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말을 하는 자
민수기11:1~3
2002년 10월 13일 주일낮 설교
11:1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11: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11:3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 칭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연고였더라.
설교:
옛날 어느 나라에 두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마을에는 마을이름보다 더 잘 불리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한 마을은 感謝村(thanks village)이고 다른 한 마을은 不評村(complain village)이었습니다.
불평촌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불만이고, 무엇이든지 근심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매사에 분노하고, 또 좋은 일이 일어나도 혹시 잘못되어 다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예상을 하면서 걱정을 했답니다. 그들은 매사에 불평과 불만, 근심의 연기가 항상 입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불평촌 사람들은 주소가 그 동네이고 또 모두가 불평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이 비극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촌에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가운데서도 감사를 했습니다. 고생을 해도 감사하고 또 시련을 받을수록 감사의 농도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봄에는 꽃이 피는 것에 감사했고 여름에는 잎이 무성한 것에 감사했으며, 가을에는 추수하는 것에 감사하고 겨울에는 나뭇가지는 앙상하지만 그 뿌리가 있는 것에 감사를 했습니다.
하루는 불평촌에 사는 사람이 감사촌에 놀러왔다가 감사하는 소리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감사를 배웠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범사에 감사하다가 저녁이 되어 불평촌에 돌아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에이. 감사촌에 갔다가 얻어먹은 것도 없이 감사만 하고 왔네." 하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촌에 살고 있습니까? 감사촌입니까 불평촌입니까? 그런데 누구나 다 감사촌에 살고 싶으면서도 쉽지 않습니다. 감사는 감사촌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촌으로 이사를 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불평촌에 살던 한 사람이 이왕이면 감사촌에서 살자고 이사를 했더니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되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루를 살면서 하는 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어떤 종류가 더 많을까요? 부정적인 말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긍정적인 말이 더 많을까요? 우리 입술에서 어떤 말이 더 많이 나오느냐가 우리의 幸福度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 살펴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간의 애급생활을 마치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로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넌 그들의 모습을 통해 참으로 이상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은 애굽을 탈출하는 過程속에서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어떤 은혜입니까?
하나님이 대 애굽의 왕 바로를 10가지 재앙으로 손을 반짝 들게 합니다. 당시 애굽 왕은 애굽사람들에게는 신이었습니다. 그런 신과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두 손을 들게 된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애굽을 나와 도망치자 추격하는 애굽 군대를 막으시는데 불기둥을 직접 움직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손도 못 대게 하십니다. 또 가로막은 홍해를 하나님이 갈라놓으셔서 그 사이를 한사람도 다치지 않고 모두 건넌 체험을 했습니다. 더 나아가 뒤따라오는 애굽 군사를 그 홍해 속에 다 수장시키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았습니다. 한 가지 더,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새벽마다 만나를 내리셔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도록 친히 役事하셨습니다.
이 정도 되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세는 분명 놀랍게 달라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깊이 살펴보세요. 그들의 입술에는 원망 불평이 가득합니다. 어찌 이것이 합당한 자세라 할까요? 결국 하나님이 그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으시고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장막 한쪽에서 화재를 일으키십니다. 그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 닥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진압을 해보려 해도 물이 넉넉지도 않으니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때서야 백성들이 모세를 향해 부르짖게 되고 결국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불이 꺼지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받을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오늘 본문을 향해 3가지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1. 왜 이스라엘은 원망 불평을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1)받은바 은혜는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영원히 종으로 살아야만 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로 무혈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들의 힘으로 독립운동을 벌인 적이 없습니다. 또 군사력을 모아 힘으로 탈출한 것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승리케 하심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홍해 건넌 사건이 이것을 반증합니다. 어린들 찬송가 홍해 어떻게 건넜나? 헤엄쳐 아니, 배타고 아니, 오직 하나님이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갈라놓으셨고 그 사이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그 홍해를 건넌 후 너무 좋아 하나님을 찬송하며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잠간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은혜를 곧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우가 없나요? 사례는 다를 것이나 똑같습니다. 부흥회를 할 때면 '아멘 아멘'하며 주님께 헌신을 다짐하지만 그 한 주간만 반짝할 뿐입니다. 병을 고침 받은 경우도 아플 때는 치료해달라고 울며불며 기도하지요. 그러나 막상 치료되면 병원에서 치료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맙니다. 또는 날 시간이 되어서 났다고 생각하고는 언제 아팠느냐 싶게 지나갑니다. 자녀가 아픈 경우도 그렇습니다. 나는 자식이 아팠다가 나은 경우 치료받아 감사하다고 감사헌금 드린 사람을 별로 본적이 없습니다. 왜 이 모양일까요? 한마디로 받은바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2)인간의 체험과 경험의 한계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체험하면 확실할 것 같이 보입니다. 자기가 경험한 것은 의심치 않고 믿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변화 산에서 예수님 변화하신 모습 보았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적어도 이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모습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잡혀갈 때 다 도망치고 죽으신지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체험하면 확신할 것이라고요? 손으로 만져보면 의심치 않고 믿을 것이라고요. 아닙니다. 성경을 보세요. 죽은 자 3번씩 살려도 안 믿습니다. 나사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이렇게 세 명씩 살려주는 것을 그들의 눈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다는데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 병 고침 받아보면 확실할 것이라고요? 아닙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체험하고 경험해도 인간은 그때뿐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보세요. 오히려 소위 은혜 받았다는 자들이 더 실망을 끼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체험을 경험을 의지하지 말라고 오직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원치 않다고요? 우리도 똑같은 종자들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봤다고요? 체험했다고요? 그럴수록 깨어 있어 기도하고 조심하시기를 바랍니다.
3)우리 속에 거하는 무서운 탐심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원망하고 불평하였을까요? 가는 길이 힘들다고, 먹을 것도 맛이 없고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고 불평하며 원망합니다. 차라리 애굽이 더 날 뻔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을까요? 한마디로 밑 빠진 독같이 한없는 탐심 때문입니다. 그 탐심이 이스라엘을 이토록 비참한 신세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이 재미없는 가장 무서운 이유, 그리고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세력은 다름 아닌 탐심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탐심이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일시적 행복은 있을 것이나 영원한 행복은 찾아오지 않음을 믿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 犯罪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敎訓하십니다.
각종의 재난으로 경고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싫어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요, 교만이요, 탐심입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싫어하는 것은 원망 불평입니다. 그런데 이런 범죄 속에 사는 자를 하나님은 어떻게 처리 하실까요?
일차로 깨닫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경고하십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재난을 당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스라엘이 원망 불평하니 그들 진영에 화재가 나게 합니다. 성경에 불로 심판하시고 물로 심판하시고 더 나아가 악질로 심판하시는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요? 제일먼저는 감사할 줄 모르고 원망 불평하는 자들에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재난을 보는 시각이 달라야 합니다. 재남이 닥쳤을 때 세상 사람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천재지변이네, 환경 파괴 때문이네 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두가 다 사람의 죄악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인재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재난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로 다가오게 됩니다. 지난 루사 태풍으로 자기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재난입니다. 이런 형태의 재난이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임이 닥친 심판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게 됩니다. 노아 홍수 심판도 그렇습니다. 불 심판은 그래도 소생의 길이 있습니다. 물 심판은 아주 무섭습니다. 현대인이 당하는 재난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요즘 흔히 일어나는 재난은 홍수, 화재, 질병, 교통사고 등입니다.
물론 이런 모든 재난이 하나님의 심판은 아닙니다. 욥이 당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시험하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그런 재난 앞에서 스스로를 냉철하게 돌아보고 무엇이 문제인가를 찾아내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우리의 원망 불평의 삶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요?
1)회개입니다.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를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깨닫게 하시는 능력이며 또한 성경이 우리 스스로를 보게 하는 거울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성도는 스스로를 보며 책망하고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했던 것처럼 시편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스스로에게 명령하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원망 불평이 가득 찬 내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문제를 남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무서운 모습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재난을 멈추게 하는 최고의 지름길입니다. 40일이 지나면 이성이 무너진다! 외쳤던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여 심판이 돌이켜졌던 니느웨 성처럼 우리에게 닥칠 재난과 심판은 오직 회개만이 멈출 수 있는 능력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회개보다 더 적극적인 것은
2)오직 감사와 찬송으로 악한 말을 내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감사와 찬송은 나를 주님께로 가까이 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원망 불평하다가도 찬양과 감사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을 자세히 보세요. 처음에는 어찌하여~ 하시나이까? 하며 불평하고 원망하듯 하나 뒤쪽을 보면 반드시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끝이 납니다.
그러기에 감사 찬송은 평상시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 가정은 복잡합니다. 남편은 아내와 말다툼하고, 형제는 서로 싸우고, 자식은 서로 욕하는 상태이고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집안엔 불평만이 가득 찼습니다. 여러분 집안은 어떤가요? 만약 누가 화분을 깨트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잘난 가정은 "어떤 놈이 이것을 깨트렸어, 왜 당신은 이것을 이런 곳에 두는 거야", 그러면서 대판 난리가 납니다. 그런데 평화로운 가족은 "아, 내가 그런 곳에 놓아둔 것이 잘못이었어요.', '아뇨, 제가 부주의한 탓이지요." 하며 모두 자기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집안이 평화롭고 안정이 됩니다. 여러분가정이 이런 천국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마지막으로 주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가만 보면 원망 불평 뒤에는 사랑이 식었다는 표현입니다. 왜 부부가 싸울까요? 여러 가지 이유 있으나 제일 큰 이유는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왜 고부간이 불편하나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신앙생활이 힘드나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보신 것은 사랑입니다. 왜 하실 말이 많았을 텐데 왜 사랑을 물었을까요? 사랑이 모든 것을 덮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만 하면 문제 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남의 자식이 못된 짓을 하면 꼴을 못 볼까요? 사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 계모가 자식을 구박하는 것입니까? 그것도 사랑문제입니다. 왜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가 다른가요? 그것도 사랑문제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의 입술에서 오직 감사 찬양이 날마다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도 사랑스럽고 성도도 사랑스럽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모든 것이 짜증이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직분이 힘들고 지겹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의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원망불평이 터져 나올 때 좋아할 자는 오직 마귀뿐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이고 결국 내게는 놀라운 복이 넘쳐날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인가 아니면 원망 불평인가? 예수님이 남을 원망하신 적이 있나요? 예수님이 불평하신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오직 감사하며 찬송하며 믿음의 말을 하셨습니다.
그 차이가 우리 인생의 행복을 바꾸어 놓습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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