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사도행전1:12~14
2003년 7월 13일 장안중앙교회 최일환 목사 주일 낮 설교
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13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 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 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설교:
사람은 눈으로 본 것은 다 믿을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다 그럴 것 같은데 그렇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물위를 걷는 모습도 보았고 각종 병자를 고치는 모습도 보았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못했었습니다. 심지어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엄청난 기적을 행했는데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는 바디메오의 부르짖음을 시끄럽다고 제제를 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순간까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믿지 못했던 것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뭔가를 보면 믿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던 그들의 모습이 결정적으로 變化되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승천을 목격하고 나서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승천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의 변화는 분명하게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늘로 가심을 보고는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을 살펴보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세 부류로 분류해 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11제자들과 2)예수를 隨從들던 여자들 3)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그의 형제, 가족들이었습니다.
다 그럴만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제자11명, 여인들 5~6명, 예수님 모친 마리아와 형제들 4명 도합 약 20여명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예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그 모임의 분위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분위기가 얼마나 엄숙할까요? 그런데다 14절을 보니 1)더불어 2)마음을 같이하여 3)기도에 온전히 힘썼다고 첨가해 놓고 있습니다.
정말 이 모습은 이전에 그들에게서 보기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잡혀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려 했을 때 그들은 그 자리의 분위기 파악이 안된 상태에 졸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오늘날 우리 국어 표현법에는 “전혀”라는 단어를 쓸 때는 부정어표현을 달게 되어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표현을 달리해야 합니다. 전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번역을 새롭게 한다면 전적으로, 온전히 기도에 힘썼다고 해야 합니다.
무엇이 그들의 모습을 이토록 달라지게 게 했을까?
예수의 苦難, 復活, 昇天을 목격한 그들, 그 모습을 실제로 본 그들, 그들의 변화는 예수를 바라보는 觀點의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사역 초창기에는 선생님으로, 좀더 나아가서는 랍비로, 좀더 나아가서는 선지자로 따르던 제자들, 예수님의 이적과 가르침 앞에 입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으나 실제로는 그럴까하며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어버리자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 부활로 나타나셔서 메시야 되심을 보여 주셨고 더 나아가 하늘로 올라가심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 되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던 시각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 예수님에 대한 시각을 확실하게 변화시켜 놓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예수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성경의 보는 방향과 신앙이 전혀 달라집니다. 예수를 해방자로 보는 사람은 예수를 압제와 독재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분으로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도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로마정부와 정치적 충돌을 해보신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병 고치는 醫師로만 보는 사람은 병 고침을 받았으면 땡 하고 돌아서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로 보십니까? 혹시 힘들고 어려울 때만 잠시 달려와 문제를 해결하고 사라지는 슈퍼맨으로 생각하시지는 않는지요?
저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우리의 구주이신 메시야로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변화되지 않고는 우리 신앙은 아무리 오래 믿어도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도깨비 방맹이로 믿는 한국의 수많은 크리스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예수관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적 신앙관, 그리고 성경적 예수관이 온전하게 세워져 있다면 여러분은 새로운 인생, 복된 인생을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학창시절 “歷史”를 재미있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은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매우 다양합니다. 그것을 史觀이라 하는데 “實證主義史觀” “마르크스의 唯物史觀” “基督敎史觀” “상대주의사관” “터너의 프론티어 사관” “토인비의 문명사관” “식민주의사관”등 다른 관점이 매우 많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허구와 허점이 매우 많습니다.
혹시 제 또래 이상 되신 분들 생각을 해보세요. 학교에서 국사를 배울 때 “노론 소론 남인 서인”하면서 당파싸움의 대표자들 이름 외우느라 고생하신 것이 기억나십니까?
그때 저희를 가르친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를 저는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잘못 가르치는 것이란다. 교과서에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가르치지만 이런 관점은 식민주의사관이라 한단다. 일제가 한국을 점령하고 한국은 스스로 나라를 운영해 갈수 없는 나라인 것을 심어놓기 위해 만든 역사란다. 너희들은 이런 관점에서 역사를 보지 말거라“
신앙생활도 예수를 누구로 믿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대체적으로 불신자들의 예수관은 훌륭한 선각자, 다른 나라 종교지도자 정도로 여길 것입니다. 아니면 세계4대종교의 창시자(석가, 공자, 마호멧, 예수)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인생을 바르게 살라고 가르쳐준 스승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기독교 안에도 그런 사람이 꽤 있습니다.
또 정반대로 오히려 예수를 “미친 사람” 취급하는 존재들도 있고 또는 “우주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보는 관점이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바알세불(귀신의 왕) 들린 자라고 하기도 하고 예수를 미친 사람으로, 또는 선지자중의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며 살았던 소경 한 사람은 들려오는 소문으로만 갖고도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믿는 예수를 어떤 분으로 믿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그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세요. 그들은 모두 예수관이 변화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그 다락방에 모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이 어떻게 변했을까요?
1. 예수님의 열두제자의 인생도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 처음부터 그가 하나님인줄 알았을까요? 처음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믿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처음 전도되었을 때, 처음 교회 나왔을 때는 “믿음이라는 것은 좋은 거야, 나쁜 것을 가르쳐 주지는 않을 거야” 하고 나오셨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우리의 선생님, 또는 랍비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는 약속의 아들로 오신 메시야 됨을 계속 가르칩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며 천지를 주관하시는 능력의 메시야임을 가르칩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으로 시작해서 마지막 여리고의 소경 바디메오를 고치기까지 수백 수천가지 이적을 행한 이유는 예수가 메시야요,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임을 보여 주고 믿게 하기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사람이 아닌 내 죄를 해방시키고 구원하시려고 오신 주님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예수를 이단으로,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여야 할 존재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 충실한 사람으로 대제사장에게 예수쟁이를 체포할 수 있는 권세를 얻어 대활약을 했습니다.
그래서 스테반을 죽이는 일에도 앞장섰던 사람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뛰어다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각이 다메섹이란 도시로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가다가 빛 가운데서 예수를 만나면서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주여 뉘시옵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순간 그는 자기가 그동안 하나님을 대적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일을 밤낮으로 금식하며 예수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예수에 대한 시각의 변화는 여러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줄 것입니다.
여기 서있는 최목사의 생애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주인 것을 발견하고는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원래 정치가나 교수가 꿈이었는데 예수가 구주인 것을 알고 바뀌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저를 바꾸어주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를 정말로 주인으로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아무렇게나 살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길선주 목사, 또 주기철 목사 같은 이들도 예수가 서양귀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한 후 놀라운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도 예수관이 바로서고 신앙관이 바로서면 달라질 것입니다.
2. 수종들던 여인들 여인들의 인생도 변화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수종들던 여인들이 누구입니까?
눅8:2~3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그런데 그들도 처음부터 예수가 하나님 아들 되심을 믿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병 고침을 받고 귀신이 나간 체험을 한 여인들입니다. 이 여인들은 그런 체험을 하며 따라다니다가 가르침을 듣다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뒷바라지 하던 사람들입니다. 늘 예수님 뒤를 따라다니며 섬김과 봉사로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몇 명의 여자들이 한 마음 되어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여인의 몸으로 예수를 따라 다닐 때 핍박을 얼마나 많이 받았겠어요.
더욱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12명의 제자들은 남자들입니다. 그들은 무엇으로 먹고 살았나요? 무전취식했나요? 헌금과 후원이 있었습니다. 그 재정을 가롯 유다가 담당한 것입니다. 그때 많은 부분을 담당한 여인들, 그들의 후원은 그야말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무엇이 그 여인들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구주로 믿게 한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올바로 바라본 신앙관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이름도 성경에 기록되어 인류 역사 대대로 그들의 헌신을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모친과 형제들의 시각도 변화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잉태될 때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알았으나 그 동생들은 처음부터 믿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의 형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형인 예수가 이상한 짓하고 다닌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시각이 변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형이 부활합니다. 그리고 승천합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바라보던 시각이 육신의 형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바뀌었습니다.
결국 그 형제중 “야고보”는 성경을 기록한 야고보이고 “유다”는 성경을 기록한 유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 야고보라고 표현하면 한결 권위가 설수도 있을 터이나 그것은 예수님을 모를 때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난 후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로 믿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신앙관이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누구냐가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그리고 내 주인으로 온전히 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합당하게 섬기면 하나님은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곧 하나님 자신임을 제대로 믿는 그 때 그 장소의 사람들, 위대한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오늘 이 장소에 모인 여러분이여
나는 여러분도 그때 그 장소의 사람들과 같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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