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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행의 축복(눅24;13~35)

동행의 축복(눅24;13~35)

 

 

주님의 부활은 그림의 떡이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은 산 떡이요, 생명의 양식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소망과 기쁨과 능력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부활의 신앙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고전 15;20에 보면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무에는 열매가 하나만 열리지 않습니다. 수 없이 많은 열매들이 나무에 맺히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주님께서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뒤를 이어서 성도들이 또한 부활의 열매가 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뒤를 이어 주를 믿는 성도들이 모든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원수 마귀가 주관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사망 권세의 위협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돈이 많아도 사망 권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권력을 쥔 자라고 할지라도 사망 권세를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사망 권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망 권세를 피할 수 있는 한 길이 있으니, 그것은 부활의 신앙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의 사망 권세에 눌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롬8;35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렇습니다. 부활신앙을 소유한 자를 이길 권세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 어떤 환난도 부활 신앙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 어떤 곤고나 핍박이 부활 신앙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부활 신앙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야 말로 사망 권세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신앙인 것을 믿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부활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이 핵심일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2~24을 함께 보겠습니다.

(Luk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Luk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Luk 24: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 말씀을 보면 지금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는 주님의 부활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주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은 이미 듣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 번 들은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지금 슬픔에 쌓여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이 부활신앙의 시작이지만, 주님의 부활이 내게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되고 능력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부활신앙이 주님과의 동행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활신앙의 핵심은 주님과의 동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부활신앙은 소망과 기쁨과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할 때에 우리 가운데 소망과 기쁨과 능력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동행의 축복" 우리가 진정한 부활신앙을 알려면 주님과의 동행의 축복을 맛보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동행의 축복을 맛보지 못하고 부활신앙을 말한다는 것은 떡을 먹어보지도 못하고 떡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그 축복을 맛보아야 주님의 부활이 내게 어떤 것인지를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듣는 가운데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맛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함께 가는 것을 동행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도 지금 동행하고 있는 것이죠. 사람은 동행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최성수라는 가수가 부른 '동행'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아직도 내게 슬픔이 우두커니 남아 있어요

그 날을 생각하자니 어느새 흐려진 안개

빈밤을 오가는 마음 어디로 가야만 하나

어둠에 갈 곳 모르고 외로워 해메는 미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울어줄 사람 있나요?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사랑하고 싶어요 빈가슴 채울 때까지

사랑하고 싶어요 사랑 있는 날까지

 

어쩌면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행이 없어, 슬픔 가운데서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동행이 되어줄 사람이 있는가? 그렇게 찾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다고 할지라도 나와 함께 동행할 사람이 없으면 고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주셨습니다. 그 동산이 얼마나 아름다운 동산입니까?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동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얼마 있지 않아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아담은 참으로 외로웠습니다. 그 외로움이 하늘에까지 사무쳤기에 하나님은 아담을 위해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란 결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라, 동행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주신 그 에덴동산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한 시 한 수 짓지 않았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아름다운 강이 있었습니다. 어디 강만 있었겠습니까? 강이 있으니 아름다운 계곡도 있었을 것이요, 그 강과 산에서 뛰노는 많은 새들과 들짐승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그런 것들에 대한 감상을 하였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하와를 만났을 때에 인류 최초의 노래가 탄생하였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인류 최초의 노래는 언제 탄생되었습니까? 아름다운 계곡을 보고 한 노래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강을 보고 한 노래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한 노래가 아닙니다. 인류 최초의 노래는 아담이 동행자 하와를 보고 한 노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노래합니까? 당신의 동행자를 보고 노래를 부른 적은 있습니까? 오늘 저녁에 부부가 서로를 보면서 노래 한곡씩 하면 어떨까요? 우리는 나의 동행자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옆 사람과 함께 축복의 인사를 합시다. "당신의 동행자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보시길 바랍니다." "나도 당신의 동행자입니다." 성도는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동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모습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겉으로는 동행자라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동행자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참된 동행자는 서로의 모습 속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 장애인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행사에 참석하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함께 식사를 하는데, 일행 중에 결혼을 앞에 둔, 정상인 총각과 장애인 처녀 한 쌍이 있었습니다. 총각이지만 나이가 들고 또 외모도 꽤재재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처녀는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서로를 보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것입니다. 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사지 멀쩡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래서 만나기만 하면 서로의 허물과 약점을 들춰내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동행자는 서로에게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어야 진정한 동행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의 동행자를 향하여 최초의 노래를 불렀던 아담이 몇 날이 못가서 자신의 동행자 하와를 원망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은 영원한 동행자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사랑을 맹세했다고 할지라도 그 동행이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또 동행이 곧 영원한 행복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결혼만 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면 행복할 것이라는 꿈을 꾸지 않았습니까? 정말로 초가삼간이라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님'만 있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던 날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님'만 있음으로 행복합디까? 동행자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동행으로 인하여 아파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왜 만났을까?"라고 동행을 원망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위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인간은 사람의 동행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두 제제가 서로가 동행이 되어 엠마오로 함께 내려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동행이 저들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킬 수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의 동행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혼자 가기 보다는 함께 가는 동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만의 동행으로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만의 동행으로는 우리가 삶속에서 경험하는 그 많은 문제들을 온전히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또 다른 동행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과 동행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마28;20에는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과 세상 끝날 까지 함께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동행하시길 원하신다는 의미가 더욱 중요합니다. 나와 동행하시지 않는 주님이라면 주님의 부활이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주님의 부활을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16절 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Luk 24:13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Luk 24: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Luk 24:15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Luk 24:16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5절에 보면 엠미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동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눈이 가리어져 지금 자기들과 동행하는 한 사람이 예수님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말씀을 읽어보면 지금 두 제자가 무슨 얘기를 하면서 엠마오로 가고 있냐면 몇일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내려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가고 있는데, 지금 그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동행 하고 계시는데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지금 자기들과 함께 동행 하고 계신 것입니다. 같은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과 하나라고 하기에는 뭔가 조금 부족한 것이 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지금 제자들과 주님이 동행하고 있지만 완전한 동행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함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요? 16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의 눈이 가리어져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제자들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일까요? 첫 번째로 제자들의 경험적인 지식이 저들의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의 경험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갖고 있는 경험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이 죽음이라는 경험적 지식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경험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체험의 종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체험하지 않고서는 신앙을 말할 수 있는 부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험함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많은 부분이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경험을 절대화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한 체험이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나는 기도원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체험을 절대화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는 가운데 은혜를 받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찬송을 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성경공부를 통해서 은혜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의 체험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나의 체험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이 가리워집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9;20,21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1Co 9: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1Co 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 사도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처럼 행하였고, 율법 없는 자들을 위해서는 율법 없는 자처럼 행하였습니다. 자기의 경험을 절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한 경험은 경험대로 귀하게 간직하십시오. 하지만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지 말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동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이 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기 전에 예루살렘에서 두 번이나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접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들은 말씀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세계는 어떤 세계냐면 말씀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가 신앙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신앙의 세계가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말씀을 초월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세계는 말씀 안의 세계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이 바로 신앙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나가길 원하십니까? 말씀을 믿고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다른 첩경이 없는 것입니다.

 

본문 28~30을 함께 보겠습니다.

Luk 24: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하는것 같이 하시니

Luk 24:29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Luk 24:30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Luk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님은 길을 가면서 두 제자에게 말씀을 풀어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그렇게 동행하다 보니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가 예수님을 강권하여 예수님께 "우리와 함께 유하자고" 청합니다. 아마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제자들은 그 말씀에 많은 은혜를 받고 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여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떡을 가지고 축사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다고 3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떡을 받으면서 그때서야 주님을 바로 보게 되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떼어 주시는 떡을 받을 때에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다는 것이 오늘 성경의 증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매우 상징성을 갖고 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떡은 성경에서 말씀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말씀을 받을 때에 저들의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에 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을 때에 비로소 주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행의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받았으면 '아멘'합시다. 말씀을 받은 사람은 주님과의 동행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말씀을 받았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2절을 보면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라 하였습니다. 말씀을 받았을 때에 속에서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제자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시대의 슬픔 중 하나는 사람들의 마음이 너무나 냉랭하다는 것입니다. 이 냉랭한 시대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졌다는 것은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받으면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려가는 삶이 올라가는 삶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말씀을 받는 순간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발견한 그 순간 주님은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제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제자는 엠마오로 가던 길을 돌이켜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은 주님과 진정으로 동행하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와 동행하길 원하시는 주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이 가리어져 있으면 주님이 나와 동행을 하고 있지만 그 주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히는 안약입니다. 말씀은 동행의 축복임을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가장낮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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