 바울 사도는 깊이 다시 기도하니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가 없으면 내 육체는 편할지 모르지만, 내 영혼은 교만해져서 넘어지는 것이구나.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넘어지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라는 안전장치를 주셨구나. 그렇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대부분 이런 안전장치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 주 금요일에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해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집에 갔더니 집사람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래도 하나님이 아직까지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다른 것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아들하나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제가 사모하기 위해서 교사도 그만두고 오직 자식위해 그것도 택도 없는 기도가 아니라, 실수만 하지 않고 자기 실력 발휘해서 K대 합격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 그러실 수가 있느냐는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해봐도 그런 마음이 들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여기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축복의 인사를 합니다. 성도의 아픔은 하나님의 안전장치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아픔은 하나님의 안전장치입니다. 성도의 고난, 성도의 실패,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안전장치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안전장치가 없으면 내 영혼이 넘어지기 때문에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안전장치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육체의 가시가 하나님의 안전장치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이런 고통으로 염려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다시 한 번 깊이 기도해 보십시오. 그것이 내 영혼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안전장치는 아닌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위하여 그러한 안전장치 달아 놓으신 것은 아닌지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올 한 해도 하나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가 우리들에게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은혜를 고백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기대하지 않은 것을 받을 때에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거저 받았을 때에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두 종류의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받는 은혜가 있고, 깨닫는 은혜가 있습니다. 받는 것은 그릇만큼 받습니다. 아무리 많이 주어도 그릇이 작으면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그릇만큼 받습니다. 성도들이 기도원이나 부흥회를 통해서 받는 은혜는 그런 은혜입니다. 자기 그릇만큼 받습니다. 받는 은혜는 그릇만큼 받습니다. 이 받는 은혜의 특징은 충만감이 있습니다. 작은 그릇이나 큰 그릇이나 관계없이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은 사람도 은혜를 충만히 받을 수 있고,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도 충만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릇만큼 받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릇만큼 받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두 번째로 깨닫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주어진 것을 발견하는 은혜입니다. 새로 받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고 깨닫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릇이라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성경 한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왕하4;1~6까지입니다.

1)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2)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3)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말고

4)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5)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 오고 그는 부었더니

6)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기름을 부을 그릇이 없자 기름이 곧 그쳤습니다. 이처럼 받는 은혜는 그릇이라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깨닫는 은혜는 그릇이라는 조건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릇과 상관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릇과 상관이 있는 받는 은혜에 관심을 많이 갖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날마다 은혜의 삶을 살기 위해서 받는 은혜가 아니라, 깨닫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릇이라는 것은 항상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생도의 아내도 동네에서 그릇을 빌려왔지만 무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릇이라는 것은 이렇게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한계가 있다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다 소진되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원에 갔다 오면 은혜 충만한 것 같은데, 기도원이나 부흥회에서 받은 은혜가 얼마나 갑니까? 일주일 가고, 좀 길면 한 달 갑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원 문을 나오면서 은혜가 소진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도원에서 은혜 받고 버스타면서 먼저 자리에 앉으려고 싸우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이처럼 받는 은혜는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언젠가는 말라버립니다. 받은 것은 언젠가는 다 소진되고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받을 때는 그 은혜가 영원할 것 같죠? 하지만 받은 은혜가 영원한 법은 없습니다. 받은 것은 언젠가는 소진되고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받은 은혜로는 날마다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받은 은혜로는 날마다 찬송할 수가 없습니다. 받은 은혜로는 항상 기뻐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날마다 은혜를 받으면 되겠지만 날마다 기도원 가고, 날마다 부흥회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가 날마다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날마다 찬송하고, 항상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하나님의 소원을 만족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성도의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받은 은혜로는 하나님의 소원을 온전히 만족시키는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깨닫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깨닫는 은혜는 영원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사라지지 않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말라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영원한 은혜인 것입니다. 요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은혜는 깨닫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받는 은혜보다 깨닫는 은혜가 더욱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 은혜를 깨닫지를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21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은혜가 바로 이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깨닫는 은혜는 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어떤 은혜입니까? 우리가 폐할 수 없는 은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본문 20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영원한 은혜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이 은혜는 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원한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깨달아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살아계심이 믿어지시는 분만 아멘 하십시오. 그냥 옆 사람이 아멘 하니까 할 수 있는 아멘이 아닙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심이 믿어지는 사람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내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심이 믿어집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교리적으로는 믿어지지만 깨달아지지는 않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셨습니까?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서 여러분을 다스리고 주장하는 주인이 되셨냐는 물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자기의 종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자기가 부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이라고 존칭은 사용합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예수님을 종으로 부립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부려야 하는데, 내가 예수님을 부리려고 합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부탁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내용적으로 보면 자기가 주인이고 예수님은 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내 안에 사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사셔야 합니다. 그분이 나를 다스리고 부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주님은 내안에 살아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주님이 살아 계십니다. 하지만 내가 살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언제나 주님은 주인이 아니라, 종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날마다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내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깨닫는 은혜는 내가 죽음으로 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갈5;24을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수많은 일들을 해야 합니다. 우리 여선교회원들은 지금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들이 아주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기의 지식과 지혜로 자녀를 양육하려고 합니다. 대부분 그렇게 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날마다 자녀와 싸웁니다. 싸우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싸움의 목적은 항상 내가 이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지기 위해서 싸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기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싸움은 커집니다. 양육을 하려고 시작은 하였는데 항상 화가 난 상태로 상황이 끝납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양육할 때에 내가 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힘들다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먼저 자녀를 양육하기 전에 “하나님! 저는 죽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예수님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에 저도 함께 못 박혔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십시오. 제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오직 저는 당신의 도구로만 사용되길 원합니다.” 이런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는 자 안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깨닫기를 축복합니다. 받는 은혜보다 더 귀한 은혜요, 우리가 영원토록 찬양하고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은혜는 내가 죽는 자 만이 경험하는 은혜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 안에 사신 주께서 역사하십니다. 내가 하면 더 문제를 크게 일으키지만 내 안에 계신 사신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우리의 삶은 더 깊은 맛을 낼 것입니다. 식품도 발효식품이 최고 이듯이 인생도 그렇습니다. 나의 육과 정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당신의 인생도 최고의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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