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갖고 있는 아픈 가시
고린도후서 12:7~10
2003년 6월 15일 최일환 목사 주일 낮 예배 설교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12: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설교: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 고열의 병을 앓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 된 여자가 있었습니다. 듣지를 못하기에 결국 말도 못하는 시각, 청각, 언어의 장애 모두를 한 몸에 갖은 최악의 고통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스승 ‘설리반’이란 선생을 통해 세상 모든 것은 이름이 있고 언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후 그는 무서운 노력을 한 결과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고 결국 <인문학> 및 <법학> 박사학위를 소유한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헬렌켈러입니다.
그를 가르친 설리반 선생도 또한 불행한 과거를 지니고 있는 여성이었습니다. 10살 때 남동생과 함께 고아원에 보내어져 기기서 학대와 고통의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성장했던 것입니다. 불결하고 빈약한 환경 가운데서 남동생은 죽어 갔고 그녀도 또한 눈병에 걸려 실명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 후 파킨스 맹아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던 무렵에 헬렌켈러 집의 가정교사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겨우 20세 밖에 안 된 처녀였으나 그녀는 인내심이 강하고 애정이 깊고 그리고 신앙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본 헬렌켈러는 이미 6세가 되었는데도 아무런 교육이 되어 있지 않았고 손으로 음식을 먹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닥치는 대로 주위의 물건을 집어던지는 “야수” 그 자체였습니다.
그날부터 설리반과 삼중고의 소녀와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얼굴을 씻는 것도 머리카락을 빗는 것도, 나이프와 포오크로 식사를 하는 것도 헬렌과 격투를 하면서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단지 울어대는 것과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해왔던 헬렌은 엄격한 교육에 전신으로 반항했습니다.
설리반은 신중하고 끈기있게 단 하나 남아있는 인식의 창구인 “촉각”을 통해서 암흑에 갇힌 영혼을 향해서 자극을 준 것입니다. 그때까지 갇혀있던 헬렌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열리기 시작한 것은 指話法에 의해서<인형>이란 말을 헬렌이 알게 된 때였습니다. 헬렌의 기억력과 상상력은 다행스럽게도 무척 강했습니다.
처음에는 신기한 것 같았지만 반복해서 가르치는 중에 <인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자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헬렌의 知識慾은 넘쳐 났던 것입니다. 아는 기쁨, 그것이 암흑의 세계로부터 세상 속으로 끌어내었던 것입니다. 헬렌의 잠자고 있던 마음은 눈뜨기 시작하고 폭발적인 격렬함으로 언어를 흡수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헬렌의 놀람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쇠약하게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그녀는 1900년 20세가 된 해 하버드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4년 후 세계 최초의 대학교육을 받은 맹, 농아로서 그녀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것입니다.
오늘 저는 헬렌켈러를 본 받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장애라는 그 “가시”가 있었기에 그의 생애는 더욱 빛나는 생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런 “가시”가 우리에게도 지금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남들이 모르는 아픔과 고통이 한둘은 다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해 보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해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써보고 노력해도 해결이 안됩니다. 그때 우리는 왜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하며 원망을 하기도 하고 그 고통 때문에 자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아픔은 내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역사를 살펴볼 때도 위대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남들이 모르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 아픔과 고통이 그들에게 오히려 복을 가져다 준 경우를 우리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간질병”이라 합니다. 가장 유력한 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설교하다가 쓰러집니다, 거품을 품고 발버둥칩니다. 보는 이도 힘들지만 당하는 사람의 고통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떤 학자들은 눈의 “眼疾”이라고 합니다. 시력이 약하고 눈에서는 늘 진물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는 눈이라도 빼어 줄려고 했다는 것입니다.(갈4:15)
그 가시는 어떤 모양일까요?
1)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2)잘못 보면 사단의 시험거리가 될만한 것입니다.
3)그리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크든 작던 그런 아픔이 있습니다.
한번 옆 사람을 쳐다보세요. 어떤 가시가 있을 것 같아 보입니까?
쉽게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랑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결국 혼자만 힘들어하고 혼자서 해결해야 할 문제처럼 보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소아마비라는 지체장애가 가시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자랑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살펴보면 그 해결 비책이 나와 있습니다. 그곳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우리가 갖고 있는 가시는 “저주가 아닌 복”이란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저주요, 나만 버림받은 것 같은 무서운 것이지만 실상 그 가시는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입니다. 믿어지십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가시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고린도후서 12장에는 바울의 신비한 경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을 보시면 그가 3층천 하늘나라를 다녀옵니다. 그야말로 신비한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7~10절에는 그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7절에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장미꽃에는 가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 가다보면 아름다운 장미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찔리는 가시가 숨어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인생길에는 어떤 가시가 있습니까?
육신의 가시, 고통의 가시, 정신적, 영적 가시를 늘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그의 몸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서 세차례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그 가시가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하지 못한 몸으로 불편을 겪으면서 또는 조롱을 받아가면서 주님의 일을 하기보다는 건강한 몸으로 힘 있게, 당당하게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도는 그의 소원대로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9)라고 하십니다. 그것만은 네가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본문에 보면 바울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는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 몸에서 가시가 물러간 것도 아닌데, 처지와 환경이 바뀐 것도 아닌데 바울이 이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가시에 대한 그의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고통이요, 저주로만 생각했던 가시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가시를 보는 눈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는 가시를 은혜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면 가시가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1. 자고 하지 않게 해줍니다.
스스로 높아지지 않게 해 줍니다. 교만하지 않게 해 줍니다.
7절에 보면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삼층천을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바울이 쓰던 손수건을 환자의 몸에 갖다 얹기만 해도 병이 나았습니다. 악귀가 물러갔습니다.(행19:12)
또 그에게는 학문도 있었습니다. 돈도 있었습니다. 가문이 훌륭했습니다. 그는 엘리트 중에 엘리트였습니다. 교만하고 자만에 빠질 소지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보실 때 좀 위험했습니다. 그도 인간인고로 너무 큰 은혜를 체험하므로 교만해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가 스스로 교만해 하지 않으려면 그에게 연약한데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시를 주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깨닫고는 감사했습니다.
사람이 일이 잘 풀린다든지, 성공한다든지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여러분! 편안한 환경만이 하나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편안한 일만 있으면 우리의 믿음은 자라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성경 주석가 <바클레이>가 쓴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네 사람의 랍비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目擊하는 神秘스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중 <벤자민> 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영광을 보고 너무 놀라 곧 죽고 말았습니다.
<벤소마> 라는 사람은 정신이 미쳐 버렸습니다.
또 그중 <아헬> 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체험한 것이 최고라고 하며 교만해져서 이단자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 <아칸> 이라고 하는 한 사람만 전보다 더 좋은 신앙의 사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사람이 남이 하지 못한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면 그는 쉽게 교만해지고, 이단자가 되기가 쉽습니다. 자기의 체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이단자가 되기 쉽습니다.
다른 나라 볼 것도 없습니다. 한국 敎會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이단자들을 보면 한결같이 남달리 특별한 하나님의 啓示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런 체험을 했다고 합시다. 어떻게 될까요? 제발 여러분 중에 이런 사람은 안나오길 바랍니다. “내가 보니까 최목사는 영 신령하지 못해, 하나님도 못보고 뭘 한다고 그래”
아마 한 두 사람은 그럼 사람 있을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에 사는 다람쥐와 방울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제법 방울소리를 잘 내는 뱀이 있었습니다. 이 뱀은 독사입니다. 다람쥐는 우리나라 다람쥐하고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 다람쥐가 나무 위에 올라가서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면서 솜씨를 뽐냅니다. 그런 다람쥐를 방울뱀이 잡아먹습니다.
방울뱀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나무 밑으로 가서 꼬리를 흔들어 방울 소리를 냅니다. 그러면 나무 위에 올라 가있던 다람쥐가 호기심이 발동해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아래를 내려 다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눈이 방울뱀하고 딱 마주치게 됩니다. 그때부터 방울뱀은 입을 딱 벌리고 있게 됩니다. 방울뱀과 눈이 마주친 다람쥐는 그때부터 사시나무 떨듯 떨게 됩니다. 떨다가 정신을 잃고 나무 아래로 뚝 떨어집니다.
그러면 방울뱀이 다람쥐를 냉큼 잡아먹게 됩니다.
“나는 나무 위에 올라가 있으니 끄떡없다! 나는 높은데 올라가 있으니 끄떡없다!” 라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뭐 좀 특별한 체험을 했다고 교만해지게 되면 아프리카의 다람쥐 꼴이 되기 쉽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이단 같은 방울뱀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결국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정신을 잃고 사시나무 떨듯 떨다가 떨어져 죽게 됩니다.
잠언 16:18에 "驕慢은 敗亡의 先鋒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가시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가시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욱 더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가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해줍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시를 제거해 주시지 않았는데도 그가 도리어 크게 기뻐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시를 은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정도 차원이면 삶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욱 두터운 신뢰를 쏟아 놓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형성되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크든 작든 찔리는 가시가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질병의 가시, 어떤 이에게는 경제적인 가시, 어떤 이에게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가시, 어떤 이에게는 실패에서 오는 가시가 있고, 그밖에도 갖가지 찔리는 가시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우리에게 고통만을 안겨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가시일 때에는 우리에게 도리어 유익이 됩니다. 그 가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멀어지지 않게 만들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게 해 줍니다.
그것이 당장 나에게 손해가 되고 고통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할 때는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고통이 나에게 유익이 되어서 돌아오게 됩니다.
시편 119:71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
편안할 때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고통 가운데서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게 되면 그 고통이 반으로 줄어들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나를 위한 고통이라는 것을 실감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은 자기를 성찰하게 하고 새로운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난의 때에 새로운 생명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약할 그때가 도리어 강한 때가 됩니다.
본문 9절에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온전해 지는 능력" 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에게 가시를 주셔서 약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은 그 자녀들을 일부러 슬프게 하려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힘입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강한 자는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약한 자는 자기의 약함을 알기 때문에 전능자의 힘에 의지하게 됩니다.
옛날 아테네에서는 智慧있는 자가 강자였습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군사적인 영웅이 강자였습니다. 옛날 유대사회에서는 율법에 능통한 자가 강자였습니다. 오늘날은 누가 강자입니까? 돈이 많은 사람이 강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그런 것에서 힘을 자랑하지 마셔야 합니다. 진정한 강자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 하나님이 능력으로 함께 하는 자가 강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장 약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하는 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때가 기도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흙이 굳어 있으면 토기장이가 기술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토기장이의 능력과 기술은 흙이 부드럽고 연할 때에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쇠가 단단할 때는 대장장이가 기술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대장장이의 능력과 기술은 쇠가 풀무에 들어갔다 나왔을 때, 쇳덩어리가 연해진 다음에 온전히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할 때, 내가 교만에 빠져있을 때, 그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시로 인하여 약해져 있을 때, 그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상한 갈대처럼 되어 있을 때, 심령이 상처를 입고 있을 때, 병들었을 때, 실패했을 때,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검은 구름이 좋지는 않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습니다.
찔리는 가시는 나를 변화시킵니다. 나를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찔리는 가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게 해 줍니다.
가시는 나로 하여금 위대한 일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 지기 때문입니다.
평안한 환경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 응답되어야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 아닙니다.
내가 원치 않는 환경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 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가시가 있습니까? 그 가시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인생이 바뀌어 질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합심기도)
'추천 설교 > 최일환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만한 믿음/마8:5~13/2003년 6월 27일 (0) | 2015.10.12 |
---|---|
[스크랩] 거짓 믿음과 참 믿음/요8:31~59/2003년 6월 22일 (0) | 2015.10.12 |
[스크랩] 할 말과 안 할 말이 있습니다./약3:1~12/2003년 6월 8일 (0) | 2015.10.12 |
[스크랩] 하나님이 만드시는 부자/시 112 :1~10/2003년 6월 1일 (0) | 2015.10.12 |
[스크랩] 어떤 복을 받고 싶습니까?/삼하7:1~13/2003년 5월 25일 (0) | 2015.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