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박상훈목사

[스크랩] 계2:18-29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1)

계2:18-29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1)


계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계2:19 내가 네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계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계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계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계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계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계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계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계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계2: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 우리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가운데서 그 네 번째인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가운데서 네 번째이니까, 순서적으로는 한 가운데 해당하는 셈입니다.

우선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교회들의 특징을 생각해봅니다. 첫 번째 교회였던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던 교회였습니다. 두 번째 교회였던 서머나 교회는 고난을 당했던 교회였습니다. 세 번째 교회였던 버가모 교회는 세상과 타협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두아디라 교회는 어떠한 교회였습니까? 한 마디로 두아디라 교회는 죄로 얼룩진 교회였습니다. 정결하지 못한 교회였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가 마땅히 지녀야 할 깨끗함과 거룩함을 상실해버린 교회였습니다.

물론 버가모 교회 안에도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은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와는 달리 두아디라 교회의 경우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음행을 하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말하자면 버가모 교회에서는 죄악의 누룩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면,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그것이 온 덩이에 퍼져버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만연했던 죄악의 심각성에 대해서 한 가지 실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계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會)라(서머나 교회)

계2:13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버가모 교회)

계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두아디라 교회)


서머나에는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사단의 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의 훼방을 당했습니다. 버가모에는 사단의 보좌가 있었으며, 사단이 거하는 곳이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두아디라 교회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이미 사단의 깊은 것 안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만큼 두아디라 교회는 죄악으로 깊이 물들어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곳에 보내진 편지도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진 편지들 가운데서 가장 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을 일곱 항목으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도시 두아디라(the city), 2) 두아디라 교회(the church), 3) 발신인(the correspondent), 4) 칭찬(the commendation), 5) 책망(the concern), 6) 명령(the command), 그리고 7) 권고(the counsel).

이 가운데서 처음 네 항목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도록 하고, 그 다음 세 항목은 다음 주일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예수님이 말씀으로 우리 모두를 거룩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오른손으로 붙들린 바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크고도 귀하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도시 두아디라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ity).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기록된 순서는 지리적인 이유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편물이 배달되던 순서가 그러했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크고도 번창했던 항구 도시 에베소가 우체국 본부의 역할을 했습니다.

에베소에서 우편물이 출발하면, 먼저 그 위로 60km 떨어진 서머나로 갔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또 그 위로 100km 떨어진 버가모로 갔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오른쪽으로 60km 떨어진 두아디라로 약간 내려갔습니다.

그 뒤에는 사데, 빌라델비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의 순서로 내려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지도 위에서 이곳들을 연결해보면 마치 아라비아 숫자 7자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아무튼 두아디라는 버가모에서 남동쪽으로 60km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두아디라는 헤르무스(Hermus) 강과 카이쿠스(Caicus) 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있는 계곡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 계곡을 따라 가면 그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였던 버가모에 이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두아디라는 수도 버가모의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본시 두아디라는 수도 버가모를 지키기 위한 군사적 전초기지였습니다. 그러나 Pax Romana, 곧 로마의 평화가 도래하자 두아디라는 군사적 의의를 상실했습니다. 그 대신 두아디라는 교통이 좋고, 물이 풍부했기 때문에 상공업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두아디라에서 출토된 비문들에 의하면, 그곳에는 수많은 동업 조합(guild)들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양모, 피혁, 직조, 염색, 도기, 노예 매매, 빵 제조, 청동 제조 등등이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각종의 동업 조합이 형성되어 그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두아디라에 있던 각종의 동업 조합들은 각각의 수호신을 섬겼습니다. 조합원들은 다 함께 정례적으로 신전에 올라가서, 자기들의 수호신에게 제사했습니다. 그리고 나면 방탕한 술잔치가 열렸습니다. 그 때 뒤따라오는 것이 신전에 있는 창기들과의 성행위였습니다.

그 당시 두아디라 사람들은 반드시 어느 한 동업 조합에 가입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조합에서 행하는 대로, 함께 어울려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음행에도 가담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회적으로 소외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곳에 하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되고, 타락한 세상에서 소금이 되어야 할 사명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두아디라 교회였습니다.


둘째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hurch).


우리는 서머나 교회와 버가모 교회처럼 두아디라 교회의 설립 배경에 대해서도 잘 알지를 못합니다. 사도행전에 직접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는 두아디라 교회가 설립된 배경에 대해서 두 가지 가능성을 고려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첫째,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때에 행했던 사역의 결과로 추정해보는 것입니다.


행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행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에 마게도냐의 첫 성이었던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빌립보에 있던 한 여성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와 그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두아디라 사람 루디아는 자줏빛이 나는 옷감을 판매하는 장사였습니다(a dealer in purple cloth). 두아디라의 계곡에는 담쟁이처럼 기어오르는 특이한 식물이 무성하게 자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식물의 뿌리에서 자줏빛을 내는 염료가 채취되었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에서는 자줏빛 염료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아마도 루디아는 그 때 사업차 빌립보에 가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값이 비싼 자줏빛 옷감을 취급하는 상인이었기에 매우 부유했을 것입니다. 이는 그가 바울과 그 일행을 자기의 집으로 모시고 와서 유숙하게 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루디아와 그의 집 전체가 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뒤에 이들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이 고향 두아디라로 되돌아와서, 두아디라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 때에 행했던 사역의 결과로 추정해보는 것입니다.


행19:10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사도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 때에, 에베소에서 삼 년을 머물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바울은 두 해에 걸쳐서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했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당시 소아시아에서는 에베소가 제일 번창했습니다. 따라서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사업차 에베소를 방문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두아디라 사람들 중에서도 에베소에 왔다가 두란노 서원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자기 마을 두아디라로 되돌아가서, 그곳에 두아디라 교회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든지 후자의 경우든지 간에, 두아디라 교회는 바울의 사역으로 이루어진 열매였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두아디라에는 여러 동업 조합들이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일단 어느 조합에 가입을 하면, 그 조합원들 사이의 결속력은 대단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니까, 교인들 상호간의 결속력도 강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잘 감싸주었습니다. 그들은 상호간의 신뢰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잘 배려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교회가 평안한 것 같았습니다. 사랑도 풍성한 것 같았습니다. 교회의 평판이 좋으니까, 사람들도 많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속으로는 곪고 있었습니다. 죄악의 병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아디라 교회는 그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그렇게 되었던 주된 원인은 교회 안에 있던 한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계2:1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본시 이세벨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악녀 중의 악녀였습니다. 따라서 두아디라 교회를 병들게 했던 여자의 실제 이름이 이세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 딸에게 이세벨이라는 악한 여자의 이름을 붙여주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기서의 이세벨은 두아디라 교회를 병들게 했던 악한 여자에게 상징적으로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교인들은 그의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었습니다. 아울러 행음도 했습니다.

이세벨에 대해서는 우리가 다음 주일에 더욱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두아디라 교회가 결정적인 실수를 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고전14:34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딤전2: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교회 안에서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들은 악한 여자 이세벨이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심각한 문제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악한 여자 이세벨의 가르침에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었습니다. 신전의 창기들과 행음도 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이미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방의 교회들도 행하여서는 안 된다고 결정을 내린 일들이었습니다.


행15: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의 가르침에 미혹을 받아서 우상의 제물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간음을 행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신전의 창기들과 음행도 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도 간음을 행했던 것입니다.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정결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 자신을 정결하게 만들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집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십시다. 또한 항상 깨어 기도합시다. 그리함으로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집에서 예수님이 귀히 쓰시는 성결한 그릇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편지의 발신인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orrespondent).


계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1) 그 눈이 불꽃 같고 2)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3)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1장에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하실 때, 각 교회마다 그 가운데 일부분의 모습으로 각각 다르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각 교회의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게 편지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눈은 불꽃 같았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발은 빛난 주석과 같았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들 세 가지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눈은 불꽃과 같았습니다.


계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이는 예수님의 통찰력과 전지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눈은 불꽃 같기에 모든 것을 환하게 꿰뚫어 보십니다. 따라서 아무리 은밀하게 행해지는 일이더라도 예수님의 불꽃 같은 눈에는 밝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계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사람은 외모를 중시합니다. 사람은 외모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꽃 같은 눈으로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십니다. 따라서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예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X-Ray로 사진을 찍어보면 그 사람의 속에 있는 것까지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뼈가 부러진 것이나, 속으로 병이 든 것까지도 다 알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아디라 교회가 겉보기에는 평안해 보였습니다. 평판도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불꽃 같은 눈으로 두아디라 교회를 들여다보실 때, 두아디라 교회는 속으로 깊이 병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발은 빛난 주석과 같았습니다.

이는 계1:15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계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왕들이 앉는 자리를 보좌라고 합니다. 옛날의 왕들은 언제나 높은 보좌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왕에게서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은 언제나 왕의 발아래 꿇어 엎드렸습니다. 따라서 왕의 발은 권세 있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계19:15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사람이 주석과 같은 발에 짓밟히면, 그 등뼈가 으스러지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만 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주석과 같은 발로서 심판을 하실 때, 악인은 예수님의 발아래서 가차없는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당시 두아디라에는 청동업이 발달했습니다. 그곳에는 국경수비대의 역할을 하는 로마의 군인들이 많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군인들의 투구나 방패 등의 장비를 공급하기 위해서 자연히 두아디라에는 제련소가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련소에서는 금속을 풀무에 넣어 뜨거운 불로 벌겋게 달굽니다. 불순물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불순물이 제거된 금속에서는 환하게 빛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는 것은 예수님의 순결과 거룩함을 상징해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 두아디라 교회는 죄로 인해 더럽게 얼룩져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교회로서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두아디라 교회를 짓밟아 심판하시기 위해서, 거룩하신 예수님은 빛난 주석과 같은 발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칭호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칭호가 요한계시록 1장에는 나타나고 있지를 않습니다. 사실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틀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예수님에게 직접적으로 사용된 것은 오늘 본문이 유일한 경우입니다.


계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요한계시록 1장에서는 예수님의 칭호로서 “인자”(人子)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인자 곧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이라는 칭호는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가지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십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대제사장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아시고, 우리를 동정하시며 위로해주십니다. 예수님 “인자”로서 우리가 당한 그 모든 시험을 친히 받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인자”로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타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모습이 “인자”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의도적으로 바뀐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계2:22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계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계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위로자의 모습이 아니라, 심판주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에 “인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려고 들지를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계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예수님은 우리를 어떠한 모습으로 찾아오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인자로서,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모습으로 찾아오시겠습니까?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지금 죄악 된 길, 화와 저주의 길, 사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면, 이 시간 회개합시다. 우리의 발걸음을 돌이킵시다.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인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우리를 용납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 오른손으로 붙드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의의 길로, 축복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두아디라 교회가 받았던 칭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The Commendation).


계2:19 내가 네 사업(works)과 1) 사랑과 2) 믿음과 3) 섬김과 4) 인내를 아노니 5) 네 나중 행위(works)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예수님은 우선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을 아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업”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같은 절 하반부에서는 “행위”로 번역되었습니다. 실상은 똑같은 단어입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통찰하시는 예수님은 사람들의 모든 행위들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선한 행위들은 칭찬하셨고, 악한 행위들은 책망하셨습니다.

두아디라 교회가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던 사업, 곧 행위는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의 선한 행위를 네 가지로 밝혀주셨습니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였습니다.

말하자면 두아디라 교회에는 사랑의 행위가 있었고, 믿음의 행위가 있었고, 섬김의 행위가 있었으며, 인내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였던 루디아의 모습을 통해서 두아디라 교회가 칭찬을 받았던 이들 네 가지 행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행16:14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행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행16:40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두아디라에서 온 루디아가 마음을 열고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청종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과 그 일행을 환대했습니다. 아마도 그 때까지 바울과 그 일행은 자신들의 경비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루디아는 그들을 강권해서 자기 집에 들어가 유하도록 했습니다. 말하자면 루디아에게는 사랑의 행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루디아는 복음을 받고서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는 자기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자기의 장사를 돕는 사람들까지도 다 세례를 받게 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루디아에게는 믿음의 행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한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그 여종의 주인들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바울은 루디아의 집에 들러 그곳에 모여있는 형제들을 위로했습니다.

이로 보아 루디아의 집은 예배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루디아와 그의 가족들, 귀신들렸던 여종,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족 등이 중심이 되어서 이른바 빌립보 교회가 탄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루디아에게는 섬김의 행위도 있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이 복음 때문에 심한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루디아는 바울이 많은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을 계속했습니다. 말하자면 루디아에게는 인내의 행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두아디라의 자주 장사 루디아는 두아디라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루디아의 선한 행위들을 잘 본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사랑의 행위와 믿음의 행위와 섬김의 행위와 인내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어언 사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에 편지하실 때, 두아디라 교회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에베소 교회는 사십 년 전에 가졌던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사십 년 전에 가졌던 처음의 선한 행위들을 조금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간직하며 유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아디라 교회는 갈수록 선한 행위에 힘썼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처음보다도 사랑의 행위가 더 많아졌습니다. 믿음의 행위도 더 많아졌습니다. 섬김의 행위도 더 많아졌습니다. 인내의 행위도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칭찬만 들으면, 두아디라 교회는 전연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매우 이상적인 교회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0절 말씀은 어떻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두아디라 교회에는 사랑이 많았습니다. 믿음도 많았습니다. 섬김도 많았습니다. 인내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두아디라 교회가 예수님의 책망을 받아야 했습니까? 왜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로자의 모습이 아닌 심판주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까?

두아디라 교회는 더러운 죄로 심각하게 얼룩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두 사람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심각한 죄의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일이 되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평일이 되면 그들은 자기들이 속해 있는 동업 조합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의 신전에 가서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신전에 있는 창기들과 행음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두아디라 교회가 이처럼 사단의 깊은 것에 빠져들고 말았습니까? 두아디라 교회가 교리적으로 건전하게 서지를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를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분명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자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용납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그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다른 신들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성결한 삶을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엡5: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5: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성경은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행해야 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곧 이어서 음행이나 온갖 더러운 것은 우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사랑이 깨끗해야지 더럽고 추한 음행으로 떨어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에게는 사랑의 행위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에 거룩함이 없으니까, 그들의 사랑은 음행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별반 죄의식이 없이 이방 신전의 창기들과 행음하는 일을 즐겼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에도 교리적으로 잘못된 이단들이 우리를 미혹할 때에, 가장 많이 쓰는 상투적인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지만, 자기들에게는 사랑이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만 많으면, 다 되는 것입니까?

예컨대 주먹 세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 사이에 있는 의리와 사랑은 도무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들을 칭찬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거룩함이 결여된 사랑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사랑의 행위도 많았고, 믿음의 행위도 많았고, 섬김의 행위도 많았고, 또한 인내의 행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리적으로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또한 그들이 교회로서의 거룩함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엄한 책망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딤후2: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딤후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딤전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은 어떠한 그릇입니까? 깨끗한 그릇입니다. 우리가 귀하게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깨끗해질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집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말씀 위에 바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거룩하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증인으로서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 agaser 원글보기
메모 :