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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계3:14-22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1)

계3:14-22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1)


계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계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계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 동안 우리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가운데서 마지막 일곱 번째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입니다. 우선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세 그룹으로 나누어봅니다.

첫째, 예수님의 책망은 전연 받지를 않고, 예수님의 칭찬만 받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받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및 사데 교회였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칭찬은 전연 없고, 예수님의 책망만 받은 교회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이와 같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가운데서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던 교회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각 교회가 보여주었던 문제의 심각성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러더니 버가모 교회는 세상과 타협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두아디라 교회는 죄로 얼룩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만 가졌을 뿐, 아예 영적으로는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데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보다는 낳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데 교회 안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몇 명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두가 거듭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둔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 밖에 서서, 그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문을 열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를 않았습니다.

만일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 구원을 받은 자들이 단 몇 명만 있었더라도, 예수님은 분명 그들을 언급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 안에는 구원받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불행했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본문의 말씀을 관례에 따라 우리는 여섯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도시 라오디게아(the city), 2) 라오디게아 교회(the church), 3) 발신인(the correspondent), 4) 책망(the concern), 5) 명령(the command), 그리고 6) 권고(the counsel).


첫째로, 도시 라오디게아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ity).


도시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아래쪽으로 약 7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위치한 도시들 가운데서 가장 남쪽이면서 가장 동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도시 라오디게아는 주전 3세기 수리아의 안티오커스 2세(Antiochus II)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안티오커스 2세는 루커스(Lycus) 계곡에 이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도시를 자기 아내의 이름을 따서 라오디게아라고 불렀습니다.

루커스 계곡에는 세 개의 도시가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가 있었습니다. 또한 라오디게아에서 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 골로새가 있었습니다. 이들 세 도시는 바울 서신에도 긴밀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골4:13 그가(에바브라) 너희(골로새)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바울은 에바브라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많이 수고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 세 도시들은 모두가 루커스 계곡에 세워진 자매 도시들로서 서로 인접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도시 라오디게아의 그 당시 특징을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라오디게아는 물 사정이 매우 나빴습니다.

라오디게아의 북쪽에 있는 히에라볼리는 온천도시였습니다. 오늘날 파묵깔레라고 불리는 히에라볼리는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온천욕을 하기 위해서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히에라볼리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도 라오디게아까지 흘러오면 식어서 미지근해졌습니다.

반면에 라오디게아의 동쪽에 있는 골로새에서는 얼음같이 차가운 물이 솟아났습니다. 그렇지만 그 물도 라오디게아까지 흘러 내려오다 보면 역시 미지근해졌습니다. 게다가 이 미지근한 물 속에는 다량의 석회석과 철분, 그리고 각종 폐수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미지근한 물은 그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물을 마시면 몸에 해로웠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물은 맛과 냄새가 역겨웠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시더라도 그대로 토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관련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라오디게아의 물) 더웁지도 아니하고(히에라볼리의 물) 차지도 아니하니(골로새의 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어쩔 수 없이 라오디게아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돌로 큰 수도관을 만들었습니다. 지름이 1m나 되는 거대한 수도관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이 수도관을 통해서 오염되지 않은 물을 멀리서 끌어와야 했습니다.

둘째, 라오디게아는 부자 도시였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오늘날로 말하면 소아시아의 여러 곳을 연결하는 허브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라오디게아는 금융산업으로 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여러 은행들이 세워졌습니다.

로마의 정치인이었던 키케로(Cicero, 106 ~ 43 B.C.)는 거액의 신용장을 이곳에서 현금으로 바꾼 적이 있었습니다. 또한 주후 60년 대지진으로 라오디게아가 파괴되었을 때, 라오디게아는 로마의 지원을 거절하고 자력으로 도시를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재건했습니다.

그만큼 라오디게아의 금융 자산은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부유함과 그로 인한 그들의 거만한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셋째, 라오디게아는 양모 산업으로 유명했습니다.

루커스 계곡에는 검은 양들이 많이 사육되고 있었습니다. 이들 검은 양들은 까만 색깔의 윤기가 나는 털을 제공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이것으로 오늘날의 밍크 코트처럼 값비싼 옷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그 당시의 패션을 주도할 만큼 아주 인기가 있는 옷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3:18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그들은 검은 양털로 만든 옷을 입고서 한껏 뽐내기를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 벌거벗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흰 옷, 곧 의의 옷을 사 입어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라오디게아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각종의 약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안약이 유명했습니다. 이 안약을 구하기 위해서 각처에서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이 안약은 라오디게아가 속한 지방의 이름을 따서 “브루기아의 분말”(Phrygian Powder)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계3:18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신령한 안약을 사서 자신들의 심령에 바르기를 바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그들의 영안이 뜨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안이 열려야, 그들은 자기들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바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도시 라오디게아의 특징을 네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라오디게아는 물 사정이 매우 나빴습니다. 그곳에 있는 미지근한 물은 해롭고 역겨워서 그대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라오디게아는 부자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라오디게아는 금융 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셋째, 라오디게아는 양모 산업으로 유명했습니다. 그곳에서 생산되는 검은 양털 옷은 아주 인기 있는 고가의 제품이었습니다.

넷째, 라오디게아에는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브루기아의 분말”이라는 유명한 안약이 제조되었습니다.

도시 라오디게아의 이러한 배경 하에, 이제 우리는 그곳에 세워진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둘째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hurch).


성경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설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오늘 본문 이외에도 라오디게아 교회와 관련된 몇 가지 단편적인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설립과 당시의 형편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라오디게아 교회의 설립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사도 바울은 루커스 계곡을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루커스 계곡에 위치해 있는 세 도시 곧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에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한 적은 없었습니다.


골2: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바울은 골로새나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얼굴을 대면해서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루커스 계곡에 있는 세 교회들을 간접적으로 세웠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행19: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골1: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바울은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삼 년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그가 두 해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 열매는 대단했습니다. 각처에서 온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서, 자기들의 고향에 돌아가 교회를 세웠습니다.


골1: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골4: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골4: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골로새 사람 에바브라도 에베소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뒤에 그는 자기의 고향으로 되돌아가 그곳에 골로새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근 마을들인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도 각기 교회를 세웠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의 직접적인 설립자는 에바브라였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바브라는 바울의 제자로서, 바울을 대신하여 그 교회를 세웠을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아시아의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바울이 간접적으로 세운 교회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둘째, 라오디게아 교회의 당시 형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루커스 계곡에는 세 개의 도시가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골로새, 라오디게아, 그리고 히에라볼리였습니다. 이들 세 도시는 서로 인접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각 도시에 있는 세 교회들의 사정과 형편도 서로 비슷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였습니다. 그 때 골로새 교회는 이단 사상으로 인해서 심각할 정도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이단 사상의 주된 이슈는 기독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이단 사상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라고 이단 사상은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게 되면,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도 결국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골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바울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 사상을 가리켜서 철학이며, 헛된 속임수며, 사람의 유전이며,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 골로새 교회는 이러한 이단 사상 때문에 큰 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를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에게로 파송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해서 그 당시 퍼져나가던 이단 사상의 잘못된 기독론을 반박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 자체이십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이십니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에게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 당시의 이단 사상은 잘못된 기독론으로 골로새 교회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인근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말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4: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기록한 골로새서를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읽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골로새 교회와 마찬가지로 라오디게아 교회도 똑같이 이단 사상에 의해서 야기된 기독론의 문제를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를 기록한 지 삼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때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편은 어떠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 곧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단 사상을 물리치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단적 기독론에 완전히 물들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예수님을 교회의 문 밖으로 내쫓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이 없는 교회,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교회, 구원받지 못한 교회가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은 전혀 받지를 못하고, 예수님의 책망만 잔뜩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동안 출석을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이 우리 모두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요11:27).

또한 마르다의 이 신앙 고백이 우리 모두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

마찬가지로 도마의 이 신앙 고백이 우리 모두의 신앙 고백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편지의 발신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orrespondent).


계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1) 아멘이시요 2)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3)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교회마다 달랐습니다. 이는 각 교회의 사정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각 교회의 사정에 맞추어, 의도적으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것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아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차례대로 살펴봅니다.

첫째, 예수님은 아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아멘”이라는 단어는 본시 히브리어였습니다. 히브리어는 구약성경에 쓰여진 언어입니다. 이것을 헬라어에서 그대로 음역해서 아멘이라고 사용했습니다. 헬라어는 신약성경에 쓰여진 언어입니다. 영어나 우리말에서도 역시 아멘이라고 그대로 음역하고 있습니다.

아멘이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진리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아멘, 곧 진리라는 단어가 하나님을 부르는 칭호에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65:16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아멘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아멘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이 구약성경의 아멘이시라면, 예수님은 신약성경의 아멘이십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는 예수님의 신성, 곧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에게 의미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단어는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거룩, 공의, 영원, 영광 등등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필이면 아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까? 특별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후1:20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예컨대 죄 사함의 약속도, 구원의 약속도, 영생의 약속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어떠한 약속도 이루어지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에게 성취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아멘이신 예수님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셔야 하고, 또한 우리가 아멘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아멘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사역에도 믿음으로 아멘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믿음으로 아멘 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귀가 가려워서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초등 학문에 빠져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멘이신 예수님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죄 사함, 구원, 영생 등등을 전혀 받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멘이신 예수님은 우리가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에만 아멘 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나 세상의 초등 학문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지 맙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아멘이신 예수님,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에만 아멘 합시다. 그리함으로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축복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요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요3:32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신 이십니다. 예수님은 만물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모든 신령한 일들을 충성되고 참되게 우리에게 증거하셨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증거를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이단 사상의 거짓된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서 구원을 얻지 못하는 자리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훌륭한 스승이나 위대한 성현의 가르침 정도로만 생각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증거하신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임을 전적으로 믿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당시의 이단 사상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와 같은 이단적 기독론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저 믿음의 스승이나 위대한 선지자쯤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단 사상에 빠진 라오디게아 교회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는 온 세상 우주 만물이 예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골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이단적인 기독론에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독론은 분명하고도 확고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아멘이시며,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아멘 하십시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예수님이 증거하신 모든 것들을 믿음으로 받으십시다. 아울러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으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는 거듭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모든 축복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1907년 1월 6일 주일 저녁예배 때였습니다.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는 평안남도 도사경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집회에는 그 당시 평양신학교의 졸업반으로서 조사의 직분으로 장대현 교회를 섬기고 있던 길선주 장로님이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설교의 제목은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한 설교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 밖에 서서 그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빗대어서 설파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날 설교의 요지는 이러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이상한 귀빈이십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시고, 귀하신 몸으로 문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십니다. 또한 전능하신 분이 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십니다.

아울러 주인이 아니면서도 주인처럼 집안에 들어앉아 있는 사람은 괴이한 주인입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하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또한 괴이한 주인입니다. 그리고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정말로 괴이한 주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섬기고 있는 장대현 교회가,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그날 집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바로 괴이한 주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문을 엽시다. 문을 엽시다. 문을 열고 존귀하신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성령님을 영접합시다.”

설교를 마치고 난 뒤에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아이고 아이고’라는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통회 자복하는 소리였습니다. 교회 안은 순식간에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회개하는 마음으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 날 예수님은 각자의 마음 안으로, 그리고 장대현 교회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1907년에 있었던 평양대부흥운동은 그렇게 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올해로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회개와 대부흥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여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들어오시고 싶어도 들어오실 수가 없을 정도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세상적이며 지저분한 것들로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애통하는 심령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합시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심령으로 열심을 내어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그리함으로서 100년 전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하게 일어났던 대부흥의 역사가 다시 한번 이 땅에 일어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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