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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계3:1-6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

계3:1-6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 우리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가운데서 그 다섯 번째인 사데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네 교회들의 특징에 대해서 잠시 되새겨 보겠습니다.

첫 번째 교회였던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던 교회였습니다. 두 번째에 교회였던 서머나 교회는 고난을 당했던 교회였습니다. 세 번째 교회였던 버가모 교회는 세상과 타협했던 교회였습니다. 네 번째 교회였던 두아디라 교회는 죄로 얼룩진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사데 교회는 어떠한 교회였습니까? 사데 교회는 한 마디로 “죽은 교회”(The Dead Church)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가라지들로 이루어진 교회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영적인 논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버가모 교회처럼 세상과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처럼 자연히 죄로 얼룩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논리적인 순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데 교회처럼 영적으로 죽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구약성경 사사기 16장에 나오는 삼손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의 이름은 힘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힘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말은 너무나도 비극적이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들릴라의 꾐에 빠졌습니다. 삼손이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자는 사이에, 그의 머리는 삭도로 밀리우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삼손은 예전처럼 힘을 쓸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힘은 사라져버렸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은 삼손의 눈을 빼어버렸습니다. 삼손은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왜 삼손의 힘이 사라졌습니까? 그의 머리카락이 잘렸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삼손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삼손의 힘이 사라져버린 궁극적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삿16:20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똑같은 이름의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삼손을 떠나셨기 때문에, 삼손의 힘은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 삼손은 사로잡혔습니다. 두 눈이 뽑혔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맷돌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비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사데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과거에는 사데 교회가 살아 있었습니다.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었습니다. 힘이 사라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데 교회를 떠나버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데 교회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이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분명하게 돌이켜보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의 잘못된 모든 것들을 회개하고, 다시금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 소생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을 일곱 항목으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도시 사데(the city), 2) 사데 교회(the church), 3) 발신인(the correspondent), 4) 책망(the concern), 5) 칭찬(the commendation), 6) 명령(the command), 그리고 7) 권고(the counsel).


첫째로, 도시 사데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ity).


소아시아의 첫째 도시 에베소에서 위로 60km를 올라가면 서머나가 나옵니다. 서머나에서 또다시 위로 100km를 올라가면 버가모가 나옵니다. 버가모에서 오른쪽으로 60km를 가면 두아디라가 나옵니다. 두아디라에서 아래쪽으로 50km를 내려오면 사데가 나옵니다.

사데(Sardis)는 고대 루디아 왕국(the ancient Kingdom of Lydia)의 수도였습니다. 루디아 왕국은 주전 12세기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다가 주전 6세기 루디아 왕국의 수도 사데가 바사 왕 고레스의 군대에 의해서 함락을 당함으로 루디아 왕국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루디아 왕국의 마지막 왕이었던 크로이소스는 전설적인 재력가였습니다. 그래서 영어사전을 보면, 아주 부유한 사람을 가리켜서 as rich as Croesus라고 합니다. 그의 조언가로서 고대 희랍의 우화집 작가였던 이솝(Aesop)도 사데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도시 사데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데는 경제적으로 부강했습니다(prosperous).

사데 근처에는 헤르무스(Hermus)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사데 주변에는 비옥한 땅이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각종 농산물은 풍성했습니다. 또한 주변에는 많은 초원이 있어서 양들을 키우기에 적합했습니다.

아울러 사데는 각지와 연결되는 도로망이 잘 발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데는 주변에서 생산되는 풍성한 농산물과 다량의 양모를 인근 도시들에게 활발하게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양모를 염색하는 기술은 사데에서 최초로 발명되어졌다고 합니다.

게다가 헤르무스 강의 한 지류인 팍톨루스(Pactolus)라는 작은 강이 사데 시내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많은 사금이 채취되었습니다. 사데는 그것으로 금화를 주조해서 주변의 도시들에게 공급을 했습니다.

이처럼 사데는 풍성한 농산물과 염색된 양모, 그리고 사금으로 만든 금화 등을 인근 도시들에게 공급함으로서 많은 부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둘째, 사데는 지형적으로 난공불락이었습니다(impregnable).

사데는 트몰루스(Tmolus) 산의 줄기에 위치해있었습니다. 트몰루스 산줄기에는 여러 개의 봉우리들이 솟아 있었습니다. 사데는 그 가운데 한 봉우리를 차지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데는 높은 언덕 위에 넓게 펼쳐진 고원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사데의 삼면은 높이가 450m나 되는 가파른 절벽이었습니다. 암석들은 매끈매끈하고 수직적으로 서있어서, 그곳을 기어서 올라가기는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사데의 남쪽으로만 들어오는 길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도 좁고 가파르고 구불구불했습니다.

이처럼 사데는 가파른 언덕에 세워졌기 때문에, 정상적인 공격으로는 도저히 접근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셋째, 사데는 정신적으로 해이했습니다(careless).

사데는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 너무 과신했습니다. 사데는 정신적으로 해이해져서, 적들이 포위를 하고 있는데도 제대로 보초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있는 보초들마저도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데는 두 번이나 기습적으로 함락을 당했습니다.

주전 6세기 바사 왕 고레스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두 주간이나 사데를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가파른 절벽을 오를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사 왕 고레스는 누구든지 사데의 벽을 제일 먼저 오르는 사람에게 큰 상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 후에 바사의 한 병사가 가파른 절벽 바로 밑에 다가가서 위를 자세히 살피고 있었습니다. 그 때 뜻밖에도 사데의 성체에 있던 루디아의 한 병사가 실수로 자기의 투구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루디아의 병사는 얼른 절벽 밑으로 기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투구를 찾아서 다시금 절벽을 기어올라서 성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바사의 병사는 절벽을 기어올라가는 것이 생각처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날밤 그 바사의 병사는 특공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는 루디아의 병사가 내려왔던 쪽으로 절벽을 기어올라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절벽 사이에는 멀리서는 눈에 보이지 않았던 틈새가 있었습니다.

그 틈새 사이로 특공대는 쉽게 사데의 성채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보초가 지키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또한 성채의 남쪽을 지키는 보초들도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사의 특공대는 성채의 문을 활짝 열고서 주력 부대가 들어오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루디아 왕국은 주전 6세기 바사에 의해서 점령을 당했습니다. 그 후 약 3세기가 지났을 때였습니다. 주전 3세기 사데는 또다시 방심하다가,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대제에 의해 똑같은 방식으로 점령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사데는 경제적으로 부강했습니다. 지형적으로는 난공불락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데는 자신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두 번이나 함락을 당하면서 점차로 쇠약해졌습니다. 바로 이러한 곳에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사데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둘째로, 사데 교회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hurch).


우리는 사데 교회가 어떻게 해서 설립되었는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사도행전에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 머물면서 행했던 사역의 결과로 사데 교회가 세워졌다고 추정해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 때에, 에베소에서 삼 년을 머물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바울은 두 해에 걸쳐서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했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사데 사람들은 사업차 에베소를 방문하는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가 바울이 두란노 서원에서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이 자기 마을 사데로 되돌아가서, 그곳에 사데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서머나 교회처럼 황제 숭배로 인한 외부의 핍박을 많이 받지는 않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버가모 교회처럼 발람 당이나 니골라 당이 있어서 내적으로 갈등을 심하게 겪지도 않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처럼 사악한 여자 이세벨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데 교회는 영적인 잠에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시 전체에 흐르고 있던 안일함과 해이함이 교회 안으로 그대로 깊이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 있는 물고기는 급한 물살이라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탁류가 흐르는 데로 떠내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데 교회는 영적 생명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사데 교회처럼 살았다 하는 이름만 가진 죽은 자들이 되지 맙시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복된 삶을 살아갑시다. 생명력이 있는 삶을 삽시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깁시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편지의 발신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orrespondent).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1장에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여러 가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하실 때, 각 교회마다 그 가운데 일부분의 모습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각 교회의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데 교회에게 편지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두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일곱 별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기록하면서, 먼저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문안을 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삼위 하나님의 삼위이신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계1: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성부: 계1:8)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성령)과

계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성자)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한 분이시듯이, 예수님이 한 분이시듯이, 성령님도 분명히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 성령님이 “일곱 영”이라고 표현되고 있을까요? 성경에서 7은 완전수입니다. 성령님이 일곱 영으로 묘사된 것은 성령님의 사역이 충만하고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사11:2 1) 여호와의 신 곧 2) 지혜와 3) 총명의 신이요 4) 모략과 5) 재능의 신이요 6) 지식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선지자 이사야는 성령님을 실제 일곱 가지 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것은 성령님이 일곱 개의 다른 영들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이 온전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령님을 가지셨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예수님이 성령님의 사역을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16:7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16:14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이와 같이 성령님의 사역을 주관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성령님이 하시는 사역도 예수님을 증거하며,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 하나님의 일곱 영을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셨을까요? 예수님은 사데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사데 교회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한 역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놀랍도록 부흥했습니다.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모든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바로 성령의 충만함에 있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사데 교회는 전혀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영적으로 죽어버렸습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곳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데 교회가 회개하고, 다시금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일곱 별을 가지셨습니다.


계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계1:20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그러면 왜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 일곱 별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셨습니까? 이 역시 예수님은 사데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데 교회가 영적으로 죽은 것은 그 교회의 사자가 바르게 사역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의 사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도 온전하게 선포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생명의 양식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지 않으면, 그 교회는 사데 교회처럼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는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죽은 교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뒤를 이어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가 된 디모데에게 이와 같은 당부를 했습니다.


딤후4: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사데 교회의 사자는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주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듣기를 원하는 허탄한 이야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사데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려 죽은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승동교회는 어머니 교회입니다. 승동교회는 한국의 모든 교회를 바르게 선도해야 할 귀중한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승동교회의 강단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만이 바르게 선포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승동교회는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교회,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사데 교회가 받았던 책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oncern).


계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3:2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앞선 네 교회들의 경우에는 칭찬의 말씀이 먼저 나오고, 그 후에 책망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데 교회의 경우는 예수님이 소개된 바로 그 다음에 책망의 말씀이 따라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사데 교회의 문제가 심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사데는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사데 교회는 그 건물이 웅장했을 것입니다. 시설도 좋았을 것입니다. 자연히 사람들도 많이 모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데 교회의 겉모습을 보면서, 괜찮은 교회라고 평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은 불꽃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들의 행위가 다니엘서의 표현대로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었습니다. 공의로우신 재판장 예수님의 저울에는 그들의 행위가 하나같이 부족할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박물관에 가면 많은 짐승들을 전시해 놓았습니다. 언뜻 보면 살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컴퓨터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기도 하고, 녹음된 대로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죽은 것들입니다. 그 속에 전혀 생명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영적 상태는 어떠합니까? 회칠한 무덤처럼 겉모습만 번지르르하지는 않습니까? 살았다 하는 이름만 가졌을 뿐, 실상은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은 자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고후6: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사데 교회처럼 세상에서는 살아있는 자 같으나, 예수님 앞에서는 죽은 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세상에서는 죽은 자 같으나, 예수님 앞에서는 살아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섯째로, 사데 교회가 받았던 칭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ommendation).


계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사데 교회는 영적으로 죽은 교회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거듭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알곡이 아닌 가라지였습니다. 그들은 죄와 허물로 더럽혀진 옷을 그대로 입고 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의 체험과 감격이 없었기에, 예배를 드려도 형식적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를 갈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귀가 가려워서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데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었습니다. 비록 몇 명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듭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알곡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데에는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주일이면 사데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죄와 허물로 더럽혀진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었기에, 이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한 이들은 갈급한 마음으로 은혜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의 영이 살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죄와 허물로 더렵혀진 옷을 입고 다닙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흰 옷을 입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죄와 허물로 얼룩진 옷을 씻어서 희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계7:14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막9: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예수님)

행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천사)


예수님도 흰 옷을 입으셨고, 하늘의 천사들도 흰 옷을 입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흰 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다니십니다. 이는 흰 옷을 입은 사람만이 예수님에게 합당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에게 합당한 자들이 됩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이 우리에게 입혀주신 흰 옷을 더럽히지 맙시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는 에녹처럼 이 땅에서도, 또한 영원한 천국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동행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섯째로, 사데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The Command).


계3:2 너는 1)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2) 굳게 하라....

계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3) 생각하고 4) 지키어 5)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명령은 다섯 개의 동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명령은 사데에서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 곧 영적으로 산 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에게는 이러한 명령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첫째, 일깨워라(Wake up).

사데는 잠을 자다가 두 번이나 기습적으로 그 대적들에게 함락을 당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잠에 취해 있으면, 마귀의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는 마귀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영적인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둘째, 굳게 하라(Strengthen).

거듭난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은 교회에서 신앙을 지키기가 결코 쉽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교회로 옮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데에는 오직 하나의 교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작은 불꽃이라도 살아만 있으면, 얼마든지 주변을 환하게 비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양의 소금이라도 짠맛을 잃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음식 전체의 맛을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생각하라(Remember).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물론 무엇을 받았으며, 무엇을 들었는지도 중요합니다. 아울러 그 못지 않게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도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받고 들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받고 들을 때의 자세와 태도도 역시 소중한 것입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그들은 몹시도 뜨거웠을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십자가의 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은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 때의 기쁨과 감격, 그리고 뜨거운 열정 등등을 생각하라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명하셨습니다.

넷째, 지키라(Keep).

그들은 받은 바 성령의 충만함을 지켜야 합니다. 성령님을 근심시키거나 성령님을 소멸시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들은 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가려운 귀를 긁어줄 허탄한 이야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섯째, 회개하라(Repent).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성령님을 근심시키고 성령님을 소멸시켰다면, 다시금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귀가 가려워서 허탄한 이야기를 듣기 좋아했다면,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일깨워라! 굳게 하라! 생각하라! 지키라! 회개하라! 예수님은 이렇게 다섯 가지 말씀으로 명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곧 이어서 경고의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명령이 결코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이는 예수님이 명령하신 다섯 가지 말씀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한 가지만 언급하셨다고 해서, 나머지 네 개의 명령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명령을 대표적으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명에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도적 같이 그들에게 이르실 것입니다. 도적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그 하나는 도적이 어느 시에 임할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도적이 임하는 목적은 해를 끼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의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한 자들은 예수님이 주시는 귀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자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잠에서 깨어납시다. 우리에게 있는 생명의 불꽃이 타오르게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을 때의 기쁨과 감격을 생각합시다. 성령의 충만함을 지키며, 진리의 말씀을 사수합시다. 우리의 가는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회개하고 돌이킵시다.

우리에게 이러한 역사가 있을 때, 우리 자신이 살고, 우리의 가정이 살고, 우리 교회가 살고, 우리 나라가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곱째로, 사데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권고입니다(The Counsel).


계3:5 1)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2)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3)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매번 반복이 됩니다만, 여기서 말씀하는 “이기는 자”란 거듭난 자, 곧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표현을 하면,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예수님에게 합당한 자,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제 예수님은 도적과 같이 임하셔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이기는 자들은 예수님의 심판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들에게 오히려 세 가지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첫째,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더럽혀진 옷을 입고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자신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은 흰 옷을 예복으로 입혀주십니다. 그러기에 이기는 자는 천국 잔치에 기쁨으로 참예하게 됩니다.

둘째, 예수님은 이기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십니다.

그 당시에는 양피지로 호적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흐르면 양피지에 기록된 이름이 흐려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이름을 호적부에서 지워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약속대로 이기는 자의 이름은 하늘 나라 생명책에서 조금도 흐려지는 법이 없습니다. 아울러 그가 죽더라도 그의 이름은 하늘 나라 생명책에서는 결코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기는 자와는 달리 거듭나지 못한 자, 영적으로 죽은 자, 죄와 허물로 더러워진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자는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어떻게 됩니까?


계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울 것입니다. 이는 둘째 사망으로서 지옥불의 영원한 형벌을 당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만이 영화로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이기는 자의 이름을 하나님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실 것입니다.

이는 두 번째 약속보다도 더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이기는 자의 이름을 하늘의 총회 앞에서 불러주시고, 인정해주시고, 칭찬해주실 때, 이기는 자가 얻게 될 기쁨과 감격과 영광은 무한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을 이렇게 끝맺고 계십니다. 이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언제나 공통적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6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기에 “교회들”이라고 복수형이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사데 교회만 들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거듭나지 못하고,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 사람은 도적같이 홀연히 임하시는 예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 속에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눈은 불꽃과 같기에, 각자의 모든 행위를 다 아십니다.

이미 믿음으로 거듭나셨습니까? 예수님이 입혀주신 흰 옷, 곧 의의 옷을 입으셨습니까? 그 옷을 더럽히지 마십시오. 일깨워라! 굳게 하라! 생각하라! 지키라! 회개하라! 예수님의 명에 순종하십시오. 예수님에게 합당한 자되어, 날마다 예수님과 함께 다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흰 옷을 입고 기쁨으로 천국 잔치에 참예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흐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총회 앞에서 우리의 이름을 시인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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