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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만한 믿음/마8:5~13/2003년 6월 27일

이만한 믿음

마태복음8:5~13

2003년 6월 27일 주일 낮예배 설교: 최일환 목사

8: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8:6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中風病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8:7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8:9 나도 남의 手下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軍事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從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奇異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8: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東西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8:12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8: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下人이 나으니라.


설교:

오늘날의 세계 최강대국은 미국이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이 땅에 오신 당시는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나라는 로마에 의해 植民 統治를 받던 나라였습니다. 그 로마 政府는 식민지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 많은 軍隊를 파견하여 통치하게 했습니다. 그러기에 백부장 정도 되면 오늘날 군대의 中隊長 정도 되는 階級입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백부장은 누구도 대적하기 어려운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백부장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이라는 동네에 들어가시자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下人을 고쳐 달라는 것입니다. 그 하인은 中風病으로 쓰러져 몹시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그 要請을 받아들여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하십니다. 그 당시에는 유대인은 선민의식이 있어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상대도 않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더욱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자신을 더럽히는 것처럼 여겼던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집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을 백부장이 막습니다.

고쳐 달라 해놓고는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것이 아닙니까? 당연히 “어서 오시옵소서” 해야 할 판인데 오지 말랍니다.

8절을 보세요.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한 술 더 떠서 9절에 보면 “나도 남의 手下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軍事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從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주님께서 엄청나게 놀라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기이히 여기며 말씀하십니다.

“奇異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여러분!

이 당시에 주님의 가슴은 기쁨과 감격에 벅찼을 것입니다. 너무 기쁘고 좋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하십니다.

여기 “이만한 믿음”이라 말에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기에 주님이 이만한 믿음이라고 하며 칭찬하셨을까요?


오늘 우리도 주님이 感動받으실 만한 믿음을 가져야 하겠는데 그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1. 긍휼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의 백부장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짧은 본문에 근거하여 그 사람의 人品에 대해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장교입니다. 당시 로마의 장교는 대개 貴族가문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면 그는 가문도 뛰어난 가문이었을 것입니다.

백부장이라는 계급은 리더쉽이 있어야 하고 사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쉽게 推定이 가능합니다. 또 누가복음에 의하면 동일 사건이 언급되는데 그는 많은 유대인들로부터도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사랑으로 대했던 사람으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자기 종의 苦痛을 해결하려고 유대인인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은 그의 인품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 사람을 신분이나 계급으로 차별치 않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집안의 재산처럼 여겼던 하인의 고통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길 줄 아는 矜恤이 넘쳤던 사람입니다.

결국 그는 진정한 사랑을 행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백부장이 왜 하인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왔을까요?

의사에게 찾아가든지 양을 사용하던지 해야 했을 터인데 예수님께 찾아 나왔습니다. 그는 주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보통분이 아님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 믿음이 예수님께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집안의 문제, 가족의 질병문제, 혹은 나 자신이 아닌 남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가지고 나온 적이 있습니까? 혹 먼저 病院으로 쫓아가고 藥局으로 쫓아가고 하시지는 않았습니까? 그 문제를 가지고 문제의 解決者는 예수님이시다 라고 믿고 주님께 가지고 나오신 경험이 있습니까? 

더군다나 사회적인 신분이 있고 체면이 있는 분이라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 가족의 문제는 가지고나와 주님께 아룁니다. 그러나 내문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문제라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주님은 백부장처럼 자신의 문제가 아니지만 긍휼을 갖고 남의 문제를 아뢰는 이런 믿음의 소유자를 기뻐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평범한 일에 감동을 받지 않으십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전혀 예상치 못하는 믿음을 가지고 나오므로 감동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며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백부장의 그 믿음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긍휼의 믿음입니다. 참 믿음은 긍휼에서부터 나옵니다.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矜恤이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完成시킨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그 矜恤이 없었다면 우리는 소망이 없었고 이 자리에 올수도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그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고

로마서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김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남을 긍휼히 여김이 있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죄 가운데 헤메는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시고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한달 동안 사스로 고통당하는 中國의 백성들과 그 땅에서 사역하는 宣敎師들을 위한 祈禱를 해 왔습니다. 죽음의 공포에서 시달린 그 백성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겠다고 현지를 死守한 선교사들,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러기에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 사스가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그것이 그 기도 때문에 물러갔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相關없습니다. 그들이 믿든 안 믿든 상관없이 기도한 나는 응답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면 우리 주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응답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만한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2. 겸손의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의 이만 한 믿음, 그것은 주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어떻게 나왔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이 病 고친다는 所聞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소문만 가지고는 백부장이 예수님께 나와 무릎을 꿇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는 소문으로 들려오는 예수님이 유대인이 고대하는 메시야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병자를 고칠 수 있는 全能者임도 믿었습니다. 만약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自身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백부장이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겸손히 예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찾아 왔던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초능력자라고 믿었다면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는 만물을 통치하시는 전능자이며 말씀 한마디면 무엇이든지 해결되는 분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로 믿습니까?

아직도 한 종교의 創始者 정도로만 믿는 분은 안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는 여러분에게 누구십니까?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觀點이 정확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는 온전한 믿음으로 주를 섬기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믿는 신앙의 대상을 온전하게 알지 못한다면 어찌 예수를 믿는다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길가다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저런 여론을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어떤 이는 엘리야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때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정면으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이 질문은 비단 베드로만이 받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고백했듯이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여러분도 따라서 해보세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주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까? 예수가 누군지 모르는데 어찌 그 앞에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찬송가 506장을 아십니까?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이만한 믿음이라 칭찬을 받으려면

3. 말씀의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저는 오늘말씀의 클라이막스는 8절에 있다고 봅니다.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이말 속의 뜻은 무엇입니까?

1) 당신은 하나님입니다. 굳이 오실 필요 없습니다.

2) 당신의 말 한마디면 나을 것입니다.

3) 내 부하도 내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데 하물며 당신은 어찌 불가능하겠습니까?


이정도 되면 놀랍지 않습니까?

아마도 내가 그 곁에 있었다면 주님이 놀라시는 모습은 이랬을 것입니다. “이야 너!”

성도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 말씀이 주님의 말씀이고 성경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면 엄청난 일들이 여러분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나요?

그 理由는 안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 해도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運動力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예리한 검 같아서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말씀은 엄청난 파워를 갖고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말씀을 신뢰하라”


여러분!

주님의 말씀은 約束입니다. 그 약속은 믿는 자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씀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은 그 백부장의 믿음이 매우 큼을 알고 그에게 선포합니다.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고 한 주님의 이 말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복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사람이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면 그 믿음의 분량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 믿은 대로 된다는 것은 안된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크기를 보십니다.

그래서 간혹 그 믿음의 테스트를 하십니다. 그 시험에서 우리 믿음의 크기가 입증됩니다. 어떻습니까? 그 믿음이 주님이 감탄할 만한 믿음인지요?


오늘 설교는 제가 準備하면서 제가 은혜를 누렸습니다. 제가 믿음이 부족하여 안 된 일들이 그동안 교회 안에 많았습니다.

교회 부채가 2000 여만원 남았는데 그것을 해결치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제가 타고 다니는 차를 어느 목사님이 타시면서 놀라는 것입니다.

최 목사님 이차 꽤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타시네요? 예 11년째 되었네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제게 하는 말이 제게 衝激을 주었습니다. 목사님 참 존경합니다. 그러나 존경은 하지만 목사님은 교인들은 복을 못 받게 하시고 계시네요, 하더군요.


제가 믿음이 부족하여 하나님께 負債를 해결해 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또 성도들이 부담이 될까봐 차를 바꾸어 달라고 기도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습니다. 제 딴에는 교회 성도들이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한 것인데 실상 그것은 믿음이 없는 行爲였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돈이 없으니 하나님도 못할 것이라는 엄청난 불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 해결이 안 되고 몇 년 동안 계속 부채를 안고 있는 것은 성도들의 환경이나 經濟的 形便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한데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최 목사의 믿음문제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과연 네 믿음대로 되라고 할 때 문제 해결의 복을 누릴 만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일까요?


바라기는 우리 믿음도 백부장의 믿음만한 큰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믿음으로 주님을 감동시킨다면 우리는 기적과 같은 놀라움을 체험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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