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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게 풍랑이 휘몰아 칠 때/마8:23~27/2003년 7월 6일

내게 風浪이 휘몰아 칠 때

마태복음8:23~27

2003년 7월 6일 장안중앙교회 최일환 목사 주일 낮예배 설교

8: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8: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8: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설교:

인생살이 바다를 航海하는 배와 같다고 합니다. 바다에도 航路, 즉 뱃길이 있습니다. 바다라고 아무대로나 다니면 충돌 위험도 있고 바다 밑이 어느 정도 깊이가 되는지 알 수 없어 坐礁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길도 아무거나 하면서 살면 안 됩니다. 할 일이 있고 인생의 항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항로를 벗어나서 자기 멋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 암초를 만나 침몰하든지 또는 예기치 못한 풍랑을 만나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히 보곤 합니다.


또 배가 바다를 항해할 때 잔잔할 때도 있으나 예상치 못했던 풍랑과 파도가 닥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그렇습니다. 별탈이 없이 그럭저럭 항해를 하는 때도 있으나 어느 때는 예상치 못했던 태풍도 몰아닥치고 어느 때는 비바람이 몰아쳐 막대한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 航海는 어떻습니까?


오늘 봉독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고 계셨습니다. 왜 그리고 가셨느냐 하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예수님이 매우 지쳤기에 좀 쉬시려고 배를 타신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는 건너편에 주님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배에 오르셨는데 제자들이 함께 동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가 얼마 못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유인즉슨 갑자기 큰 놀이 일어났고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폭이 9km, 길이가 13km, 전체 둘레가 52km정도 됩니다. 그 바다는 해발 -212m이고 수심 가장 깊은 곳이 50m정도 됩니다. 그런데 그 바다를 둘러싼 산은 해발 1000m 나 되는 산으로 둘러 싸여 산기슭에서 내리치는 바람이 불면 예상치 못한 바람이 불어 풍랑도 생기고 놀이 생겨 위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탄 그 배가 그런 위험을 당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탄 배에 왜 풍랑이 닥친 것일까요? 다른 때는 그런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이 함께 하였다면 안 닥쳐야 할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敎訓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도 때로는 풍랑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그 풍랑이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인데도 간혹 닥4아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우리는 그 問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어떤 풍랑이 닥칠 수 있는가? 그 풍랑이 왜 닥치는 것이며 닥쳤을 때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함께 살펴보며 은혜를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1. 어떤 것이 풍랑인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에 몇가지를 살펴보면

1) 疾病의 풍랑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다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님의 은혜로 건강을 누리며 사는 사람도 있으나 때로 예상치 못했던 질병도 생깁니다. 어떤이는 癌으로 고생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수술을 받아야 하며, 어떤 이는 크고 작은 질병들이 계속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목사님이신데도 늘 골골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부담이 된다며 괴로워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질병으로 고생할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치 않고 계신다거나 또는 무슨 큰 죄를 지어서 생긴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온 인물도 다 건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도 肉體의 가시가 있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셨구요. 심지어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도 걸어 다니는 綜合病院이라 할 정도로 많은 질병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2) 災難의 풍랑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재앙이 닥칠 때가 있습니다. 疾病도 일종의 災殃이지만 自然災害, 交通事故, 또는 각종 국가적 재난도 일종의 풍랑입니다. 우리나라의 육이오 전쟁도 풍랑의 재난이고 IMF 도 일종의 풍랑입니다. 미국의 9.11테러도 일종의 재난입니다. 그런 재난이 우리에게는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욥기의 욥기 당한 재난을 보세요. 가축이 일시에 도둑맞고 천재지변이 일어나 잃고 심지어 자식들이 잔치자리에서 집이 무너져 몰살당합니다. 이런 것이 재난이묘, 풍랑입니다.   이런 풍랑을 우연이라고 넘기면 불신자와 같습니다. 그 풍랑이 무엇을 교훈하는지,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인지를 깊이 살펴야 합니다.

  

3) 經濟的 풍랑도 있습니다.

갑자기 잘나가던 회사에서 짤립니다. 또는 不渡가 나서 집안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날립니다. 보증을 섰는데 그 保證이 문제가 되어 쫄짱 망합니다. 이것도 풍랑입니다.

 

 

4) 人間關係 갈등의 풍랑도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 의해 背信을 당합니다. 또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뒤집어쓰기도 합니다. 언젠가 신문을 보니 교도소에서 10년을 복역한 사람이 죄가 없는 무죄한 사람이고 다른 진범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합니까?

어느 집사님은 자기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길렀던 사람이 기술을 배워가 옆에서 가계를 차리더랍니다.

그뿐 아니라 媤宅 식구들과의 관계, 男便과의 관계, 심지어는 자식과의 관계에서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 고통은 매우 큽니다. 당해 본 사람만이 아는 고통입니다. 

 

5) 信仰의 시험 풍랑입니다.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聖徒와 성도 사이,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서 인간관계의 갈등이 생기고 설교나 교회 행사로 시험에 들어 풍랑을 당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풍랑이 교회에 한번 생기면 심각한 현상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밖에도 여러 종류의 풍랑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예수 믿는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다.

문제 해결의 키가 무엇입니까? 왜 풍랑이 닥치는가를 알아보고 그에 대한 대처 방법을 살펴야 합니다. 


2. 왜 풍랑이 닥치는가?

1) 믿음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풍랑은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풍랑입니다.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십니다. 그런데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깨어나지 않고 계속 주무십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이 잠기에 배가 가라앉을 위험에 쳐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냥 주무시는 것일까요? 어떤이는 예수님이 대단히 피곤하셔서 그러셨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좀 이상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찌하나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풍랑이 일 때 제자들이 어떻게 했을까를 상상해 보세요. 아마도 베드로가 그 바다를 잘 알기에 노를 저어 빨리 가자고 했을 것이고 제자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그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들 중 적어도 4명은 뱃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그 난국을 모면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을 것입니다. 그러다 안되자 그제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여 구원해 주세요.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때 예수님이 얼어나 그 제자들을 책망합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습니다. 그러자 바다가 아주 잔잔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상황에서 안 무서워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몇 년전에 교회 성도들과 함께 필리핀에 선교여행을 갔을 때 “라구나”라는 호수에 있는 섬에 가서 선교집회를 했는데 배타고 두시간을 가야 하는 섬입니다. 그런데 저녁집회를 마치고 그곳에서 9시에 배를 타고 나오는데 배는 내리고 바람은 불고합니다. 그러다가 그 배가 중간에 엔진이 고장이 났습니다. 엔진이 고장이 나니 배에 물이 스며 들어옵니다. 바람에 밀려 배는 정처없이 떠내려갑니다. 엔진을 뜯어 고치는데 10분이지나도 안되고 20분이 지나도 안됩니다. 그때 야 여기서 죽는거 아닌가? 생각이 됩디다. 그때 우리 팀중에 한사람이 찬송을 합니다. 박수치며 찬양을 합니다. 그 찬양은 기도가 되기도 하고 정말 진진한 찬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조수가 손전등을 들고 sos신호를 보내자 이웃 마을에서 배가 왔습니다. 그 배가 로프로 묶어 그 마을로 끌고 가서 거기서 배를 갈아타고 나왔습니다. 같이 가신 어떤 성도는 다시는 선교여행 안 간다고 제게 화를 내셨습니다.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같이 가셨던 분들과 그 배에 타고 계셨던 필리핀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책망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 상황에서 제자들의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 믿음이 얼마만한가? 큰 믿음인가 적은 믿음인가? 수시로 확인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가? 또 예수가 우리와 함께함을 정말 믿는가를 하나님은 시시 때때로 확인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앙을 더욱 굳세게 하기 위해 재난이 닥치고 환난이 닥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예수가 메시야임을 보여주기 위한 풍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선생님, 랍비, 또는 선지자로 알고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기적을 행하고 해도 예수가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케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풍랑이 일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잠에서 일어나 바람과 파도를 향해 꾸짖습니다. 아마도 잔잔하라, 고요하라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바람이 귀가 있나요? 바다가 귀가 있나요? 왜 소리칩니까? 소리치시니까 금방 잠잠해 집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비가 내릴 때 한번 소리쳐보세요. “비야 내리지 말라” 암만 소리쳐도 안됩니다.

왜요?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고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가능합니다. 그가 메시야임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기적을 행합니다. 물위로도 걸으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떡다섯개,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도 먹이십니다. 그 모든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엘리야 같은 이는 마른하늘을 바라보고 비를 내려달라 기도하니 비가 내렸고 비를 멈추게 해달라 하니 멈췄습니다. 그것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고난과 풍랑이 닥치면 그 속에서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내 믿음 보고 계신다 믿으시고 더욱더 굳센 믿음으로 주를 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3) 罪가 있을 때 깨닫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때로는 풍랑이 죄의 원인으로 닥칠 때가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拒逆하고 도망을 칩니다. 니느웨로 안가고 다시스로 갑니다. 그때 그 배가 엄청난 풍랑을 당합니다. 그 풍랑은 요나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제비뽑기를 통해 요나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요구합니다.

요나가 바다 속에 던져지자 바람과 파도는 잠잠해 집니다. 우리의 풍랑도 간혹 우리 죄 때문에 생길 때도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나 믿는 사람이라면 풍랑이 닥쳤을 때 자신의 죄를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깨닫지 못하면 때로 풍랑을 통해 깨닫게 하십니다.  

물론 회개가 이루어지면 망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단순히 사랑의 징계수단으로 사용하십니다. 그러기에 때로 풍랑이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당할 때는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지나고 보면 그것이 유익이더란 말입니다.


3. 그렇다면 풍랑을 당할 때 성도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나?

1) 내 方法보다는 주님을 依支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자기들 딴에는 바다에서만큼은 예수님보다는 자기들이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깨우고 자기들의 방법과 경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판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萬物의 創造主이십니다. 그분의 지혜와 능력을 당할 자는 이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科學이 발달하고 세상이 달라진다 해도 예수님을 넘어갈자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방법과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지혜이며 문제 해결의 지름길입니다. 

내 방법, 내 생각을 앞세우다가 사단이라 책망 받은 베드로를 보세요. 자기 딴에는 예수님을 위한다고 했다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책망을 당합니다.

    

2) 평상시 기도로 武裝하여야 합니다.

풍랑은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릅니다. 믿음 좋다고 안닥치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라고 안닥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언제 닥칠지 모르기에 풍랑이 닥칠 때, 그것을 극복할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기도입니다. 기도는 시험을 이길 힘을 가져다줍니다.

베드로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고 잠들었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을 아시지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십니다.

뭔 말입니까? 기도 안하면 시험이 닥쳤을 때 이길 수 없고 기도안하면 마음먹은 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평상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평상시 기도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그것이 풍랑을 이길 힘을 주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적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려워 한 것 과 주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 때문입니다. 주님을 깨우고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도를 통해 회개하고 기도를 통해 해결책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크냐 적으냐는 주님을 얼마만큼 신뢰하고 의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새벽기도, 쉽지 않습니다. 교회 중보기도 생활,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는 방법이고 믿음을 보이는 방법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 풍랑이 잠잠케 되고 파도가 고요해지는 것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풍랑이 있습니까?

혹시 풍랑속에 계시면서도 그것이 풍랑인지도 모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또는 풍랑 속에서도 어쩔 수 없다고 自暴自棄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닥친 풍랑이 있다면 그 풍랑 속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말씀이 주님의 응답입니다. 解決策을 活用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통성기도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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