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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계2:12-17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

계2:12-17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




계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계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계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계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계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우리는 매주일 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 교회와 두 번째 교회인 서머나 교회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 번째 교회인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어떠한 교회였습니까? 에베소 교회는 한 마디로 그 처음 사랑을 버렸던 교회였습니다. 물론 에베소 교회가 다른 것들로는 예수님의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그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엄한 책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어떠한 교회였습니까? 서머나 교회는 한 마디로 고난을 당하던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과 유대인들의 훼방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결코 그의 처음 사랑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만 받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버가모 교회는 어떤 교회였습니까? 버가모 교회는 한 마디로 세상과 타협했던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자연히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세속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택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악한 세상을 사랑하거나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15:19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약4:4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 시간 성령님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과 벗이 되고자 했던 우리의 옛 모습을 벗어버립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날마다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과 벗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버가모 교회에 대한 본문의 말씀을 일곱 항목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도시 버가모(the city), 2) 버가모 교회(the church), 3) 발신인(the correspondent), 4) 칭찬(the commendation), 5) 책망(the concern), 6) 명령(the command), 그리고 7) 권고(the counsel).




첫째로, 도시 버가모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ity).




버가모는 지난 주일 우리가 살펴보았던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위치한 처음 세 도시, 에베소, 서머나 그리고 버가모는 소아시아의 삼대 도시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이들 세 도시들 가운데서, 에베소와 서머나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버가모는 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도시 버가모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버가모는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물론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서 상업적으로 가장 번창했던 도시는 에베소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총독이 공식적으로 머무는 곳은 바로 이 버가모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가 미국의 뉴욕과 같다면, 버가모는 미국의 워싱턴에 해당하는 곳이었습니다.

둘째, 버가모는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버가모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또 버가모에는 20만 권에 달하는 책을 소장한 도서관도 있었습니다. 모든 책을 손으로 써야만 했던 시대에, 그곳 도서관이 20만 권이나 되는 책을 소장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고로 영어의 “양피지”(parchment)라는 단어는 바로 이 버가모라는 도시의 이름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애굽에서는 주로 파피루스에 글을 써서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버가모에서는 양피지에 글을 써서 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버가모(Pergamum)라는 지명에서 영어의 parchment, 곧 양피지라는 단어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셋째, 버가모는 이방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버가모에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수많은 신들 가운데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네 신들을 위한 신전들이 있었습니다(Zeus, Asklepios, Dionysos, Athena). 이 가운데 제우스 신전은 고대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간주될 만큼 웅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버가모에는 로마의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이 세 개나 서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황제 트라야누스(Trajanus), 그리고 황제 세베루스(Severus)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버가모에는 이외에도 무수한 우상들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버가모는 그 당시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버가모는 이방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버가모 교회였습니다.




둘째로,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hurch).




사도행전은 버가모 교회가 설립된 배경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에 버가모가 속해 있는 무시아 지방을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행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행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행16: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 갔는데




사도 바울은 버가모를 지나서 드로아로 갔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당시의 도로망이 그렇게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버가모에서 복음을 전했는지, 또는 그곳에서 교회를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따라서 버가모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을 할 때에, 에베소에서 삼 년을 머물며 행했던 사역의 열매로 세워졌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은 이 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행19: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했습니다. 그리해서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이 때에 바울이 전한 복음이 버가모에 전해져서, 그곳에 버가모 교회가 세워졌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버가모는 이방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황제 숭배의 문제로 인해서 극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 13절에 기록된 것처럼, 그곳에서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를 병들게 했던 것은 결코 핍박이 아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이방 신전에 가서 행하는 대로, 더러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행음도 했습니다. 버가모 교회를 망치게 만들었던 주된 원인은 바로 이와 같은 교회의 세속화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도 지금 세상과 타협을 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예컨대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어차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술 한 잔 마시며 술집 아가씨와 잠시 재미 좀 보는 것쯤이야 어떠하겠어? 점쟁이에게 가서 그저 재미로 점 한 번 쳐보는 것인데, 그것쯤이야 어떠하겠어?’

바로 이러한 것들이 세상과 벗하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벗하며 산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에베소 교회처럼, 버가모 교회처럼 예수님의 엄한 책망을 받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벗하려 들지 맙시다. 신앙의 순결을 지키십시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처음 사랑을 잃지 말고 늘 지켜나갑시다.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그 날까지 예수님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합시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편지의 발신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orrespondent).




계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계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신 분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였습니다. 이는 계1:16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 가운데 일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각 교회의 형편에 따라 적절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계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계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에베소 교회와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들을 위로하시며,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모습이십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예수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시고 버가모 교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계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계19:15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이처럼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좌우에 날선 검으로 싸우시고, 무찌르시고, 심판하시는 모습입니다. 이는 버가모 교회가 크게 병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버가모 교회를 수술하시기 위해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시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수술할 때, 의사는 날카로운 칼로 환자의 병든 부위를 잘라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의 병들고 잘못된 부분을 도려내시기 위해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시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옛날 로마의 군인들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싸웠다고 합니다. 로마의 군인들과 맞붙어 싸우는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피해도, 왼쪽으로 피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칼은 좌우에 날이 서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칼은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로마 군인들의 검은 기껏 사람의 몸만 찔러 쪼갤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심판하시는 검은 우리 마음의 생각까지 찔러 쪼갭니다. 따라서 우리가 죄를 짓고서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심판을 결코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예수님은 우리를 어떠한 모습으로 찾아오시겠습니까? 우리를 위로하시며 칭찬하시는 모습으로 찾아오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책망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시는 모습으로 찾아오시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 동안 예수님을 멀리 떠나 세상과 벗하며 살았다면, 이 시간 즉시 회개하고 예수님에게로 되돌아오십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기쁘게 영접하시며,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우리의 발걸음을 형통하게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버가모 교회가 받았던 칭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ommendation).




계2:13 1)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 2)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3)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를 세 가지로 칭찬해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의 영적 환경이 열악하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 살펴본 대로, 서머나에는 유대인들로 구성된 “사단의 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버가모에는 “사단의 위” 곧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울러 오늘 본문은 버가모를 가리켜서 “사단의 거하는 곳”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지옥에 사단의 보좌가 있고, 지옥이 바로 사단의 거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옥은 사단이 장차 갇히게 될 장소입니다. 사단의 보좌는 이 세상에 있습니다. 사단은 이 세상에 거하면서 자기의 악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버가모를 가리켜서 “사단의 위”가 있으며, “사단의 거하는 곳”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버가모는 각종 우상의 집산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 버가모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 신전의 제단은 엄청난 크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양이 마치 보좌처럼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이 제우스 신전을 생각하면, 그들의 머리에는 사단의 보좌가 저절로 떠올랐을 것입니다.

또한 버가모에는 그 수호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도 있었습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치료의 신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이는 뱀의 형상을 한 신이었습니다. 지금도 뱀의 형상으로 의학을 상징하는 이유는 바로 이 버가모의 수호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에게서 유래한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뱀의 형상을 한 그 지방의 수호신 아스클레피오스를 생각할 때마다, 절로 옛 뱀 곧 사단을 자기들의 머리에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버가모에는 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이 세 개나 서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로마의 총독도 있었고, 또한 로마의 군인들도 많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버가모는 자연히 다른 도시들보다도 황제 숭배가 더 많이 강요되는 도시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버가모는 황제 숭배를 비롯해서 각종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곳을 가리켜서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사단의 거하는 곳”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의 영적 환경이 열악하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누구라도 일년에 한 차례는 의무적으로 황제를 숭배하는 신전에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곳에 있는 제단에 분향을 하면서, 이러한 말로 황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가이사는 나의 주이십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증명서가 발급이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증명서가 없는 것이 발각되면, 그는 로마에 대해서 반역을 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처형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버가모 교회는 결코 가이사의 이름을 붙들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이십니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황제 숭배라는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자신들의 믿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 한 가지 실례를 친히 들어주셨습니다. 바로 안디바의 순교였습니다.

성경은 안디바에 대해서 더 이상 자세하게 전해주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라틴 교부였던 터툴리안(Tertullian, A.D. 160년경~240년경)은 그의 저서 『순교자에 대해서』(Ad martyras)라는 책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사자, 곧 그 교회의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황제 숭배를 거부했습니다. 황제 숭배자들은 그를 붙잡아서 본보기로 처형을 했습니다. 안디바는 놋쇠로 만든 황소 모양의 풀무에 갇혀서 불에 타죽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잔혹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버가모 교회는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인정하시면서, 그들을 칭찬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안디바를 가리켜서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와 똑같은 칭호가 예수님에게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계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계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하나님의 충성된 증인이셨던 예수님을 본받아서, 안디바도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도 안디바처럼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이 됩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칭찬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장차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기쁘게 시인해주시며, 우리를 인정해주시고, 우리를 높여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섯째로, 버가모 교회가 받았던 책망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oncern).




계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1)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계2:15 이와 같이 네게도 2)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를 두 가지로 책망하셨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될 두 가지 이단 사상을 용납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한 가지는 구약의 인물을 딴 발람의 교훈이었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신약의 인물을 딴 니골라당의 교훈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발람에 대해서는 구약성경 민수기 22장 이하 25장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고서 가나안 땅을 향해 올라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자기에게로 초청했습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결국은 모압 왕 발락의 초청에 응했습니다. 그는 모압 왕 발락이 요구하는 대로, 세 번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발람은 다른 방법을 모압 왕 발락에게 일러주었습니다.




민25:1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민25:2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민25: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대로, 바알브올 사건은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그 올무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리고는 모압 여인들과 행음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 사건에 연루된 백성의 두령들은 목매어 달림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염병이 임했습니다. 그 때의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버가모 교회에도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출석을 하면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방 신전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서 우상도 섬겼습니다. 그리고 신전에 있는 창기들과도 행음을 했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성경은 니골라당의 정체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단지 초대교회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레니우스(Iraneus, 주후 1세기~2세기의 인물)는 본문에 나오는 니골라를 예루살렘 교회의 7집사 가운데 한 명으로 보았습니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니골라가 뒤에 가서 배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를 추종하는 자들과 함께 이단인 니골라당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떻든 오늘 본문 15절은 니골라당의 교훈을 설명하면서, “이와 같이”라는 말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니골라당의 교훈도 발람의 교훈과 마찬가지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마도 니골라당은 하나님의 은혜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무시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무율법주의로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만 지나치게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도덕폐기론에 빠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에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를 짓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서는, 이방신전에 가서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리고는 신전의 창기들과도 음행을 했습니다.

물론 버가모 교회 성도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는 비록 소수였지만,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애당초 이단 사상을 용납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는 이단 사상을 막지를 못했습니다. 결국 그 이단 사상에 물든 사람들이 교회를 병들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버가모 교회는 예수님의 책망을 받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시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서 늘 진리의 말씀 위에 굳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버가모 교회처럼 이단 사상에 미혹되어 예수님의 책망을 받는 일이 결코 없기를 바랍니다.




여섯째로, 버가모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The Command).




계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회개하라.”

예수님의 명령은 간단명료했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따르고,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것은 심각한 죄였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이들 이단 사상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버가모 교회는 전체적으로 회개해야만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와는 달리 버가모 교회는 이들 이단 사상을 철저하게 배격하지 못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자기들의 사상을 펼치는 것도 강하게 금하지를 못했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따르고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랐던 자들은 즉시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버가모 교회 전체도 악한 자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만 했습니다.

만일 버가모 교회가 예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민22:23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떠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민31:8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하나님은 칼로서 발람의 악한 길을 저지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그 길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칼 밑으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나 결국 발람은 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 입에서 나오는 좌우에 날선 검으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용납하는 자들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속히 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심판의 긴급성을 의미합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드신 예수님은 심판주로서 시시각각 다가오고 계시기 때문에, 버가모 교회는 칼로 심판을 당한 발람의 최후를 기억하고서 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는 지금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내어 맡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후6:14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이제 우리는 모든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립시다. 육신의 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악하고 더러운 세상과 타협하려고 들지 맙시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날마다 빛 가운데로 행하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곱째로, 버가모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권고입니다(The Counsel).




계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1)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2)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3)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먼저 예수님은 버가모 교회에게 순종을 요구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예수님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하실 때마다 매번 똑같은 말씀으로 권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듣는 이들은 모두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세 가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5: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기는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러면 이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해서 우리가 무엇으로 세상을 이깁니까?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세 가지는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감추었던 만나”를 주실 것입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던 40년 동안 먹었던 양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만나를 항아리에 넣어서 대대로 간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먹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함이었습니다.




출16:33 또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예수님이 약속하신 “감추었던 만나”는 곧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곧 생명의 떡으로서, 하늘로서 내려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6: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6:50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따라서 예수님이 이기는 자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기는 자는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흰 돌”을 주실 것입니다.

로마시대에는 경기에 우승한 자들에게 “흰 돌”이 주어졌습니다. 그 돌에는 우승한 사람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상패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경기가 모두 끝나면 잔치가 베풀어졌습니다. 흰 돌을 받은 사람만이 그 잔치에 참예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신앙의 경주장에서 이기는 자에게 “흰 돌”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흰 돌”을 받은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흰 돌”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해주실 것입니다.

천국의 기본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라는 단어입니다. 예컨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노래 등입니다. 따라서 “새 이름”도 천국의 영광과 관련된 것이 분명합니다. 새 이름을 받은 사람만이 하늘 나라에서 베풀어지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예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이기는 자에게 새 이름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시는 새 이름은 예수님과 그것을 받는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서 받아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천국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과 우리 개인과의 관계에서 결정되어 집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버가모 교회에는 두 종류의 신자가 있었습니다.

먼저 버가모 교회에는 핍박과 유혹 속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던 신실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순교자 안디바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서 “내 충성된 증인”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세상과 타협을 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핍박을 면할 수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사회로부터 소외를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속히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명하셨습니다.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검으로서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다면 이 시간 회개합시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처음 사랑을 회복합시다. 그리고 그 처음 사랑을 끝까지 지켜나갑시다.

그리함으로서 우리 모두 예수님이 주시는 “감추었던 만나”를 받음으로, 예수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면서 삽시다. 또한 예수님이 주시는 “흰 돌”을 받아 장차 천국의 문을 당당히 통과합시다. 아울러 예수님이 주시는 “새 이름”을 받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영광스럽게 참예합시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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