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막16;1~8)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신 날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좋은 날인지요? 저는 지난 고난주간 동안 금식을 하였습니다. 일주일 금식을 작정하고 어제로 금식을 마쳤습니다. 오늘부터 먹을 수 있게 된 것이죠. 다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대되고 좋은지요? 주님의 부활보다 내가 다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최승수 목사님으로부터 부활절 문자를 받았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happy easter 부활의 기쁨과 생명과 능력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소망과 기쁨과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소망과 기쁨과 그 능력을 맛보는 것일까요? 우리의 입으로는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그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맛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말하는 부활은 그림의 떡이 아니겠습니까? 그림의 떡은 보기만 해도 입에서 군침이 돕니다. 정말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합니다. 하지만 그림의 떡은 아무리 크고 맛있어 보여도, 보는 순간에는 약간의 기쁨이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유익도 없습니다. 저는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도 그림의 떡과 같은 것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떡을 보면서 한순간 "야! 그 떡 참 맛있겠다."하는 정도가 아닐까요?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4)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들이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부활이 이렇게 중요한 것인데,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부활의 소망과 기쁨과 능력을 맛보고 누리느냐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니 다른 사람은 그만 두고 나는 정말로 주님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맛보고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내게 있어서도 주님의 부활이 그림의 떡이 아니었습니까? 입으로는 주님의 부활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주님의 부활이 나의 삶에 있어서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고 능력이 되었냐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나의 삶에 있어서 기쁨도 소망도 능력도 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아무리 주님의 부활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축복의 인사를 합시다. "주님의 부활이 당신에게 그림의 떡이 아니라, 산 떡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앞에서 부활절의 기쁨보다 내가 다시 먹을 수 있는 기쁨이 더 큰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 먹는 기쁨을 아십니까?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먹는 것하고 기쁨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때가 되었으니까 먹는 것이고, 그냥 먹어 왔으니까 먹는 것이지 그것이 무슨 기쁨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마지못해서 먹는 사람도 있고, 죽을 수 없어서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먹는 기쁨을 모릅니다. 제가 다시 먹을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고 감히 말씀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사순절 기도를 하면서 이번 고난주간에는 조금이라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내가 주님의 삶을 닮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금식이라고 생각하고 금식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금식을 하였더니 다시 먹는 기쁨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실 나의 금식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이 준비한 향품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금식이 주님께 무슨 소용이 되며, 유익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은 저에게 다시 먹는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작은 기쁨일 뿐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기쁨에 비할 수 없는 작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님을 닮고 싶어서 그렇게 살아간다면 주님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능력에 도달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님 닮고 싶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냉수 한 그릇을 주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살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걸인에게 얼마 안 되는 것을 줄 수도 있습니다. 주님처럼 살고 싶어서 힘들고 지친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자라서 주님의 부활의 기쁨에 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본문 1~3을 함께 보겠습니다.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막 16: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막 16: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지금 세 여인이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고 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주검에 바를 향품을 들고 가고 있습니다. 향품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은 자를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산자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누가복음 24장에서도 병행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마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천사의 말이 있습니다. 천사가 이 여인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하십니다. 이 천사의 질문은 지금 이 여인들의 행동에 대해서 합당하지 않는 행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향품을 가지고 부활하신 주님을 찾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도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찾는 이 여인들의 모습이 처음에는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이 여인들이 주님께서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이렇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정말로 저들이 해야 할 일은 축 부활이라고 쓴 대형 프랑카드를 만들어서 갈릴리 호숫가 주변에 붙이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지 왜 향품을 들고 무덤에 찾아가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향품이라도 들고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이천년 전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축부활이라는 대형 플랑카드를 만들어 갈릴리 호숫가에 붙이고 거기서 부활의 주님을 기다렸겠습니까? 아마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향품을 들고 주님의 무덤을 찾아간 사람도 세여인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여인의 증언을 듣고 나서 베드로가 저들의 말이 정말로 사실인가 확인하러 무덤 속을 들여다봅니다.
저는 성경에 나오는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향품이란 인간이 주님을 위해 준비할 수 전부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가 나의 생명 드린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나의 재물을 드린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주님께는 별로 쓸모도 없고, 유익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나의 향품에도 주님은 큰 은혜로 응답하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친히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주검에 바를 향품을 준비하여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일으키신 놀라운 이적을 수없이 보았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다시 산 것도 보았을 것이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그 자리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 대한 이야기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러 안식 후 첫날 주님의 무덤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간다면 향품을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근사한 옷 한 벌과 샌들을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이 세 여인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0,11절 말씀을 보면 다른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10,1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마리아가 직접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리었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베드로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러 무덤 속을 들여다보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주님과 동시대를 살았고 주님과 함께 하며 주님께서 베푸셨던 그 놀라운 이적들을 체험한 사람들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공적으로 주님의 제자들과 얼마나 큰 격차를 보이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마 제자들이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얘기를 들으면 깜짝 놀라 자빠질 것입니다. 자신들도 믿지 못했던 부활인데 어떻게 저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한국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다니 하면서 혀를 차지 않을까요?
물론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그림의 떡과 같다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주님의 부활이 나의 기쁨으로, 주님의 부활이 나의 소망으로, 주님의 부활이 나의 능력이 되어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향품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분명 처음에는 향품을 준비한 여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주검에 바를 향품을 준비하여 무덤으로 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은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그 향품에는 주님을 향한 세 여인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준비한 향품은 자신들을 위한 향품이 아닙니다. 온전히 주님께 쏟아 붓기 위한 향품입니다. 사랑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온전히 쏟아 부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보응이나 기대가 없는 것입니다. 쏟아 부을 수 있음으로 만족하는 것이요. 쏟아 부음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쏟아 부음으로 기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이런 향품이 있습니까? 온전히 주님만을 위해서 쏟아 부을 수 있는 향품이 있습니까? 어떤 대가나 어떤 기대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께만 쏟아 부을 수 있는 그런 향품이 있습니까? 이런 향품을 준비한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부활이 기쁨이요, 소망이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기쁨이요, 소망이요, 능력이 되길 축복합니다. 온전히 주님께 쏟아 부을 향품을 준비합시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기에, 오직 주님을 닮고 싶어서, 오직 주님처럼 살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당신이 준비한 향품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함께 읽어봅시다.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제게 가장 강력하게 다가온 말씀이 '7절'속에 나오는 이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신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감동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면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는 구나.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은 무슨 특별한 일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은혜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은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면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면 주님이 우리들에게 하신 그 모든 약속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특별한 것을 구하려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만 하면 됩니다. 주님이 내게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면 우리는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를 주장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면 우리는 거기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그들에게서 어떤 특별한 생동감이나, 기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저들의 모습은 여전 어둡고 그늘져 있음을 우리는 성경에서 봅니다. 언제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체험하였습니까?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나서야 저들은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육의 눈으로는 부활의 주님을 본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육의 사람에게는 주님의 부활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의 사람의 관심은 오직 육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과 기쁨과 능력은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영에 속한 사람만이 부할의 소망과 기쁨과 능력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영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요6;63을 보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이 살아야 사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육이 아무리 강건하다고 할지라도 영이 죽어 있으면 사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렇습니다. 영에 속한다는 것은 내가 주님의 말씀의 통치가운데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그 사람 속에 있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는 사람이 진실로 영에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부활의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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