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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나무목교회

[스크랩] 이방인 / 엡 2:11-13 (신311쪽)

세상은 오랫동안 전쟁 중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 세상 어디쯤에서는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서 하나 되자고 하는 구호가 가장 많이 넘쳐 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이 하나 되고, 

나라가 하나 되고, 

국민과 백성이 하나 되고, 

이념이 하나 되자고 하는 구호가 세상 곳곳에서 넘쳐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나무목교회 예배당 벽에도 걸려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도“사랑 안에 하나 되는 나무목교회”라는 표어를 떡 하니 걸어 두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만큼 하나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넘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만큼 또 하나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때문에 여전히 하나 되자고 구호를 외치면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고, 

서로 마음의 문을 닫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고 있는 겁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이야 말로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오늘 현실이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크게는 남북으로 갈라서 있고, 

남쪽에서는 다시 동서로 갈라서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동서남북으로 갈라서 있는 경우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기독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와 대한기독교장로회가 있습니다. 

예수교와 기독교입니다. 

예수님과 그리스도가 묘하게 대치하고 있는 국면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안에 갈라져 있는 수많은 교단들이야 두 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적인 원조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시작된 이런 구분이 

인간적인 몇몇 조건-역사, 민족-들을 거치면서 아주 뿌리 깊게 자리 잡았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 당시에는 이미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던 것입니다. 


아울러 앞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기독교 안에서, 

교회 안에서, 

신앙 안에서도 이미 상당한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때문에 지난주에는 선민 이스라엘에 대해서 생각을 했지만 

오늘은 같은 본문을 가지고 이방인에 대해서 한 번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깊은 의미는 

바로 우리 안에서 하나 되는 은혜를 찾아보고자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11-12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우선 호칭으로는 할례를 받지 않는 무리라고 유대인들에게 불렸습니다. 

그런 이방인들의 현실은 어떤 것인가 하면 크게 다섯 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다.”,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다.”,

“약속의 언약들에 외인이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다.”, 

“하나님도 없다.” 는 것이 이방인들이 처하고 있는 현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생명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그야말로 철저하게 버림받은 존재로 살았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로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한 생명의 사역을 외면함으로써 완전히 고립된 존재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받은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인에게 전달해야만 하는 사명을 거부하고 

자기들만의 성을 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원래 구약은 단순하게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구약 시대에도 이미 온 세상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행하신 모든 일들 가운데 

이미 유대인들에 대하여, 

또 유대인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단순하게 구약 그 자체로만 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위해서 행하신 모든 일 속에서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것을 다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를 잘 해야만 합니다.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미리 말씀하는 내용으로서의 구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직접 오셔야만 하는지에 대한 중명으로서 

구약을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구원에 관한 구약의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출애굽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 들어서면서부터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매일 아침마다 하늘에서 만나라고 하는 먹을 것이 내렸습니다. 

이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그런 은혜를 매일 맛보는 이스라엘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잘 살았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늘 거부하고 불순종하고 대항하고 반역하고 반항하면서 살았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순종을 한 적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게 선택을 받았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지 못한 일만 있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까? 

이 세상에서 오로지 자기들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의 민족이라고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자기들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만한 민족이 없다는 것을 자부하면서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택하신 것에 대한 오해를 갖고 살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구약 성경을 볼 때, 

또 오늘의 나를 볼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눈으로 봐야만 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이 세상의 모든 민족 가운데 

대표로 세워놓고 특별하게 인도를 하셨습니다. 

정말 말도 다 할 수 없는 은혜와 기적과 역사로 그들을 이끌어가셨습니다. 

세세하게, 

지극히 작은 것 하나까지도 다 응답하시고

역사하셔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다른 민족들과의 전쟁을 하면서 올라 갈까요 말까요?를 물으면 

그 때 그 때 다 응답하셨습니다. 

구체적인 모든 것을 다 지도하시고 가르치시고 해결하시면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결론은 다 뭡니까? 

딱 한 가지입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더라!’ 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삶 속에서 일일이 다 응답을 하시고, 

간섭하시고, 

지도하셔도 

이스라엘은 끝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기를 원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야단도 하고, 

협박도 하고, 

실제로 어려움에 처하게 하기도 해도 

결국은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신 이스라엘은 

끝내 자기들 맘대로 살더라는 것이 결론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 나타나시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넘치게, 

그것도 직접 받더라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 되돌아 올 줄 모르더라는 결론 다음에 

예수님께서 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사람보다 신약 시대의 사람이 더 복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신약 시대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다음에 왔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에게 쏟은 정성과 성의가 얼마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결국 자기들 마음대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까지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날마다 체험하고 살 때, 

우리는 겨우 우상이나 섬기고 제 멋대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이 비록 잘 지키지는 못했더라도 율법을 갖고 살 때, 

우리는 우리 맘대로 세상을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과 우리 이방인들 중에 누가 더 큰 은혜를 받은 겁니까? 

우리가 더 큰 은혜를 받은 겁니다. 

때문에 우리가 유대인들보다 더 복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의 병이 다 이것입니다. 

얼마나 큰 복을 받고 사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늘 되돌아가려고 그럽니다. 


어디로요? 

원래 자기 맘대로 살던 자리로 자꾸 되돌아가려고 그래요. 

조금 더 먹고, 

조금 더 가지고, 

조금 더 누리는 것으로 가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고, 

약속의 말씀들에 대해서 외인이었고, 

세상에 소망이 없었고, 

하나님도 없던 시대로 자꾸만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셨다고 하는 

이 엄청난 은혜와 영광의 가치를 

자꾸만 이전에 살던 것들의 가치로 되바꾸려고 합니다.


엡 2:4-7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그 풍성하신 사랑의 은혜를 만대에 두고두고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생이 단순히 우리만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사랑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야만 하는 역사적인 책임과 사명을 갖고 있는 겁니다. 


때문에 결코 

우리를 망하게 두시거나 

어리석게 살게 하시거나 

중도에 포기하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 영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으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은혜와 복을 누리는 이방인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우리 인생을 걸어가 주고 있는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의 수많은 기적들을 체험했던 유대인들도 누리지 못하는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이 구원이 주고 있는 은혜의 크기를 제대로 알아야만 합니다. 


때문에 오늘의 모든 형편이 다 감사해야 정상입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 인생이 우리 인생입니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어떤 사랑이 진짜 사랑입니까?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냥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이미 감사한 것이 사랑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뭘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냥 하나인 것이 진짜 하나입니다. 

주 예수의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은 아무 필요 없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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