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 싶은 마지막 신앙 고백
디모데후서4:1~8
2003년 9월 21일 장안중앙교회 최일환 목사 주일낮설교
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嚴히 명하노니
4:2 너는 말씀을 傳播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警責하며 警戒하며 勸하라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敎訓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私慾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虛誕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謹愼하여 苦難을 받으며 傳道人의 일을 하며 네 職務를 다하라
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冕旒冠이 豫備되었으므로 주 곧 義로우신 裁判長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者에게니라.
설교:
어떤 제자훈련 모임에서 남편에게 자녀에게 유서를 쓰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여겨 지기도하고 좀 쑥스럽기도 했는데 시간이 가면서 점점 분위기가 심각해지고 나중에는 그 쓴 유서를 한사람씩 낭독하도록 했더니 눈물바다가 되었답니다.
여러분은 만약 유서를 쓴다면 누구에게 어떤 내용의 유서를 쓰고 싶습니까? 한국 사회에서는 유서를 쓴다는 것이 매우 기분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대로 된다고 하여 아예 유서를 쓰지 않고 대부분이 유서를 남기지 않고 죽습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죽음을 준비하며 유서를 남기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여 유서를 쓴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유서가 자녀들의 재산 상속이나 가족간의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할 결정적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유서를 쓴다면 여러분은 어떤 유서를 남길 것입니까?
집은 첫째에게, 자가용은 둘째에게 셋째는 말썽쟁이이므로 시골 논이나 가져라
예수쟁이 유언은 좀 달라야 합니다.
내가 이제껏 80평생을 주님과 함께 살았노라 너희들도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서 만나자. 첫째, 너는 성경을 많이 일고 전도도 잘하므로 목사가 되거라. 둘째, 내가 너를 잉태했을 때 기도하고 가졌노라 너는 선교사가 되거라. 셋째, 너는 돈버는 재주가 많지? 만은 돈벌어서 세계만방에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훌륭한 장로가 되거라 하면서 유언을 남긴다면 일생에 영향력이 있는 유언이 될 것입니다.
남편에게는 여보, 내가 상신을 만나서 한평생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소, 내가 당신을 사랑하오. 천국에서 만납시다. 이러면 얼마나 멋진 유언이 될까요?
그러나 아마도 이런 멋진 유언을 하고 죽는 분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을 살펴보면 위대한 사도 바울이 자기의 아들처럼 대하던 디모데에게 유언과 같은 말을 납깁니다. 첫 부분은 명령이면서도 일종의 유언입니다. 목회자로서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지를 권하는 말씀입니다.
1. 말씀을 전파하라 ,
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3. 모든 일에 근신하며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
참으로 멋있는 권면이며 유언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더 멋있어 보이는 것은 7~8절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 바울이 자신의 일평생을 되돌아보며 평가하는 일종의 신앙 고백입니다.
<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冕旒冠이 豫備되었으므로 주 곧 義로우신 裁判長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者에게니라.>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바울의 이 고백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지, 뭘 위해 살았는지,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그는 어떤 신앙고백을 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까?
1.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고백합니다.
그 선한 싸움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 싸움이며 전쟁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을 구하는 복음전도의 싸움(살전2:2)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모든 싸움은 생명을 죽이는 싸움이지만 이 싸움은 생명을 살리는 싸움입니다.
이전쟁의 상대는 사단 원수 마귀입니다. 사단은 어찌하든지 자기 밑에서 종노릇하며 사는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방해 합니다.
때로는 옥에 가두기도 하고 때로는 매를 치기도 합니다. 또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며 온갖 회유작전을 쓰기도 합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성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였는데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을 했습니다. 이 여자는 귀신들려 점을 치는 일을 귀신이 곡하게 했습니다. 그 여자는 바울의 전도팀 일행을 쫒아 다니며 귀찮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귀신을 쫓아내고 오전케 해주었는데 고맙다고 사례를 듣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고소를 당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온갖 고초를 겪습니다. 그래도 그곳에서 찬송하며 기도하니 하나님이 옥문을 열고 나오도록 하여 주십니다. 더불어 그 간수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한 싸움입니다.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왜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만만하게 자기 영역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은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1)싸움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싸움은 결과가 너무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이기느냐 지느냐에 따라 하늘땅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이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이 일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완전히 실패한 것 같이 보이나 실상은 완벽한 승리를 하신 것입니다.
뱀에게 발꿈치를 물리신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3일만에 부활하셔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결국 뱀의 머리를 박살 내셨습니다. 최후의 승자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명령 하십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복음전도의 중요성을 모릅니다.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제가 이번 여행 중 백두산을 다녀왔습니다. 백두산 근처의 C호텔에 밤 10시가 넘어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당연히 피곤해서 골아 떨어져야 하는데 이상하게 나가고 싶었습니다. 밖을 나가보았더니 몇몇 동행한 목사님들이 차를 한잔 먹자고 하여 찻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 차를 파는 여인의 얼굴에 수색이 있어 전도를 했습니다. 그 여인은 아이가 하나 있는 부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아느냐고 했더니 누구냐고 묻습니다. 한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곳에서 30분이 넘게 복음을 전하고 영접 기도를 하자니까 순수히 따라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서 맘에 놓이는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며 신분을 밝힙니다. 하나님은 저를 통해 그 여인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한번도 제대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여인이었습니다.
한 영혼이 참으로 귀합니다. 그 영혼의 가치를 무엇으로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중요한 것이 한 영혼입니다.
2)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이 싸움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깡패 사회에서 누가 우두머리가 되는가 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김두환이 마냥 힘과 뱃장이 있어야 하지만 죽을 각오로 덤벼드는 자가 대장이 된답니다. 깡패들은 그 세계에서 목숨을 겁니다. 하물며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사업에 어찌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도 그 일에 목숨을 거셔서 이루셨습니다. 세례요한도 목숨을 걸었고 베드로와 그 외의 사도들도 결국 목숨을 걸자 하나님이 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일에 목숨을 걸고 사십니까?
사소한 일, 지금 당장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왜 운전에 목숨 걸고 돈 몇 푼에 목숨을 걸고 사십니까? 생명을 구하는 거룩한 사역에 생명 걸고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하늘의 상을 바라보고 해야 합니다.
나는 어떻게 그 선한 싸움을 치루고 있습니까? 이 선한 싸움은 당당의 이익이 없어 보입니다. 또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분이 보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 싸움의 재판장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실 그 상을 바라보시기를 축원합니다.
2. 자기에게 부여 된 사명(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신앙 고백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부여한 사명을 그가 다 감당했다고 고백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내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가 달려간 그 길은 어떤 길입니까? 은혜의 복음을 證據하는 그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행20장24절)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사명은 곧 복음전파라고 확신했고 그를 위해 일생을 바치며 살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부여된 사명이 뭔가를 여러분이 알고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모르니까 헤매는 것입니다.
내 사명이 뭐냐? 이것만 분명히 세워지면 우리 삶은 분명해 집니다. 내가 서울을 가야야 할지 부산을 가야 할지 목적지가 分明하면 가는 방향은 헤매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 보면서 예측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은 자기 사명을 알지 못해서 입니다.
오늘 우리의 달려갈 길은 어떤 길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뭐냔 말입니다. 그것이 분명하고 명확하게 정립되면 조금도 후회 없는 삶을 이루게 됩니다.
그것이 분명한 사람은 그 일에 목숨 걸며 살수 있고 그 일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이번에 선교 여행중 연변 모대학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한 선생님의 간증을 잠간 들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 것이 너무 즐겁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너무 신나서 밤잠을 자다가도 학교에 나와 연구실에 들어갈 때가 있답니다. 공산주의가 얼마나 사방에서 여러 가지로 억압하고 조여 오는데도 너무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일이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그 길을 위해 내 모든 시간과 정력을 다 바치려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성공합니다.
3. 믿음을 지켰다고 고백합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려 할 때 가장 어려운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것도 안됩니다. 믿음을 잃고 뭘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믿음은 늘 사단의 공격 대상입니다. 그러기에 잘 지켜야 합니다.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것이 자기 믿음 지키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믿음이 땅바닥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설교하기가 죽을 맛입니다. 부인하고 대판 싸웠는데 강단에 올라가 뭔 설교가 됩니까? 내 심령이 힘이 없는데 어찌 설교가 은혜롭겠습니까?
그러기에 그 믿음을 지키려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하고 또 그 믿음을 지키려 하면 온갖 사단의 간교한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오늘날 사단은 아이큐가 되게 높습니다. 옛날처럼 죽인다고, 협박하지 않습니다. 감옥에 가둔다고 공갈치지 않습니다. 왜요? 옛날에 다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실패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가장 좋은 전략은 ”적당히 하라“ ”분수껏 하라“ ”당장 서둘러 결정하지 말고 좀 생각해 보고 하라” 는 것입니다.
이 전략에 많은 성도들이 헌신의 결단을 못합니다. 인간의 지혜로, 내 환경으로 내 능력으로 감당 할 만큼만 하고 만단 말입니다. 사단은 절대로 뿔난 도깨비처럼 다가오지 않습니다. “현실”이라는 카드, “적당히”라는 카드로 다가오고 우리를 설득하고 유혹합니다. 여기에 많은 신학자, 목회자, 성도들이 펑펑 나자빠집니다.
성도 여러분은 무엇을 지키려고 그토록 힘써 싸우고 계십니까?
가정, 자녀, 자신의 명예, 그것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것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믿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결국 마귀에게 다 빼앗깁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처참한 패배요, 굴욕적인 죄악입니다.
그러나 승리하면, 그래서 내 믿음을 완벽하게 지켜 나가면 “나를 위해 의의 冕旒冠”이 예비 되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신앙 고백을 살폈습니다. 나는 그가 남긴 신앙 고백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신앙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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